이홍우, 교육의 목적과 난점 6장, <정신건강과 교육>에 대한 고찰.
1. 교육의 개념을 규정하는 두가지 방식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교육은 ‘외생적 개념‘과 ‘내생적 개념’으로 구분 된다. 외생적 개념은 다른말로 ‘사실적 개념’으로, 교육은 ‘공(비다)’이며, 사실적인 관계에 의해 그 의미가 채워지는 것으로 판단된다. 교육이 ‘외생적 개념’으로 사용되어 질때는, 교육은 언제나 무엇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다. 경제발전이라는 외부에서 오는 개념에 대한 교육이 사실적인 근거로 드러나는 개념에 의해 성장의 원동력(수단)으로 쓰인다던지, 여러가지 교육 이외의 목표들을 이루게 되는데에 수단적 가치를 갖게 된다. 정신건강 측면에서는 정신건강을 위해 교육을 배운다. 이용한다. 와 같은 개념일것이다. 내생적 개념은 이와 반대의 개념이다. 내생적 개념은 다른 말로 ‘논리적 개념‘이라고 칭할 수 있는데, 이전의 외생적 개념에서는 이미 외부의 것의 개념이 정의되어 있고, 그에 따라 교육의 의미가 결정이 되었다면, 내생적 개념, 논리적 개념에서는 교육의 의미가 이미 정의되어 있고, 이것에 비추어 외부개념의 의미가 정의되는것을 볼 수 있다. 이때 이전의 외생적 개념에서는 외부의 개념에서 교육을 수단으로 사용했다면 내생적 개념에서는 교육 내부에 이러한 것들의 원리가 모두 존재한다고 판단한다. 그리하여 논리적 관계가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2. ‘문제발견’의 유용성(중요성)은 어디에 있는가? ‘문제발견’ 의 정의는 앞선 개념들에 의해 두가지로 나뉠 수 있다. 먼저, 첫번째는 실생활에서 느끼는 직접적인 문제를 ‘발견‘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문제를 발견함으로써 즉각적으로 삶에 대해서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고, 살아가나갈 수 있는 능력을 키워나갈 수 있다는데에 그 의의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누구나 볼 수 있는것이고, 누구나 즉각적으로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깊이 들어가지 않고 그것으로 끝이 난다. 두번째 뜻의 ‘문제발견‘은 이론적이고, 현상을 보는 ‘문제발견’을 뜻한다. 이것의 중요성은 쉽게 인식되지 않는다. 예를들어, ‘빛의 직진’과 같은 개념을 모른다고 우리는 삶에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이것은, 각 개인이 정말 ‘알았다, 깨달았다‘ 라는 과정을 통해서 각 개인만이 느낄 수 있는 하나의 ‘문제발견’이다. 이떄까지 나의 삶에 없던 문제가, ‘빛의 직진‘이라는 개념을 배움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즉, 현상을 보는 문제발견은 그것을 배우지 않고는 도저히 인식할 수 없는 문제를 인식하도록 하는 데에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사물의 표면이 아니라 이면에 그 중심을 두는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중요성은 아무에게나 일반적으로 인식되지 않으며, 오히려 더 괴로운 일이고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육내용의 중요성을 생활 문제해결에 유용한가 아닌가에 초점을 맞추곤 한다. 3. ‘이론적 인간과 실제적 인간은 동일한 실제를 가리킨다’라는 말이 따라오는 논리적 귀결은 무엇인가? “이론적 인간과 실제적 인간은 동일한 실제를 가리킨다”라는 말이 따라오는 논리적 귀결은 결국 인간은 동일한 실제 안에서의 삶의 방향성, 경향을 선택할 수 밖에 없고, 이에 따라 삶이 드러나는 방식이 다르게 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는 실제적 인간의 삶을 살도록 사회에서 요구받으며, 진정한 보이지 않는것 에대한 실재를 탐구하는 이론적 인간에 대해서는 무가치하게 느끼게 되므로 이론적 인간에 대한 방향성을 가지고 살아가야한다. 이론적 인간과 실제적 인간도 결국 동일한 실체, 한 인간속에 모두 존재하는 것. 이것은 동시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발현될 수도 있는것.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이론적 인간과 실제적 인간 한 측면만 절대 존재할 수 없음. 결국, 두가지가 모두 발현되면서 살아가게 되는것인데, 사람은 ‘삶의 지향성‘(삶의 자세)이라는것이 존재하기에, 무엇을 더욱 중요시할 것이냐 선택을 결국 강요받을 수 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실제적 인간이 타인에게 더욱 이롭고, 이타적인 행위가 많이 나오게 됨으로, 사람들은 실제적 인간의 삶의 자세를 취하도록 요구받고, 자신도 이에 대해 긍정한다. 이론적 인간은 이에비하면 어둡고, 자기중심적인 인간형일 수도 있다. 하지만, 거꾸로 말한다면 인간으로서 당연히 추구해야할 ‘눈에 보이지 않는 실재’를 추구하지 않는 실제적 인간은 큰 결함이 있을수도 있다고 판단될 수 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이런것은 교육으로도 쉽게 깨달아 질수 없다는것이 특징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교육의 방향성은 어디로 가야만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어떤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앞서 첫번째로 이야기한 ‘실제적 인간’과 같은 경우에는 교육으로도 얻어질 수 있지만, 삶의 불편함을 자신이 직접적으로 느끼는 케이스기 때문에 교육이외의 방법으로도 터득이 가능하다. 하지만, 후자인 ‘이론적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에서 부단히 노력해야만 하고, 알기위해 혈압이 올라야만 하기도하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부단히 ‘실제적 인간’이 되기를 강요받고, 익숙해져있기 때문에, 우리 안에 존재하는 두가지의 인간상-실제적 인간과 이론적 인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이론적 인간의 자세를 취하며 살아가야만 한다. 4. 교사의 봉급과 수도공의 수선비 사이에 의미상 차이가 있을 수 있는가? 유물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두가지 케이스 모두 노동에 대한 가치로 평가할 수 있다. 이때 의미상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적 개념과 이론적 개념에 대한 사례로 평가한다면 의미상 차이가 존재한다. 먼저, 수도공의 수선비 같은 경우에는 실제적 문제에 기반한 ‘실제적인 인간’의 기술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것은 현상 이면을 바라볼 필요가 없으며, 수도의 문제를 시각적으로 파악하여 기술적으로 메꾸고 받는 노동의 정당한 댓가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교사의 봉급은 다른 개념으로 평가할 수 있다. 교사는 현상의 이면을 다루는 자로서, ‘이론적 인간‘의 측면에서 다루어야 한다. 이것은 실제적인 인간이 다루는 현상적이고 즉각적인 문제해결과는 다른 문제이고, 교사는 이러한 실재에 다가가기 위하여 끊임없이 외롭고 괴로운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교사의 봉급은 이러한 외로운 삶을 유지하기 위한 생활유지비에 가까운 개념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