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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휴직이요? 좋은 직장 다니시네요!"

by 봉천동잠실러

2025. 9. 21. (일)


셋째(꼭꼭이)가 태어났다.


아침에 유도분만 후 약 5시간 만에 출산. 무려 세 번째(이자 이번 생 마지막) 자연분만을 겪어낸 아내를 입원시키자마자, 첫째와 둘째를 하원시키기 위해 집으로 향했다. 세 자녀 다둥이 가정의 현실이었다.


그런데 자녀의 탄생이라는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인 어젯밤, 둘째의 머리가 뜨끈했다. 열이 39도.


정신이 바짝 들었다.


안녕 꼭꼭이 (아빠가 초점 못맞춰서 미안) I 4살이 2살을 간호하는 웃픈 상황


토요일 아침, 가장 먼저 소아과로 향했다.


간밤에 해열제로 열이 떨어지긴 했지만, 아침을 먹으며 조금씩 게워내는 것이 수상했기 때문. 두 아이를 연달아 키우며 나름 생긴 육아 빅데이터(?)로 가늠해 보았을 때, 밥을 먹으면서도 조금씩 게워내는 것은 가래가 많거나 목이 부은 것이 의심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진료 중에 선생님이 목이 많이 부었다며 항생제를 처방해 주셨다.


3일 치 약을 처방해 주시며 했던 대화:


소아과 선생님: "간밤에 열 많이 날 수 있고요... 월요일에 다시 오라고 어머님께 전해주세요."

나: "아... 선생님 저... 아내가 지금 출산을 해서 산후조리원에 있습니다."


소아과 선생님: "아....(난감한 표정) 그럼 어떡하죠? 월요일에 한 번 봐야 하는데..."

나: "제가 올 수 있습니다. 육아휴직 중이거든요."


소아과 선생님: "아? 아버님이.... 육아휴직이요? (놀란 표정).... 아버님. 좋은 회사 다니시네요?"

나: ".... 아.... 예.. 허허"



좋은 회사라... 나는 정말 좋은 회사를 다니는가.


어쨌든 소아과 오픈런은 대성공


확실한 건, 처음부터 좋은 회사는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낯선 그 이름, 아빠 육아휴직


3년 전 첫 육아휴직을 사용한다고 말했을 때 마주했던 그 낯선 눈빛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타 부서와 회의 중 인수인계가 언급되자 '남자도 육아휴직을 쓸 수 있나?'라고 악의 없이 대놓고 물어보시던 타 부서 임원, 이 중요한 타이밍에 '쉬러'가면 어떡하냐던 상사, 그리고 남자가 육아휴직을 쓰니 당연히 이직한다고 생각하며 '마지막 식사'를 하자고 하던 타 부서 사우 등등.


대략 그런 분위기였으니, 솔직히 내게도 첫 번째 육아휴직은 '최악의 경우' 다시 못 돌아올 수도 있다는 각오까지 하고 내린 중대한 결정이었다 (아래 링크는 첫 번째 육아휴직 당시 쓴 글). 그렇게, (내게 알기로는) 창립 최초로 남자가 '1년'이라는 장기 육아휴직을 다녀왔다.

돌아온 육아휴직러, 선례(先例)를 만들다.


"어? 돌아오셨네요?"


복직 첫날, 저 말을 못 해도 10번은 들은 것 같다. 모두의 예상을 뒤집고 나는 1년이 지나 복직했다.


그리고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복직 후 만 1년 만에 최고 고과를 받았다. 개인적으로 '이전처럼 일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도 조금 있었지만, 장기간 휴직을 다녀와도 멀쩡히 일 잘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일하니 주변 동료들과 상사들도 이런 태도를 알아주고 많이 도와주었다.


사내 동호회도 만들었다. 아빠들끼리 육아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자 개설했는데, 개설 1년이 지난 지금도 10명이 넘는 아빠들이 매달 모임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동호회원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육아휴직을 다녀왔거나 현재 휴직 중이다. 지난 6월, 두 번째 아빠 육아휴직을 떠난 나를 포함해서다.


이런 것을 보면, 이제 우리 회사는 아빠 직원의 일, 가정 양립 차원에서 꽤나 좋은 회사가 된 것 같다.


벌써 그리운 동호회원들


육아휴직 중인 아빠가 '좋은 회사 다닌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면


대기업과 공기업을 위주로 육아휴직을 쓰는 아빠들이 많아진다는 기사가 많이 보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무적인 일이지만, 앞으로 육아휴직 쓰는 아빠가 '좋은 회사 다닌다'는 말을 듣지 않을 수 있으려면 사회 전반적인 인식의 변화가 필요할 것 같다. 출산한 직원이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쓰는 것이 어느 정도는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아내가 출산을 하면 남편이 휴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문화가 만들어질 수는 없을까?


'문화를 바꾼다'라는 말이 조금 무겁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생각해 보면 작은 시작부터 서서히 바뀌는 게 또 문화가 아닌가 싶다.


예를 들어, 복직 후 사내 아빠 육아 동호회를 만든 것은 나의 개인적인 경험이긴 하지만 일개 직원이자 아빠인 한 사람의 용기가 시간이 지나며 한 회사의 문화를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동호회를 개설한 가장 큰 이유도 '개인적인 아쉬움' 때문이었다. 아빠 육아휴직을 회사에서 어떻게 쓰는 것인지, 사내 시선은 어떤지, 사용한 사람이 대략 얼마나 되는지, 실제 사례와 후기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실제 우리 동호회는 여러 부서들에서 모였기에 이런 대화들을 매달 정기모임에서 나눈다.


동호회 개설 1년 만에 회원 절반 이상이 육아휴직을 사용한 것을 보면 놀랍기도 하다. 어쩌면, 아빠 직원들도 이런 육아에 대한 소통과 정보 교류의 장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빠 직원들이 교류할 수 있는 동호회를 회사마다 활성화하도록 장려할 수는 없을까? 누군가의 남편이자 어떤 아이의 아빠, 그리고 직장인이라는 세 가지의 큰 공통점만으로도 서로 교류할만한 충분한 공감대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며 더 많은 회사들에서 '아빠 육아 동호회'가 활성화되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도 꼭 용기를 내는 분들이 있기를 응원한다.


6명으로 시작했던 수줍은 첫 모임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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