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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돈다돌아 May 30. 2024

이야기 원숭이들,
서사가 좌우하는 세상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책 리뷰





1. 제목이 다 했다.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독일의 두 칼럼니스트가 쓴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는 제목 그대로 세상이 이야기에 의해 만들어져왔다는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끝~~~ 이라고 하고 싶으나 이 책은 정말 상반된 두 가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책이라 할 말이 좀 많아서 그냥 끝낼 수가 없겠습니다.


인류가 마을 이상의 군집을 이루면서 직접 소통이 어려워진 이후로 서로를 이어주는 강력한 힘이 바로 이야기를 만드는 힘이었습니다. 유발 하라리가 그 유명한 <사피엔스>를 통해 "인류는 신과 국가와 기업에 대한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어내 문명을 탄생시켜 발전시켜 왔다"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유발 하라리 형님의 "이야기에 대한 통찰" 이후로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는 이 책의 주장은 독창적이거나 오리지널리티를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살짝 아류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다만 하라리 형님이 인류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총론에 대해 거대 담론을 내놓았다면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는 보다 디테일한 면에 집중한 책입니다.


큰 틀에서는 유사하지만 이 책은 좀 더 디테일하게 분야별로 스토리가 인간사에 미친 영향을 수집, 정리, 요약합니다. 독일어 원제 "Erzählende Affen: Mythen, Lügen, Utopien - wie Geschichten unser Leben bestimmen"를 직역하면 "원숭이 이야기: 신화, 거짓말, 유토피아 - 이야기가 어떻게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가"입니다. 한글 제목과는 어감이 꽤나 다릅니다.


저자들은 인간을 말하는 원숭이라 지칭하며 이야기에 의해 생각과 삶의 방향이 결정지어지는 존재로 정의합니다. 누군가가 잘 만들어놓은 이야기에 휘둘리는 인간들이 참 많다는 것이죠. 그래서 다양한 분야에서 어떤 신화와 거짓말, 프로파간다로 우리 원숭이들을 굴려먹는지 파악하려 노력합니다. 다소 꽉 막힌 듯한 태도로 수집한 자료와 현상을 몰아가는 경향이 없지 않지만 대체로 수긍할 만합니다.





2. 현실에 맞닿아 있는 이야기의 힘과 그 속의 나

이 책은 상당히 친절한 책이기도 하고 과한 책이기도 합니다. 투 머치 합니다. 다양한 분야와 각 분야에 흩뿌려진 허구와 서사에 대해 수집 정리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폭넓은 분야의 각론들을 방대하게 정리했는지 경이로울 지경입니다. 상당히 많은 공이 들어간 책이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이런 책의 특성은 두 저자의 직업과 활동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 다 칼럼니스트입니다. 애초에 이들의 직업 자체가 사회의 어떤 현상이나 특정 테마에 대해 자료를 모으고 정리해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는 일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이들은 팟캐스트까지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업의 특성은 상당히 방대한 자료들을 정리하고 요약해 전달하는데 최적입니다.


저도 오랫동안 팟캐스트를 해왔는데, 늘 테마가 정해지면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한 달간 정보를 모으고 정리하면서 취할 것과 버릴 것, 방송의 스탠스 등을 정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나름 정돈된 대본이 나오게 되는데, 대본을 제외하고도 정성껏 모은 자료들이 상당한 양이 됩니다. 모아온 자료가 아까워서 책이라도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대부분 다른 분들의 자료를 참고한 내용이기 때문에 개인의 저작이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들이 정리한 내용도 대부분 방대한 분야에서 특정 소제목에 맞는 자료를 잘 긁어 모아서 내 의견과 입장을 덧댄 방식입니다. 읽기 좋게 정리하는 기술이 탁월하다는 생각이 팍팍 듭니다. 저자들은 각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 제네럴리스트이자, 일종의 지식 소상공인 같은 역할을 하는 분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수준이 상당히 높습니다.


그리하여 초반에는 오래된 자료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의 힘, 영웅 서사에 대해 설명하고, 후반으로 갈수록 영역을 넓히면서 최근의 현상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초반에는 스토리텔링의 대명사 영웅 신화에 대해 그래프까지 동원해 매우 매우 흥미롭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후에는 저커버그나 아이폰 이야기, 사회 현상, 현대 정치 상황을 접목시킨 부분까지 등장합니다.




3. 재미는 있으나 어쩔 수 없는 정보 수집가들의 한계...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책의 저자들은 칼럼니스트이자 방송 패널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문제를 다루고 정리하고 의견을 덧붙이기에 최적화되어 있지만 필연적으로 깊이와 정확성에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편집자나 조언하는 많은 사람들을 통해 내용의 수정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상상됩니다.


그럼에도 크게 두 가지 부분에서 저를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첫 번째로는 이 책의 내용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재미의 여부와는 별개로 아예 사실관계가 틀린 부분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다룬 부분에서는 성경만 찾아봐도 알 수 있는 사실 관계를 아예 잘못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현상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각 자체가 상당히 완고합니다. 완고하다는 것이 보수적이거나 답답하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보적인 시각에 꽂혀 있다고 해야 할지,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지만 스탠스가 정확하게 정해져있습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에 관한 이야기 부분에서 강하게 드러납니다. 불과 얼마 전에 트럼프에 대한 평가나 뉴스가 조작된 것이라는 지지자의 길고 긴 주장을 읽고 난 후라 더 그런 느낌을 받았겠지만 트럼프 악마설에 가까운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이 트럼프에 대해 평가하기 위해 가져온 사실이라는 것들이 또 다른 사람들은 완전히 조작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나라 일도 아닌데 뭐가 사실인지 무엇이 조작인지 알고 싶지도 않고 궁금하지도 않습니다. 트럼프에 대한 정보 중에는 저자들이 지지하는 주장에 부합하는 정보도 있고, 반박하는 정보도 상당합니다. 저자들은 그들의 스탠스에 딱 맞는 정보만 취사선택해서 책에 싣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주제에 대해서도 저자들의 입장에 꼭 맞는 정보만 취사선택했을 수도 있을 거라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그렇기에 재미와는 별개로 이 책에 대한 저의 신뢰는 상당히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 책이 초반부터 영웅신화에 대한 다양한 변주를 보여줄 것만 같은 기대를 가지게 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영웅신화 분야의 레전드 오브 레전드 조지프 캠벨의 영웅신화 단계를 설명하면서 각 단계를 전체 책의 소제목으로 삼고 있습니다. 캠벨 형님과 영웅 신화를 연구한 여러 연구자들이 변형 발전시킨 영웅신화가 너무 훌륭해서인지 이후로 더 발전된 내용이나 흥미로운 내용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책은 마치 영웅신화의 현대 확장판일 것만 같은 뉘앙스여서 무척 기대를 하고 읽었던 것입니다.


막상 읽어보니 초반부에 잔뜩 기대치를 올리고는 어느새 점점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수집한 내용 중에 쓸만한 테마를 적당히 나열해 놓은 수준입니다. 각 소챕터의 내용 자체만 놓고 보면 흥미롭고 재미있지만, 이 이야기들은 캠벨 형님의 영웅신화의 각 단계와 연계해 설명한 유기적인 구조처럼 보이게 하고 정작 그냥 이것저것 끼워 맞춰 넣어놓은 모양새가 되어서 완성도가 바닥으로 추락하는 모양새입니다.


물론 영웅신화의 각 단계를 소챕터 제목으로 활용했을 뿐 그냥 저자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쓴 것이라고 한다면 착각한 제 잘못입니다만, 굳이 이런 형식을 쓰고 아무 상관도 없는 내용으로 채워 넣는 것은 쓰잘떼기 없는 짓이라고 보입니다. 차라리 챕터 1, 챕터 2로 소챕터를 구성했다면 제가 실망할 일도 없었겠습니다.


말 나온 김에 또 하나 짜증 났던 부분을 지적하자면, 책의 내용이 "인간사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고 이야기에 의해 흘러간다"라면 이 상세한 내용을 소개하는 데에 집중했으면 좋았겠습니다만, 저자들의 의견과 주장이 자꾸 드러납니다. 그러다가 말미에 가면 "자, 이제껏 우리가 이 정도로 얘기했는데 어때? 눈이 확 떠지면서 세상이 달라 보이지? 이제야 깨달았어?" 이런 의기양양한 태도까지 엿보입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육성으로 "아닌데? 전혀 납득이 안됐는데?"라고 말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책은 각 챕터별로 하나의 칼럼으로 냈더라면 더 나았을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용이 좀 너무 많기도 하고, 주제를 뒷받침하기에 내용이 너무 과하고 방대합니다. 그러나 그런 저런 부분을 다 차치하고 각 내용만 살펴보면 한 권으로 정말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좋은 내용이 이어지는 책입니다. 내용 자체도 재미있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합니다. 저자들의 개인 주장만 좀 줄였더라면 더 기분 좋게 읽었을 책입니다. 특히 초반부 영웅신화에 대한 설명과 그래프로 보여주는 내용들이 좋습니다. 한 1/3만 읽으면 더 좋을까 싶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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