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진 Mar 23. 2021

런던브릿지에서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어쩐지 날씨가 좋더라니

탕 탕 탕


멀지 않은 곳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일이지? 진짜 총인 거야? 멍하니 서 있는데 수십 명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우리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달려오는 사람들을 미처 피하지 못한 할머니는 바닥에 넘어지셨고, 그 충격으로 선글라스가 벗겨져 바닥에 떨어졌다. 방금 전까지 우리가 보고 있던 와인병들도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났다. P는 나의 팔을 잡고 와인박스가 사방으로 쌓여 있는 공간으로 데려갔다. 이미 몇 명의 사람들이 그 곳에 숨어 있었다. 금발 머리를 양갈래로 예쁘게 땋은 작은 여자아이는 엄마의 팔을 잡고 덜덜 떨고 있었다. 깨진 와인병에서 흐르는 와인이 마치 핏물 같았다.



버로우마켓에 오기로 한 건 순전히 날씨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모처럼 찾아온 맑은 날 숙소 안에만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놓칠세라 서둘러 외출 준비를 마친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런던브릿지 역으로 향했다. 역과 마켓은 가까웠다. 마켓 입구로 보이는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니 커다란 소시지와 패티가 기름에 지글지글 구워지고 있는 수제버거 가게들이 나타났다. 삼겹살 냄새가 난다며 킁킁대는 P를 보면서 오늘 버로우마켓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수제버거 골목을 지나자 지붕이 있는 넓은 공간이 등장했다. 초록색 아치 모양의 기둥들과 베이지색 천장, 그리고 수줍게 매달려 있는 대형 크리스마스 리스가 보였다. 작은 파라솔을 편 노점들은 주로 식재료를 취급하는 듯했다. '쿠키런' 게임을 떠올리게 하는 크리스마스 쿠키들, 촉촉한 브라우니, 신선해 보이는 치즈,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핫 초콜릿,  나와 P의 머리보다 큰 호밀빵과 호두파이, 주렁주렁 걸려 있는 소시지와 살라미 등을 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영국 사람들의 말버릇처럼 정말 '러블리'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블랙푸딩을 찾지 못했다는 정도?


작은 도로를 건너가니 음식을 파는 가게들이 가득했다. 영국 대표 음식인 피시앤칩스는 물론, 여러 종류의 샌드위치와 햄버거, 홍합찜과 굴 같은 해산물까지. 다양한 음식 냄새가 한꺼번에 콧속으로 들어오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밥은 없겠지 생각한 순간 엄청난 크기의 냄비 안에서 익어가고 있는 파에야와 마주했다. 파에야 옆 오징어튀김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먹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건 무조건 맛있는 거다. 가격도 각각 8파운드로 나쁘지 않았기에 P의 손을 이끌고 바로 줄을 섰다.


갓 튀겨져 나온 오징어튀김은 뜨겁고, 바삭했고, 간이 딱 맞았다. 심지어 양도 많았다. 튀김이 포크에 찍히지 않아서 손으로 먹어야 했지만 상관없었다. 테이블과 의자가 없어도 괜찮았다. 파에야 위에도 새우, 홍합 등의 해산물이 가득했다. 가게 옆에 선 채로 순식간에 다 먹어버렸다. 배가 부르니 더 여유롭게 마켓을 돌아볼 마음이 생겼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연말을 앞두었을 때 쉽게 볼 수 있는, 행복하고 훈훈한 미소가 가득했다. 백발의 어르신들이 어린 손자들과 함께 쇼핑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와인 한 번 볼까?"


가격이 괜찮은 와인이 있다면 미리 사두었다가 크리스마스에 마실 생각이었다. 런던브릿지에서 총소리가 울려퍼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더 숙여"


P가 속삭였다. 하지만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너무 궁금했다. 내가 몸을 숙이지 않자 P는 자신의 몸으로 나를 감싸안았다. 방금 전까지 사람들의 행복한 목소리로 가득했던 마켓 안은 한밤중처럼 고요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 그때 우리처럼 숨어 있던 사람들이 마켓 바깥쪽으로 달려나갔다. 우리도 눈치를 보다가 사람들 틈에 섞여 달리기 시작했다. 마치 재난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하게 된 기분이었다.


우리 앞에서 달려가던 사람들이 카페로 들어가길래 엉겁결에 따라들어갔다. 카페는 겁에 질리거나 놀란 표정의 사람들로 가득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의 여자를 친구들이 달래 주고 있었고, 갈색 곱슬머리 남자는 누군가와 심각한 표정으로 통화하고 있었다. P는 자기가 꼭 지켜주겠다며 나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되뇌고 있었다. 그때 카페 사장님이 다급한 목소리로 문을 잠그라고 했다. 그리고 카페에 있는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런던 브릿지 블라블라블라 슈팅 블라블라블라 폴리스 블라블라블라. 굳이 안 들어도 되는 단어들만 귀에 쏙쏙 박혔다.


모두들 카페의 유리벽만 바라보았다. 유리창 밖 풍경은 꽤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됐다고 느꼈는지 사람들이 카페에서 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버로우마켓은 출입이 통제된 상태였다. 도로에서는 사이렌 소리가, 머리 위에서는 헬리콥터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왔다. 런던 시내 모든 경찰들이 런던브릿지를 향해 달려오는 기분이었다. 경찰차를 보니 안심이 됐지만 버로우마켓에서 멀리 떨어져야겠다는 생각에 테이트모던까지 열심히 걸어갔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P가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런던브릿지에서 어떤 남자가 흉기로 시민들을 찔러서 대학생 여러 명이 사망했다는 기사였다. 범죄 경력이 있는 데다 가짜 자살폭탄조끼를 입고 있어서 경찰들이 현장에서 사살했다고 했다. 아마 우리가 들은 총소리가 그 소리였던 모양이다. 


여행지에는 예상치 못한 행운과 위험이 공존한다. 그 동안 어디에 가서 무엇을 볼지, 어떤 음식을 먹을지에 대한 고민만 하고 무엇을 조심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은 거의 하지 않았던 내 자신을 반성했다. P가 조심해야 한다고 말할 때마다 건성으로 대답했던 일들도 반성했다. 새로운 곳으로 이동할 때마다 P의 걱정이 많아진 이유를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 매일 저녁 P와 마시는 마트 와인이 이날따라 특별하게 느껴졌다. 곤히 잠든 P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도 P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잠들기 전에 다짐했던 것 같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