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진 Mar 26. 2021

잊을 수 없는 와인의 밤

프랑스 친구들과 시골 와이너리에서

나는 이 순간을 평생 동안 잊지 못할 거야.
오래된 와인을 한 모금 마시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만난 프랑스 친구를 만나러 가는 날이었다. 그의 이름은 루카스. 우리는 호스텔 룸메이트로 만나서 바이칼 호수를 함께 다녀왔다. 그날 우리는 루카스에게 저녁을 함께 먹자고 제안했고, 당시 요리를 담당하고 있었던 P가 '김치밥이피오씁니다'를 선보였다. 프랑스 사람이라 입맛이 까다롭진 않을까 잠시 걱정했지만 루카스는 맛있게 먹어주었다. 보드카를 가져오는 센스까지. 그는 다음날 새벽 기차로 떠났고 우리는 가을에 프랑스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몇 달 만에 루카스를 보기로 한 곳은 벨빌이라는 마을이었다. 마침 헌혈 봉사를 하는 날이라고 했다. 메시지로 받은 주소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가니 루카스가 특유의 밝은 웃음과 함께 우리를 반겨주었다. 야~ 너 머리 잘랐네.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의자에 앉으니 안경 쓴 줄리 델피를 연상케 하는 외모의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와인?"이라고 물으셨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플라스틱 컵에 담긴 레드와인과 간식거리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우연히 지나가던 시골 마을에서 막걸리를 얻어 마시는 기분이 이런 걸까. 돼지고기를 절여 만든 스시송도 맛있었지만 튀김이 내 입맛에 딱 맞았다. 비주얼이 닭똥집튀김과 흡사하기에 바삭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입 안에서 부드럽게 살살 녹았다. 낮부터 공짜 와인이라니, 행복했다.


"P, 유진, 우리 집으로 초대할게."

"오 루카스, 정말?"

"그럼, 내 손님인데. 멀지 않으니 내 차 뒤를 잘 따라와."


루카스의 차를 따라 도착한 곳은 영화에서 본 것 같은 예쁜 집이었다. 회색 창문이 있는 밝은 노란색 벽돌집. 언젠가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집이었다. 넓은 마당에는 수영장과 커다란 캠핑카가 있었다. 루카스는 우리를 부모님께 소개했다. 러시아에서 한국음식을 만들어 주었던 친구들이라는 말에 루카스의 어머니께서 반색하셨다. 악수와 포옹을 마친 다음 루카스를 따라 별채로 들어갔다. 


넓은 방에 들어가자 기타, 키보드, 드럼, 큰 텔레비전과 게임기가 눈에 들어왔다. 루카스의 자유로운 영혼을 엿볼 수 있는 곳이었다. 큰 책상이 있고 프랑스어와 영어로 적힌 의학 전공책이 쌓여 있을 거라고 짐작했는데 완전히 예상이 빗나갔다. 루카스는 우리를 작은 원형 테이블로 안내한 다음 너무나도 당연하게 와인병과 빵, 스시송을 내왔다. 치즈까지 종류별로 잘라오는 모습에 나는 입이 딱 벌어졌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게 일상인 건가? 아니면 루카스가 매너가 좋은 사람인 건가? 나는 외국 친구가 우리 집에 왔을 때 배추김치, 파김치, 총각김치, 깍두기를 정갈하게 내놓을 수 있겠는가? 일단 먹자. P와 나는 루카스의 설명을 들으며 치즈를 하나하나 맛보았다. 치즈에 따라 향과 식감이 달라 골라먹는 재미가 있었다.  


"내일 저녁에 내 친구 와이너리에서 파티를 할 예정이야. 얼마 전에 포도 수확이 끝났거든. 괜찮으면 너희도 같이 갈래?"

"우리는 무조건 좋지. 그런데 친구들이 불편하지 않을까?"

"아냐 내 친구들인데 뭐. 내일 친구들이랑 낚시도 할 건데 같이 가자."


다음날 본격적으로 '루카스투어'가 시작됐다. 루카스와 함께 마을 근처 언덕에 있는 전망대와 교회를 구경한 뒤 친구들을 만나 강에서 낚시를 했다. 작은 고기들만 잡혀서 다시 놓아 주었지만 충분히 즐거웠다. 그리고 그날 저녁 기다리고 기다리던 와인 파티가 시작됐다.


파티 장소는 루카스 친구의 집 지하실이었다. 루카스는 이곳을 cave(동굴)이라고 표현했는데, 천장과 바닥, 벽이 모두 돌로 돼 있고 천장이 낮은 데다 아치형이라서 정말 동굴 안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지하실 안에는 열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식탁과 의자, 스피커, 와인을 보관할 수 있는 선반이 놓여 있었다. 우리는 식탁에 앉아 다른 사람들을 기다렸다. 할아버지와 아주머니, 칠레에서 왔다는 여자아이, 루카스의 친구들, 루카스, P와 내가 앉자 식탁이 꽉 찼다. 할아버지는 한국에서 왔다는 우리가 신기하신 듯 이것저것 질문을 하셨다. 우리도 프랑스어가 서툴고 할아버지도 영어를 잘 못 알아들으셔서 대화가 완벽하게 이뤄지진 않았지만 대충 이해하고 웃으며 넘어가는 식이었다. 


본격적으로 파티가 시작됐다. 첫번째 와인의 코르크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병과 분리됐고, 식탁에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음식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각종 치즈와 올리브, 새우, 나초와 칠리, 스시송, 푸아그라를 바른 빵 등이 끊임없이 등장했다. 이 사람들도 먹는 데 진심인 편이구나. 처음 보는 사람들과 동질감을 느끼며 음식을 입에 넣었다. 음식들은 각각의 매력을 뽐내며 와인과 어우러졌다. 루카스의 설명은 와인과 음식에 맛을 더했다. 다들 기분 좋게 마시고 농담을 하며 웃었다. 식탁 위도 모자라 지하실 안에 와인병들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배가 불러올 때쯤 루카스의 친구가 새까만 병을 들어올렸다.


"여러분, 이 와인이 얼마나 됐는지 아세요?"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아 라벨이 보이지 않았던 그 와인병은 무려 22년 된 와인이라고 했다. P와 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22년?"을 연발했다. 이런 와인을 이런 장소에서 이런 사람들과 맛볼 수 있다니. 떨리는 손으로 잔을 받아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와인에 대해서 잘 알진 못하지만 그전까지 마셨던 와인들보다 순하고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기분 좋게 취해 갔다. 알아들을 수 없는 프랑스어 대화들이 마치 노래처럼 들렸다. 와인과 음식, 웃음으로 가득찬 밤이었다. 


우리는 꼭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그들과 아쉬운 작별을 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올려다본 밤하늘에는 몽골 하늘보다 많은 별이 떠 있었다. 내가 이런 곳에 있다니. 그것도 P와 함께 있다니. 너무 행복한 순간들은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곤 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니 어제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들이 내 인생의 한 부분이 됐다는 생각이 들자 눈가가 촉촉해졌다.


루카스는 우리를 집까지 데려다 준 다음 친구 집으로 돌아가 다음날이 돼서야 돌아왔다. 그가 내미는 핸드폰 영상을 보니 조명이 번쩍번쩍한 것이 한국 노래방 같았다. 프랑스 친구들도 이렇게 노는구나.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리옹이었다. 루카스는 리옹에 있는 대학을 나왔다며 우리에게 가볼만한 곳과 식당 등을 추천해 주었다. 두 번 만났을 뿐인데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처럼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떠나기 전 루카스가 우리에게 비쥬를 해도 되냐고 물었다. 비쥬는 프랑스에서 가족이나 친구 사이에 나누는 볼 뽀뽀 인사다.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쿨한 척 승낙했다. 신랑 앞에서 외간 남자와 비쥬를 하게 될 줄이야. 그냥 인사일 뿐인데 왠지 긴장이 돼서 몸이 뻣뻣해졌다. 익숙하지 않은 문화를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은 마치 주사를 맞는 느낌이다. 맞기 전에는 무서운데 맞고 나면 생각보다 안 아픈 그 느낌. 그래도 루카스가 우리를 절친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느껴져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리옹을 떠나기 전에 루카스에게 뭐라도 보답하고 싶었다. 뭐가 좋을까. 그러다 루카스가 한국 막걸리를 좋아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침 리옹에 한인마트가 있어서 막걸리를 몇 병 산 다음 쇼핑백에 담았다. 루카스에게 연락을 하니 자기도 마침 학교에 왔다고 했다. 학교에 찾아가 루카스를 다시 만났다. 헤어지기 아쉬워 차를 길가에 댄 채로 수다를 한참 떨었다. 다음에 또 올 때 막걸리를 많이 사오겠다고 했는데 그게 이날이 될 줄은 몰랐다. 아마 루카스도 그랬겠지.


P와 함께 세계 곳곳을 누볐지만 그중에서도 친구를 만난 곳들은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루카스를 만난 뒤의 리옹과 벨빌이 그전과는 다르게 느껴지는 것처럼. 루카스는 지금쯤 멋진 의사가 되어 있겠지. 언젠가 자유로운 여행이 일상이 되는 날 다시 만날 수 있길 소망한다. 그때까지 나도 조금 더 멋진 사람이 되어 있도록 노력하면서.


 



작가의 이전글 런던브릿지에서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