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나도 그의 마수에 걸려들고 말았다.
누군가는 걸리고 누군가는 무탈하다는데,
그 확률게임에서 설마 내가 걸리겠어?
그렇다. 난 사실 확률 게임에서 운이 없는 편이다.
발리 여행을 앞둔 사람들에게 엄청난 공포와 두려움을
주는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발리 밸리.‘
발리 여행카페에서 발리밸리는 호환마마 같은 존재다.
카페에 심심치 않게 올라오는 글 중 하나가
발리여행 준비 중인데 발리 밸리 때문에 너무 걱정돼서 여행을 취소해야 하나 고민 중이라는 내용이다.
댓글에는 생존자들의 걱정 말고 오라는 격려와 어떻게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친절하게 알려주는 팁이 달리는가 하면 발리 밸리로 인해 소중한 여행을 망쳤다며 발리는 위생도 안 좋고 난이도 최상급이니 동남아의다른 휴양지를 알아보라는 조언도 달린다.
카페에서 글을 읽다 보면 가끔 그런 의문이 든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 발리에 가는 걸까?
발리밸리에 걸릴까 봐 두려워
샤워기 필터를 한가득 챙겨가고 생수로 양치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
어떤 이들은 로컬 느낌의 식당은 무조건 거르고
얼음이 들어간 음료도 절대 안 마셨다고 했다.
로컬 식당은 안 가도 그만이지만,
이 열대의 땅에서 얼음 들어간 음료를 안 마시다니
그건 정말 놀라운 의지이다.
거기다 교통체증은 말도 못 하고
인도도 좁아터져서 사람 다닐 길이 아니라고
원성이 자자하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나같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에이, 나는 아닐 수도 있잖아?라는 허황된 기대를 품는
사람은 모두의 우려와 걱정을 뒤로하고 떠난다.
그러다 이렇게 발리밸리의 습격을 받아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리며
이틀 동안 숙소에 누워 있을 수도 있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내 상태는 다행히 그리 심한 편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고열, 구토, 설사를 동반한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기도 한다.
나는 설사와 오한 정도였고
수분이 빠져나가다 보니 많이 어지러웠다.
준비해 간 상비약으로 하루를 버텨보다가
저녁때 증상이 다시 시작되길래
숙소 직원에게 의사를 불러달라고 했다.
증상도 물어보고, 열도 재고, 배도 눌러보고 하더니
무슨 박테리아 어쩌고 저쩌고 하셨다.
장염 같았다.
다음 날이 되니 몸 컨디션이 조금씩 좋아졌다.
일단 오한이 사라졌고
화장실 가는 횟수도 조금씩 줄었다.
뭐가 문제였을까?
1박에 4만원정도인 숙소임에도 겁도 없이
샤워기 필터도 안 쓰고
세면대 수돗물로 양치도 하고
조식 먹을 때 얼음 들어간 음료도 벌컥벌컥 마시지만
그건 확실히 원인이라고 볼 수 없었다.
왜냐면 나의 동행인인 7세 아들은 멀쩡하니까!
혹시나 해서 설사 한적 있냐고 물어봤더니
“나는 멍멍이 똥만 싸는데?”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래, 좋겠다, 멍멍이 똥이라.
진짜 어느 나라를 가도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고 잘 놀고
복 받은 녀석이다.
아이가 학교에 갔을 때 혼자 갔던 국숫집이 제일 유력하다. 가격도 저렴하고 국물이 맛있어서 아주 만족한 집이었는데…..
아주 미미하게는 마트에서 사 온 람부탄 정도?
맨날 망고만 먹어서 신기한 과일을 시도해보고 싶어
사 왔는데 알고 왔더니 씨앗에 독성이 있다네?!
네이버에 먹는 법을 검색해서 망정이지
큰일 날 뻔했다.
껍질 벗기고 거기다 씨앗까지 빼고 나면
정말 먹잘 것이 없다.
근데 문제는 품종에 따라 씨앗이 깔끔하게 안 벗겨지고 과육에 달라붙는 게 있는데 내가 사 온 게 그랬다.
처음에는 어찌할 바를 몰라
살짝 껍질이 붙은 부분을 씹어먹었다.
아주 소량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불안해서 칼로 회를 뜨듯
얇게 과육만 저며냈다.
젤리 같은 식감에 아주 달콤해서 아이가 제비새끼처럼 입을 쩍쩍 벌리고 자르는 족족 받아먹었다.
근데 돌이켜보면 내 몸은 그전부터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것 같다. 며칠 전부터 볼일을 볼 때마다 점점 묽어졌다. 매일 차가운 음료를 많이 마셔서 일지도 모른다.
조식 먹을 때 아이스커피 한잔을 먹고
점심 먹기 전에 11시쯤 또 아이스 라테를 먹는 루틴이
일주일 정도 이어졌다.
사실 이런 것도 식중독이나 장티푸스 같은 질병이 아닌 이상 개인의 ‘장지컬’의 문제일 테다.
태세계 인도 편에서 누가 봐도 건장하고 어린이 입맛이라 음식도 가려먹는 덱스는 결국 병원에 실려가고 갠지스 강물도 손으로 퍼먹는 기안 84는 멀쩡하지 않던가!
발리밸리는 개인의 컨디션이나 환경에 따라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이런 불확실성때문에 호환마마처럼 무서울지도. 비싼 리조트에서 물부터 음식까지 철저하게 조심하던 사람이 걸릴 수 있고 반대로 몇 만 원짜리 숙소에 묵으며 현지인들이 애용하는 길거리 식당에서 음식을 먹어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발리에 온 지 이틀 만에 걸린 사람이 있는 가 하면 한 달 넘게 있어서 멀쩡한 사람도 있다. 발리밸리 때문에 공포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지만 매일 몸의 컨디션을 체크하고 자신의 ‘정지컬’에 따라 알맞은 장소를 찾아갈 필요는 있다. 나같이 장지컬이 취약한 사람이 찐여행자의 기분을 내고 싶다며 아무 현지 노점을 들어간다면 또다시 방에 누워있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아무리 장지컬이 좋았던 사람도 여행의 피로가 쌓이면 탈이 날 수도 있는 법!
말은 쉽지, 대부분 단기간동안 겨우 시간을 내서 오다 보니 이것도 해보고 싶고 저것도 해보고 싶고 먹어보고 싶은 것도 많고 그 욕심을 내려놓기가 어렵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건 뭐니 뭐니 해도 빵빵한 여행자 보험이다! 아플 때는 바로 의사에게 가시기를!
알아서 챙겨주는 곳이 많지만 그래도 꼭! 꼭!
보험에 필요한 서류도 받아둬야 한다.
숙소로 왕진 온 선생님이 영수증만 적어주길래
진단서도 달라고 말했다.
다음날 준다고 했는데 안주길래 와츠앱으로 다시 연락해서 다음 서류가 필요하다고 복붙 해서 보냈다.
진료확인서(진단명이 확인되는 의료기관 발급서류)
Medical Certificate(a document issued by a medical institution confirming the diagnosis = including Disease Classification Code)
진료비 영수증(카드영수증 불가)
Medical Expense Receipt(credit card receipts are not acceptable)
아무리 아파도 보험 서류는 꼭 챙기기!
여행자 보험 들고 온 거 알아서 그런지 발리는 진료비가 엄청 비싸다. 나는 약만 처방받아서 소소하게 16만 원 정도 나왔다. 후기 보면 열나서 링거맞고 검사하고 하면 몇 십만 원은 기본으로 넘더라.
아픈 와중에 배는 고파서
처음으로 닭죽도 주문을 해봤다.
배탈 났을 땐 죽을 먹어야 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인도네시아어로 어떻게 검색해야 할지 몰라 ChatGPT에게 물어봤다.
bubur ayam은 진짜 닭죽맛이 났는데 그랩으로 배달시킬 때 토핑 따로 포장하는 걸로 선택해서 그냥 죽만 먹었다. 불안해서 토핑 빼고 먹었는데 아주 짭조름하게 간이 되어 있었다.
이틀 째 저녁에는 아들과 아이콘 발리에 가서 외식도 하고 왔다. 아직 화장실을 평소보다 자주 왔다 갔다 하고는 있지만 훨씬 몸이 가뿐해졌다.
커피가 너무 마시고 싶지만 며칠만 더 참아야지…
더 이상의 발리밸리는 없기를….
발리 밸리에 걸리고 유일하게 좋았던 점은
아들이 혼자 씻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발리 와서부터 매일 샤워하는 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사실 엄마 눈에는 하나부터 열까지 미흡해보였는데
일단 내 몸이 너무 힘드니까
아이에게 혼자 해보라고 믿고 맡겼다.
아이도 흔쾌히 자기 혼자 하겠다고 들어갔다.
엄마는 힘드니까 침대에서 휴대폰이나 보며 편히 쉬고 있으라고 완전 스윗한 멘트까지 날려주고.
힘든 것도 있었지만 내가 옆에서 지켜보면
계속 잔소리를 해댈거 같아 나와있었다.
아들은 다했다며 엄마를 불렀다.
아직 로션바르는거, 머리 말리는 거는 가르치지 않아
엄마 손이 필요했다.
얼마나 깔끔하게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거품하나 보이지 않았다.
수건으로 닦아주며,
너무 대견하다고 폭풍 칭찬을 해주었다.
엄마 힘드니까 자기가 혼자 씻은 거라며 생색을 냈다.
그날 저녁에는 엄마를 위해 꽃도 접어주고 그림도 그려
편지를 써줬다. 그래, 이 맛에 자식 키우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