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크시 Banksy - 테러 추모 작품 도난 사건
“예술은 불안한 자들을 편안하게 하고, 편안한 자들을 불안하게 해야 한다” - Banksy
2019년 1월 27일, Paris 11구에 위치한 바타클랑 Le Bataclan의 비상구 문에 그려진 아티스트 뱅크시 Bankcy의 '테러 추모 작품'이 도난당했다는 뉴스를 접하였습니다. 1월 26일 밤부터 27일 새벽 사이, 도둑은 공구들을 이용하여 작품이 그려진 극장의 문을 통째로 뚱강! 뜯어 갔다고 합니다.
너무 어이없고 당황스럽지 않나요?
지금은 당연히 바타클랑의 비상구문에서 뱅크시의 작품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괜히, 사건 현장을 들러봅니다.
스스로를 아티스트나 예술가가 아닌 거리 '낙서가'임을 자청하는 뱅크시 Banksy는 영국 출신의 얼굴 없는 거리 미술가이자 예술 행동주의자입니다.
뱅크시는 2015년 11월 13일 파리 테러 당시 최대 사망자를 낸 바타클랑 Le Bataclan의 비상구 문에 슬픔에 잠긴 고개 숙인 아이의 모습을 남김으로써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파리 Paris 시민들을 위로하였는데요, 뱅크시의 추모 작품이 면하는 파리의 평범한 골목길은 아픈 시간을 기억하고 애도를 전하는 마음으로, 또는 유명한 그래피티 아티스트의 작품을 만나보기 위한 목적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들이 모여드는 명소가 됩니다.
바타클랑은 뱅크시 작품 도난 사건에 대하여,
"매우 깊은 분노를 느낀다. 뱅크시의 작품은 거주민들과 파리 시민 그리고 전 세계인 등 우리 모두의 것 이어야 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를 빼앗았다. 뱅크시는 우리에게 작품을 선물하면서 추모와 애도의 상징으로서 바타클랑의 비상구 문을 선택했다. 거리 미술은 작품이 전하는 메세지와 그것이 그려진 장소와의 관계가 중요하다. 뱅크시의 작품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두를 위해 작품을 제자리에 가져다 두길 바란다. ”
라는 입장을 트위터에 남겼습니다.
뱅크시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상황에 개입해서 반향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거리미술을 전환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아무 곳이나 빈 벽이 있으면 그림을 그려대는 낙서 미술가들과 달리 자신이 그리는 그림의 정치적 메시지와 그 그림을 담아내는 장소와의 관계를 면밀히 고려해 왔습니다.
따라서, 저 역시도 도난당한 뱅크시의 작품은 제자리에 존재했을 경우에 작품으로서 완성된 모습이라는 입장입니다.
프랑스 언론에선, 도둑맞은 뱅크시의 작품이 미술 시장에서 공식적으로 거래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할 것이라 주장하며 비공식적인(블랙마켓) 작품 거래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도 있습니다. 뱅크시의 작품을 소유하겠다는 사적 이기심으로 발생한 사건이라 추정하기도 합니다. 이 경우, 뱅크시의 추모 그림을 다시는 만나기 어려울 것이라는 추측 하에 애통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으며 작품 도둑이 현 상황을 감지하고 있다면 즉각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 한편에서는 뱅크시가 직접 작품을 가져간 것은 아니냐는 의견도 나오고 있는데요. 아주아주 희박한 가능성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아마도 이와 같은 의견은, 뱅크시의 다소 엉뚱하면서도 허를 찌르는 전적들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 본다면, 영국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약 15억 원에 거래된 뱅크시의 작품이 경매 직후 저절로 파쇄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작품의 파쇄는 뱅크시가 계획한 것이었음이 알려졌습니다. 작품은 낙찰 직후 뱅크시가 작품에 미리 설치해 두었던 분쇄기로 인하여 여러 갈래로 찢어지다 중간 즈음에서 멈췄는데요 낙찰자는 반쯤 분쇄된 작품을 그대로 구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반쯤 찢어진 작품은 적당한 위치에서 멈추면서 새로운 작품이 된 것이랍니다.
뱅크시의 작품은 낙서라는 '범법 행위'를 통하여 완성되었기에 일반적으로는 저작권을 주장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L121-1이라는 법 조항으로 아티스트 뱅크시에게 '양심적 권리'라는 것이 적용되고 창작자로서 보호를 받을 수는 있다고 하는데요, 우리 모두가 그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또 공공을 위한 범법행위이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만, 법은 너무 어렵습니다.
뱅크시는 바타클랑에 작품을 판매하거나 양도한 것 역시 아니기 때문에 바타클랑 측에서도 도둑맞은 작품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림이 그려진 문은 바타클랑의 문이기에 도둑은 훔쳐간 비상구 문을 꼭 극장 측에 돌려주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모두를 위한 공공 예술 작품을.. 게다가 온 나라가 함께 아팠던 사건을 기억하는 추모의 상징을 도둑맞았다는 사실에 프랑스는 분노하고 있습니다.
뱅크시는 그의 다양한 예술 활동들 중에서도 특히 그래피티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반전, 반핵, 국가 폭력, 기아, 환경 문제와 같은 인류 공통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날카롭게 다루며 전 세계의 거리와 벽에 예술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메시지를 남기는데요, 파리에서는 도둑맞은 테러 추모 작품 이외에도 뱅크시의 그래피티를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면서도 교묘하게 웃기고 교묘하게 아픈 뱅크시의 장난기 넘치는 낙서와 그림은 권력자들을 공격하는 동시에 사회적 약자들을 위로하며, 가벼운 유머를 통한 강력한 메시지의 전달은 종종 우리의 허를 찌릅니다.
어느 도시에서나 명백히 범법 행위인 낙서에 대한 법적 기소를 피하고자 뱅크시는 단 한 번도 대중에게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습니다. 얼굴도 이름도 없는, 단지 '뱅크시 Banksy'라고만 알려진 거리 낙서가는 모두가 잠든 새벽에만, '스탠실' 기법을 사용하여 빠르게 작업하는 방식으로 그의 메세지를 남기고 있으며 작업을 마친 후에는 자신의 sns에 그 위치를 알리거나 홈페이지 http://www.banksy.co.uk에 사진을 개시하는 방법으로 자신만의 전시를 진행합니다.
그래피티 graffiti 작업으로 경제적 이득을 얻거나 취하지 않는 뱅크시는 자신의 낙서는 '공공 서비스 public service'라고 표현하는데요, 거리의 낙서가 거액에 사고 팔리게 되면 '예술'이라는 옷을 입고 제도권으로 들어가게 되어 낙서가 지향했던 모든 가치는 사라지고 더 이상 '거리의 낙서가 아닌 것'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뱅크시는 자신의 예술 활동이 소수 사람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엘리트적' 또는 '부르주아적' 취향의 상업주의 미술보다는 모두가 이해하고, 즐기고, 나눌 수 있는 공공 미술의 영역에 위치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기성 예술의 틈에서 더욱 유명해지고 있답니다. 오늘날에는 전 세계적인 뱅크시의 유명세로 거리에서 생겨나서 일정 기간을 살다가 망가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 당연한 거리의 낙서들은 보호 장치들이 동원되어 보호되거나 또는 작품 보존을 명목으로 시민들에게 오픈되지 못하고 나무판자 등으로 가려져 보존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진정 뱅크시가 원하는 것일까요?
아무튼, 뱅크시의 반자본을 향한 움직임, 즉 돈으로 환산되는 예술을 비판하는 그의 작품들이나 그가 벌인 사건과 행동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아티스트로서의 유명세는 물론 그의 작품의 경제적 가치까지도 올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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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타클랑 Le Bataclan 극장의 모습입니다. 건물이 특이하죠?
바타클랑은 1864년, 프랑스 건축가 샤를 뒤발 Charles Duval에 의해 당시 유행하던 시노아즈리 Chinoiserie 스타일로 건축된 공연장입니다.
바타클랑 Bataclan이라는 극장의 이름은 독일 출생의 프랑스 작곡가 자크 오펜바흐 Jacques Offenbach의 시노아즈리 뮤지칼 ; Ba-Ta-Clan 바타클랑에서 따왔으며, 당시엔 시노아즈리 스타일로 건축된 이 공연장을 ‘큰 중국 카페 - 바타클랑 극장’ Le Grand Café Chinois-Théâtre Ba-ta-clan이라 명했습니다.
시노아즈리 Chinoiserie ?
시노아즈리 건축? 시노아즈리 뮤지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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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8세기 유럽 귀족들 사이에서는 중국풍이 유행하였다고 합니다. 이들에게 중국은 신비했고 또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었는데요, 중국의 영향을 받은 유럽의 예술 스타일을 시노아즈리 Chinoiserie라 하며 극장 바타클랑은 시노아즈리 건축, 오페레트 바-타-클랑은 시누아즈리 뮤지컬 이랍니다. Ba-Ta-Clan 이라는 말은 영어의 Ra-Ta-Plan 라타플랜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데요, 북을 둥둥둥 치는 소리를 의미합니다.
둥둥둥 극장!
1865년 극장 완공 당시, 바타클랑의 꼭대기에는 중국 탑 형태의 지붕이 있었으나 1933년 발생한 화재와 그 후 이어진 몇 차례의 보수 공사로 탑은 사라 지고 지붕은 변형되었습니다.
주로 오페라와 오페레트 공연이 진행되던 뮤직홀 겸 극장이었던 바타클랑은 1970년대부터 록이나 팝 음악 등의 대중음악 공연과 스탠드업 코미디, 디스코, 라이브 카페 행사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파리 시민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2015년 11월 13일 밤부터 14일 새벽 사이 발생한 '파리 연쇄 테러'는 이슬람 극단주의 추종세력에 의해 진행된 무차별 총격·폭탄 테러였으며 이 테러로, 총 130여 명이 목숨을 잃습니다. 인질극, 총격 테러, 테러리스트들의 자폭 행위 등으로 6곳의 테러 장소 중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바타클랑에선 90여 명이 숨졌고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테러 휴유증으로 가족을 잃은 슬픔과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파리 시민들은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도 하는 등 테러 이후에도 가슴 아픈 소식들은 이어졌습니다.
2015년 11월 13일, 바타클랑에선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의 록 밴드 - 이글스 오브 데스 메탈 Eagles of Death Metal의 공연이 진행 중이었는데요, 최대 15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공연장 표는 매진된 상태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바타클랑은 같은 해 1월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단체 알카에다로 부터 공격받은 '샤를리 에브도 Charlie Hebdo' 사무실에서도 20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위치하는데요, '샤를리 에브도 테러'부터 프랑스 지방 도시와 유럽 곳곳에서 이어진 각종 테러 소식으로 프랑스와 유럽은 불안과 충격에 휩싸였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유럽인들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과 이슬람 테러는 '이슬람' 그 자체와는 전혀 다르다는 본질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유럽 전역의 분위기는 평범한 이슬람인들에 대한 혐오로까지 확산되면서 사회적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쉽게 이슬람 탓으로 돌려 버리는 경향이 생기기도 합니다.
프랑스는 물론 전 유럽은 반 이슬람 반 이민 반 난민의 정서로 여전히 시끄럽습니다.
뱅크시의 '추모 작품 도난 사건'에 대한 뉴스는 처음엔 너무 당황스럽고 황당하여 그저 헛웃만 나올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장을 대면하고 기억하고 정리하다 보니 사욕을 위한 누군가의 개념 없고 양심 없는 행동에 너무 화가 납니다.
세상 모르고 답답한 소리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테러도 전쟁도 도난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세상을 상상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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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크시 작품 도난 사건'과 '바타클랑' 이야기는 - 유튜브 채널 '빠히를 걷다'에서 영상으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