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 Pont-Neuf
어느 도시나 강이 중심이었고, 강을 건너 다니는 다리는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다리는 그 시대 최고의 기술로 만드는 것은 물론 가장 아름답게 꾸몄고, 그 속에 당대의 공학 기술과 디자인 문화가 유전자처럼 각인되어 있다. 다리는 그렇게 시대와 지역과 문화를 담아 우리를 비추는 숨어있는 거울로 인간과 함께 존재해왔다. (고, 구본준)
건축 전문 기자이자 건축 평론가로 활동했던 고 구본준 기자는, "다리는 길의 연장선이면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요한 인류 최고의 공공건축”이라 평가한 적이 있습니다.
'다리, 하늘과 물 사이에 존재하는 길'
저 역시, 교량 건축이야말로 당대의 테크놀로지를 집약적으로 담아내는 혁명적이고 혁신적인 건축이자 반드시 필요한 건축, 게다가 낭만적이기까지 한 공공 건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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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로 퐁 Pont은 '다리' 뇌프 Neuf는 '새로운' 또는 '새것'이라는 의미를 가지는데요, 따라서 퐁 뇌프 Pont-Neuf는 '새로운 다리'라는 뜻이 됩니다.
'가장 오래된 다리 = 새로운 다리'
가장 오래된 다리의 이름이 새로운 다리라니.. 역설적이죠?
1607년 퐁 뇌프가 완공되었을 때, 센 강을 가로지르는 이 육중한 석조 다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혁신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완공되자마자 명소로 떠올랐으며 16-17세기 파리의 핫 플레이스가 됩니다.
퐁 뇌프는 센 강에 놓인 최초의 석조 다리였습니다. 또한, 다리 위에 건물들이 건축되지 않은 모습으로 완공된 첫번째 다리였으며 파리의 첫 보행자 도로가 설계된 다리이기도 합니다. 퐁 뇌프는 파리의 남과 북을 한 번에 연결하는 첫 번째 다리였고, 양수기라는 것이 처음으로 등장하고 처음으로 설치되었던 다리이기도 합니다.
퐁 뇌프는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긴 하지만 파리에 건축된 첫 번째 다리는 아닙니다.
파리의 첫 번째 다리는 기원전 9세기에 등장하는데요, 지금도 같은 자리에서 달라진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 샹쥬 다리 Pont au Change입니다. 당시엔 그헝 퐁 Grand Pont이라 불렀습니다.
그헝 퐁은 세월에 따른 부식, 외세의 침략, 파리 대홍수 등. 파리의 다사다난한 역사를 함께 겪으며 여러 차례 파괴되고 재건되기를 반복하였습니다. 지금은, 다리의 이름은 물론 형태까지도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하게 되었답니다.
샹쥬 다리의 마지막 복원 공사는 1860년, 나폴레옹 3세의 오스만 파리 개조 사업 때였는데요, 교각엔 나폴레옹의 모노그램 N자가 부조되어 있습니다.
샹쥬 다리를 포함하여 퐁 뇌프 이전에 건축되었던 파리의 다리들은 나무로 건축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리 위에는 상점, 푸줏간, 집 등의 건물들이 빽빽이 건축된 특징을 가지는데요, 샹쥬 다리 위에 건축되었던 건물들은 주로 귀금속 가게나 환전소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change는 환전소를 뜻하는 프랑스 단어랍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퐁 뇌프는 센 강 la Seine에 놓인 최초의 석조 다리로서 다리 위에 건물이 없는 모습으로 등장한 첫 번째 다리였습니다. 오늘날에는 분명 집들이 건축되어 있는 교량의 모습을 찾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만 당시엔, 이탈리아 피렌체의 베키오 다리 Le Ponte Vecchio처럼 다리 위에 빽빽이 건축된 집과 상점들은 당연하고 일반적인 것이었죠.
앙리 4세 Henri IV는 흑사병 등의 전염병 창궐 이유가 도시에 바람이 잘 통하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했고, 도시 공기가 잘 순환될 수 있도록 곳곳에 광장을 조성하는 동시에 다리 위의 집들은 모두 없애도록 지시합니다.
그렇게 다리 위의 건물들은 사라졌으나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쉽게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다리를 건너는 수많은 유동인구들과, 탁 트인 전망을 즐기기 위하여 퐁 뇌프로 모여드는 시민들을 장사꾼들은 포기할 수가 없었던 것인데요,
퐁 뇌프의 큰 특징 중 하나인 다리 중간중간에 설치된 반원형의 발코니에 상인들은 천막을 세웠고 상업 공간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퐁 뇌프는 멀리서 바라보았을 때 큰 성벽처럼 보이기를 의도하여 디자인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반원형의 발코니들이 다리 중간중간 생기게 된 것인데요,
성벽처럼 보이시나요?
이 반원형의 발코니는 다리를 건너다 잠시 쉬어가기에도 좋으며 파리 풍경을 감상하기 위한 전망대로서도 톡톡히 역할하고 있습니다. 16세기 말, 파리 상인들에게는 물건을 전시하고 판매하기에 최적의 장소였죠.
당시 퐁뇌프에선 꽃, 과일, 빵, 생선, 생필품, 액세서리.. 등등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상품들이 거래되었는데요, 심지어 의료행위까지도 이루어졌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답니다.
그리고, 다양한 퐁뇌프의 거래품들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 되었던 상품은 고 서적 등의 중고책이었다고 전해지는데요,
17세기 중엽 : 파리시는 퐁뇌프에서의 상업을 금지시킵니다.
퐁뇌프의 상인들은 떠나야만 했고, 고서적을 전시하고 판매하던 중고책 장수들은 약 2세기가 지난 후에야 센 강 근처에서 고서적을 판매할 수 있는 허가를 받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센강 주변에서 만나볼 수 있는 초록색 가판대들이 그것인데요, 과거 다리 위의 상점들은 오늘날 초록색 가판대로 변형되어 존재하게 된 것이죠.
역사에서, 새로운 재료의 발견은 건축과 과학 기술의 발전을 동반하여 왔습니다.
퐁 뇌프 건축에 사용된 석재는 파리 지하, 15m 아래에서 채취한 석회암인데요, 지하 15m에서 석재를 채취하기 위하여 프랑스 인들은 거중기라는 것을 사용하게 됩니다. 퐁 뇌프 건축을 위한 거중기의 사용과 아치형 다리 구조는 당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자연스럽게 상징합니다.
퐁 뇌프 뿐만이 아니라 현존하는 파리의 대부분의 건축물들이 파리 지하에서 채석한 석회암으로 건축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파리의 땅은 마치 치즈 같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답니다. 땅속의 석회암을 건축의 재료로서 계속 채취하여 사용하다 보니 치즈 구멍처럼 구멍이 뻥뻥 뚫어진 것이죠.
파리 지하의 치즈 구멍은 지반이 약하게 된 까닭으로 파리에 높은 건물이 건축되지 않은 이유들 중 하나이기도 하며, 파리 지하 곳곳의 치즈 구멍들 중에는 시체들로 빽빽이 매워진 곳도 있는데요, 바로 파리의 지하 공동 묘지 '까따 꽁브 Les catacombes de Paris'랍니다.
1578년 앙리 3세 Henri III의 결정으로 착수된 퐁 뇌프 건설은 29년이라는 긴 공사기간을 거쳐 1607년 앙리 4세 Henri IV 때 완공됩니다.
1588년부터 98년까지의 종교 전쟁으로, 다리 공사는 10년 동안 중단되기도 했었고 튼튼한 다리 건설을 목적으로 퐁 뇌프의 기초 공사는 센강에 물이 없던 여름 3개월 동안에만 진행되었기 때문에 파리 시민들은 약 30년을 기다린 후에야 새로운 다리 '퐁 뇌프'를 만나볼 수 있었답니다.
퐁 뇌프의 아치에는 약 400개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는데요, 공사에 참가한 석공들이 스스로 자신의 얼굴을 새겨 넣은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조각의 얼굴들 중에는 여성의 얼굴도 찾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만, 저는 아직 찾지 못하였답니다.
이제, 인도(보행자로)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볼까요?
퐁 뇌프의 등장 이전엔 말 또는 마차가 다니는 길과 사람이 다니는 길의 구분이 없었답니다. 엄청 복잡했겠죠?
퐁 뇌프는 처음으로 보행자들을 위한 길이 분리되어 설계 되었던 다리이자 동시에 그것은, 파리에 등장한 첫 번째 인도라고 하는데요, 보행자들의 안전을 목적으로 설계된 첫 번째 '사람을 위한 길'의 등장은 분명 집고 넘어갈 만한 부분인 듯합니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퐁 뇌프에는 루브르 궁과 튈르리 궁으로 물을 공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양수기가 처음으로 등장하고 설치되는데요, 1813년 철거된 양수기의 이름은 사마리텐 la samaritaine 이랍니다. 퐁뇌프 북단의 '사마리텐 백화점'은 이 양수기의 이름을 차용한 것이죠.
'이름이 기억을 위해 붙여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문구를 어딘가에서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프랑스에선 특히.. 도로나 길, 지명, 또는 지하철 역의 이름 등으로 과거와 역사의 시간들을 사용함으로써 집단의 기억을 표현하고 영속하려는 모습을 흔하게 만나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사마리텐 백화점은 현재 보수 공사 중인데요 백화점 재건축 프로제로서 2010년도에 프리츠커 상 le prix Pritzker을 수상한 일본 건축가팀 : 사나 Sanaa의 프로제가 채택되었습니다.
미니멀하고 현대적인 건축 작업을 하는 사나 Sanaa의 프로제는 2014년 완공을 목표로 계획되었으나, 파리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시민들의 반대로 공사는 중단되었었답니다.
현재, 공사는 재개된 상태이며 2020년, 백화점 재오픈을 목표로 보수 및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습니다.
센 강의 물을 끌어올려 루브르와 튈르리 궁 그리고 튈르리 정원으로 물을 공급하던 펌프 사마리텐의 모습입니다. 펌프에는 예수에게 물을 준 사마리아 여인 조각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40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한자리를 지켜내었던 퐁 뇌프는 프랑스 역사의 희로애락을 함께 경험하였을 뿐 만 아니라 관련된 사건과 이야기들도 너무 많습니다. 두 가지 정도만 이야기해 볼까 하는데요,
우선, 영화 퐁 뇌프의 연인들 Les amants du Pont-Neuf!
프랑스 감독 - 레오 까락스 Leos Carax의 영화 '퐁 뇌프의 연인들 Les amants du Pont-Neuf(1991)'은 부랑자 곡예사와 시력을 잃어 가는 걸인 화가의 로맨스 영화입니다.
보수공사를 위해 폐쇄된 퐁 뇌프는 주인공 미셀과 알렉스의 안식처이자, 이들의 사랑의, 기억의 장소가 되는데요..
영화 퐁 뇌프의 연인들은 파리의 실제 걸인들이나 시민들을 자연스럽게 촬영한, 다큐멘터리와 같은 성격을 가지면서도 철저하게 계획되고 계산된 영화이며, 1:1 스케일의 세트 제작으로 막대한 예산이 사용된 상업적 영화이기도 합니다.
레오 까락스 Leos Carax 감독은 파리시에 영화 촬영을 위한 퐁 뇌프 교통 통제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촬영 중 곡예사 역을 연기하던 드니 라방 Denis Lavant의 부상으로 촬영은 지체되었고, 허가받은 시간 내에 영화 촬영을 마치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 되는데요, 레오 까락스 감독은 프랑스 남부 몽펠리에 근처 렁사흐그 Lansargues라는 도시에 파리의 퐁 뇌프와 센강을 1:1로 재현한 영화 세트를 제작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엄청난 규모의 세트 제작으로 영화는 총 예산의 4배를 초과하게 되었고 제작자는 파산하여 5번이나 바뀌었고, 3년이라는 긴 촬영 기간을 거쳐서야 완성이 되었는데요..
파리의 센 강과 퐁뇌프를 똑 잘라다가 렁사흐그 Lansargues에 뚝 심어놓은 듯한 모습입니다.
퐁뇌프 주변의 풍경들은 건물의 입면들만 재현한 모습으로 설치되었습니다.
영화의 대부분이 파리의 퐁 뇌프가 아닌 만들어진 퐁 뇌프에서 촬영되었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을 때 저는 왜 쓸데없는 배신감 비슷한 감정이 들었던 것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퐁 뇌프에 서면 영화 속 장면들이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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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통한 비일상적 일탈'
포장된 퐁 뇌프!
1985년, 대지 미술가 크리스토와 쟝 끌로드 Christo et Jeanne-Claude는 퐁뇌프를 나일론 천으로 포장한 미술 작업을 선보였습니다.
당시를 경험한 파리 시민들은 마법 같은 기억이라며 퐁뇌프를 추억하고 있었습니다.
크리스토와 쟝 끌로드는 인간이 만들어낸 건축물 또는 대 자연 등을 천으로 감싸는 대규모 포장 작업을 하는 미술가 부부로 알려져 있습니다.
크리스토와 쟝 끌로드의 작품은 작품의 구상과 제작에만 몇십 년이 걸리는 데요.. 우선, 허가를 받는 과정부터 큰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고 작품을 만들고 설치하기 위해선 규모를 알 수 없을 만한 예산과 노동력이 동원됩니다. 그리고 긴 시간과 노력으로 완성된 작품은 단 14일 동안만 전시되고 철거 됩니다.
크리스토와 장 클로드는 자신의 포장 행위를 어떤 깊은 의미로 해석하는 것을 경계하지만 아무리 소중한 것도 영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또는, 모든 건축물이 부식되고 사라지듯이 조형작품도 사라질 수 있지 않은가.. 등의 생각과 질문을 던져주는 것만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크리스토와 장 끌로드의 작품은 유쾌한 시각적 충격의 경험을 제공하는데요, 익숙한 공간을 낯설고 놀랍게 함으로써 평범한 일상에 스펙터클을 제공하는, 새로운 종류의 예술이자 새로운 종류의 공공 생활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포장된 퐁 뇌프 위에 기마상이 보이시나요?
퐁 뇌프 위의 기마상은 앙리 4세 Henri IV의 기마상인데요. 파리 공공장소에 설치된 첫 번째 왕동상입니다.
참고로 앙리 4세 Henri IV의 기마상은 프랑스 대혁명 때 파괴되었다가 다시 세워진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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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 왕 앙리'라고 불리어지던, 프랑스인들이 가장 사랑한 왕 - '앙리 4세 Henri IV'와, 그의 아들 도팡 Dauphin (루이 13세 Louis XIII)의 이름을 딴 왕립 광장 - '도핀 광장 Place Dauphine'에 관련된 글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곧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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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물 사이에 존재하는 길!'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 - '퐁 뇌프 Le Pont-Neuf'의 비디오가 궁금하시다면,
아래의 링크를 클릭해 주셔요. :)
퐁 뇌프 1 - https://www.youtube.com/watch?v=eSI9QIrvW60
퐁 뇌프 2 - https://www.youtube.com/watch?v=ljcTQ1absY4&t=38s
감사합니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