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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경화 Jun 27. 2021

태풍과 함께 한 보라카이 여행 (2)

2014년 겨울

다음 날 아침 7시반쯤 일어났다. 원없이 푹 자겠다는 나의 소망과는 달리 일찍 일어난 것은 보라카이로 들어갈 교통편을 예약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리핀 휴양지인 보라카이 섬에는 공항이 없다. 가까운 파나이 섬에 국내선 까띠끌란 공항과 국제선 깔리보 공항이 있다.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처럼 비싸고 좋은 비행기를 타면 필리핀 수도인 마닐라를 거쳐 국내선을 타고 까띠끌란으로 들어온다. 보라카이로 가는 배가 공항 300미터 앞 선착장으로 온다. 나처럼 비싸고 후진 에어아시아를 타면 깔리보 공항으로 직항한다. 언뜻 보면 '직항'이라고 하니 좋아보이지만, 거기서 보라카이까지는 10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있다. 차를 타고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2시간 정도 가야 한다. 


이런 내용들은 가이드북에 전혀 실려있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를 탈 순 없을텐데, 까띠끌란에서 배타고 보라카이에 들어가는 것만 집중적으로 소개돼 있었다. 다른 방법을 알고 싶으면 보라카이 한인 여행사에 물어보라며 연락처만 한줄 남겨놨다. 난 엉터리 가이드북(100배 어쩌고)을 쓴 저자와 그 여행사 사장이 같은 사람이거나 적어도 친인척 관계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밤새 내린 비와 바람으로 깔리보 공항 앞 호텔은 정전됐다 다시 불이 들어오기를 수십번 반복했다. 호텔 로비에 '한국인 자유여행객을 위한 헬프 데스크' 사무실이 있었다. 왠지 한국인 자유여행객 등쳐먹는 데스크 일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그냥 호텔 프런트에 물었다.


사우스웨스트라는 서비스를 이용하면 보라카이에 갈 수 있다던데 그건 어디서 티켓 끊을 수 있니?  

"저어기 파란 천막 보이지? 거기 가서 물어봐."


우산을 쓰고 약 100미터 앞 천막에 가는 동안 물에 빠진 새앙쥐 꼴이 됐다. 천막엔 아무도 없었다. 옆 천막에선 '투 보라카이? 봉고?' 호객하는 아저씨들이 있었다.얼마냐니까 편도 1인당 1500페소. 4만5000원. 왓???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결국 '한국인 자유여행객을 위한 헬프데스크'에 갔다. 다행히 나를 등쳐먹으려는 사람은 없는 듯 했다. 말 그대로 도움을 주려는 한국인 아저씨가 사우스웨스트 버스 시간을 알아봐 줬다. 오전 9시 40분 동생과 둘이 1020페소를 내고 버스에 탔다. 버스와 보트, 선착장 이용료를 모두 포함하고 리조트 앞까지 데려다주는 도어투도어(D2D) 서비스였다.


비바람은 여전했다. 한국에서 얇은 패딩점퍼를 입고 출발했는데, 필리핀 이틀차. 나는 여전히 그 점퍼를 입고 있었다. 분명 12월부터 건기랬는데, 27도라고 했는데 기상청이란 곳은 전세계 어딜 가나 믿을 수가 없다. 현지인들 얘기로는 태풍이 갑자기 생겼다고 했다. 갑자기 2010년 핀란드 올란드 여행, 지난 4월 일본 오키나와 여행이 생각났다. 1년내내 온화하고 맑다는 그 여행지들은 내가 도착하는 날부터 떠나는 날까지 먹구름 이었다. 나는 그저 햇빛을 쬐고 싶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욕심인가.

 

오후 2시반쯤 보라카이에 닿았다. 전날 아침 11시 40분에 서울의 우리집에서 출발했으니, 목적지인 보라카이 헤난 가든 리조트까지는 약 27시간 걸린 셈이다. 선착장에서 리조트까지 가는 길은 정돈되어 있지 않았다. 오토바이를 개조한 노란색 트라이시클에서 나오는 매연이 길거리를 가득 메웠다. 공업용 비닐이 흩날리고 무너질것 같은 집들에, 공사중인 건물들도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눈앞에 나타난 리조트는 으리으리 했다. 1층 객실은 리조트 수영장에 바로 뛰어들 수 있도록 되어 있었고, 야자수 정원이 시원했다. 리조트 문을 들어서는 순간 다른 세계로 건너 온 것 같았다. 보라카이에 사는 필리핀 사람들은 들어오지 못하는 세계. 방이 아주 깔끔했지만 어쩐지 유쾌하지 않았다. 


저녁을 먹으러 리조트 옆 돈비토라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갔다. 대부분의 숙소와 식당, 바가 해변을 따라 늘어서 있어서 어디든 분위기가 괜찮았다. 피자와 망고 쉐이크를 시켰다. 내 앞에 필리핀 여성과 일고여덟살 쯤 되어보이는 아들, 그리고 서양 백인 남성이 앉았다. 여자와 남자는 애인처럼 보였는데, 아이는 남자의 아들은 아닌 듯 했다. 아이는 내가 망고탱고 사진 찍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더니 이내 엄마와 엄마 남자친구의 대화를 조용히 들었다. 남자는 아이에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여자를 끌어안고 입맞추는 동안 아이는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사실은 다를지도 모른다. 이 남녀는 이미 부부일지도 모르고, 식당에 오기전 아이가 떼를 부려 혼내주는 걸수도 있다. 불현듯 이 꼬마가 보라카이 만다린 리조트 안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앉아있게 된 여정이 궁금했다.


필리핀에는 팁 문화가 있다. 호텔 벨보이나 식당 서버들에게 1~2달러 정도 팁을 놓는다. 언제 어떤 순간에 건네야 하는지 어색하고 아깝게 느껴졌다. 필리핀은 300여년간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고 이후 48년간 미국의 통치를 받았다. 미국이 혹독하게 지배를 했는지, 필리핀 사람들은 영어를 쓰고 팁도 받는다.


투비컨티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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