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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쌀길 막히면 나라가 흔들렸다. 전력이 막히면?

임오군란에서 AI 시대까지, 병목이 권력이 되는 순간

by 서지삼

2024년 겨울, 그리고 1882년 여름

쌀길이 막혀 한 나라가 휘청였던 때가 있었습니다.

전기길이 막혀 미래가 흔들릴 수 있는 오늘과 닮아 있습니다.


수도권에 짓던 AI 데이터센터 프로젝트가 중단되고 있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전력을 끌어올 송전선이 없었습니다. 이미 포화 상태인 수도권 송전망에 더 이상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142년 전인 1882년 여름, 한성의 구식 군인들이 봉기했습니다. 13개월째 봉급으로 받은 쌀이 썩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분노는 곧 민중의 분노와 합쳐져 임오군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폭발했습니다.


두 사건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병목'입니다. 인프라의 병목이 국가 시스템 전체를 흔들었던 것입니다.


조선 후기, 쌀이 권력이던 시대

조선 후기, 쌀은 화폐였고 세금이었으며 권력이었습니다. 매년 40만 석의 세곡이 한강을 통해 한성으로 운송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한성 인구 50만 명이 1년간 먹을 양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거대한 물류를 경강상인이라 불리는 소수 집단이 독점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선박 1,000여 척을 보유하고 있었고, 운임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었습니다. 1870년대 기록에 따르면, 쌀 한 섬의 운임이 평시 3냥에서 최고 15냥까지 5배나 뛰기도 했습니다.


세금에서 이미 시작된 병목

쌀 병목은 항구에서만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금을 거두고 운송하는 과정 전반이 병목의 연속이었습니다. 각 도의 조창에 모인 세곡은 서해와 한강 수로를 따라 경창으로 옮겨졌는데, 이 조운 체계는 계절풍과 수심, 기상, 선박 사정에 극도로 민감했습니다. 특정 항로와 포구에 물량이 몰리면 창고 적치와 부패, 출항 대기가 연쇄적으로 발생했고, 환적·검수 인력 부족으로 곡물 흐름은 쉽게 정체됐습니다. 대안 경로가 없으니 한강 수로가 막히면 세곡은 ‘움직이지 않는 자산’이 되었고, 징수는 끝났는데도 군량과 관용 경비 집행이 지연되는 모순이 반복되었습니다. 여기에 선박과 운송을 장악한 경강상인의 협상력이 더해져, 조운의 작은 지체가 곧 도성의 물가 폭등과 급료 체불로 번졌습니다.


병목이 만든 연쇄 붕괴

조정도 경강상인 담합을 명시적으로 경계했습니다. 순조 33년(1833) 4월 10일, 형조 판서 박종훈은 “강상의 상인과 싸전 사람들이 곡식을 파는 것을 아주 막아버려” 민생을 흔들었다고 보고했고, 관련 인물들에 대해 “서로 내통하고 조종한 흔적이 있으니” 엄벌이 불가피하다고 했습니다. 이 대목은 조정이 경강 네트워크의 가격·유통 통제를 단순 풍문이 아니라 공모(카르텔) 위험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주는 핵심 증거입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wa_13304010_001

경강상인들의 담합과 조작은 단순한 가격 상승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1881년, 세곡선 30여 척이 '의문의 침몰'을 당했고, 그해 한성의 쌀값은 평년의 3배로 뛰었습니다. 도성 안 빈민들은 굶주렸고, 군인들의 봉급은 체불되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정부의 무능력이었습니다. 대원군과 민씨 정권 모두 경강상인들을 통제할 힘이 없었습니다. 결국 1882년 6월, 누적된 분노가 임오군란으로 폭발했습니다. 단 사흘 만에 조선 정부는 붕괴 직전까지 내몰렸습니다.


구조적 병목의 다섯 가지 법칙 – 두 시대의 거울

조선 후기 쌀 유통망의 붕괴와 오늘날 전력망의 위기는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두 시대를 관통하는 다섯 개의 구조적 패턴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는 지리적 불균형의 함정입니다.
조선은 곡물 생산지와 소비지가 멀었고, 호남에서 한성까지 뱃길로 15일이 걸렸습니다. 현대 한국도 전력 생산의 상당 부분이 남부에 집중되고 소비는 수도권에 쏠려 있습니다. 거리가 멀고 흐름이 집중될수록 병목 리스크는 커집니다.


두 번째는 경로 의존의 덫입니다.
조선은 한강 수로, 현대는 초고압 송전망에 절대 의존합니다. 대체 경로가 없으니, 경강상인이나 송전망 운영자는 국가의 ‘목줄’을 쥔 셈입니다.


세 번째는 권력 집중의 역설입니다.
경강상인 우두머리가 관료보다 부유하고 영향력이 컸듯, 오늘날 대기업은 자체 발전소와 전력 우선 공급권을 확보해 중소기업과의 격차를 벌립니다. 소수가 자원을 장악하면 그 힘은 통제를 넘어섭니다.


네 번째는 완충 장치의 부재입니다.
조선의 곡물 창고는 한 달치 수요도 감당 못했고, 현대 송전망의 여유 용량도 8%에 불과합니다. 저장·분산 시스템이 없으면 작은 충격이 곧 위기로 번집니다.


다섯 번째는 제도적 경직성입니다.
조선은 수십 년간 문제를 알고도 개혁하지 않았고, 현대 전력망 확충도 규제와 절차에 묶여 10년이 걸립니다. 제도의 느린 속도는 병목을 고착화합니다.

이 다섯 고리는 시대를 달리해도 똑같이 맞물립니다. 조선이 쌀 병목을 풀지 못해 근대화에 실패했듯, 우리가 전력 병목을 풀지 못한다면 AI 시대의 경쟁에서 주도권을 잃을 수 있습니다. 역사는 다른 얼굴로 돌아올 뿐입니다.


2025년, 전기가 권력이 된 시대

2025년의 한국 전력 구조를 들여다보면, 조선 후기의 쌀 유통망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현재 전체 발전량의 40% 이상이 충남과 전남에서 생산됩니다. 그러나 소비의 45%는 수도권에 집중됩니다. 매일 100GWh가 넘는 전력이 345kV, 765kV 초고압 송전선을 따라 수백 킬로미터를 이동해야만 수도권의 불빛이 꺼지지 않습니다. 이 길고 가는 송전 경로는 조선의 한강 수로처럼 단일 의존 구조입니다.

문제는 이 송전선이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는 점입니다. 2024년 기준 수도권 송전망 이용률은 평균 92%. 여유 용량은 불과 8%입니다. 이 얇은 완충 공간에서, 신규 데이터센터 하나만 들어와도 긴장이 흐릅니다. 데이터센터 한 곳이 요구하는 전력이 100MW, 이는 10만 가구가 동시에 쓰는 전력량입니다. 한 노드에서 이런 수요가 추가되면 송전망 전체에 부담이 순식간에 번집니다.


AI 시대가 만든 새로운 병목

생성형 AI는 전력을 먹는 ‘보이지 않는 공장’과 같습니다.
일반 검색 한 번이 소비하는 전력을 1이라고 한다면, AI 응답 한 번은 10에 가깝습니다. 2025년 국내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는 3,000MW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는 원전 3기 분량입니다. 그러나 송전망 확충에는 최소 10년이 걸립니다.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지만 공급 인프라는 산술적으로만 늘 수 있는 구조적 모순이 뚜렷합니다.


전력 부익부 빈익빈

이 모순이 불평등을 심화시킵니다. 대기업은 자체 발전소를 짓거나, 한정된 송전 용량에서 우선 공급권을 확보합니다. 반면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은 전력 부족으로 사업 확장 계획을 미루거나 포기해야 합니다. 디지털 경제에서 전력 접근성은 곧 경쟁력입니다. 이는 조선 후기 곡물 유통권을 장악한 경강상인과, 그들의 손아귀에 놓인 빈민·군인의 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보이지 않는 위험

더 큰 위험은 병목의 가시성 부족입니다. 조선 시대의 쌀 병목은 시장 가격이나 군량 지연을 통해 눈에 보였지만, 전력 병목은 평소에는 감춰져 있습니다. 송전망의 여유 용량, 특정 노드의 부하율, 데이터센터 전력 계약 현황 등은 제한된 전문가 집단만 아는 정보입니다. 문제는, 이런 수치가 한계치에 닿는 순간 대응할 시간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병목을 넘어서는 세 가지 교훈

조선이 쌀 병목에 실패한 대가로 근대화의 첫 관문에서 주저앉았듯, 오늘날 우리가 전력 병목을 풀지 못하면 AI 시대의 주도권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실패만 주는 것이 아니라, 방향도 함께 제시합니다. 조선의 사례에서 뽑아낼 수 있는 세 가지 교훈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분산이 답이다

조선이 각 지방에 자체 곡물 유통망과 저장 능력을 마련했다면, 경강상인의 독점은 훨씬 약화됐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조운과 한강 수로에 모든 물류를 의존한 결과, 한 구간의 차질이 곧 나라 전체의 흔들림으로 이어졌습니다.

오늘날 전력망도 이와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규모 중앙집중형 발전소와 초고압 송전선 중심 구조는 효율적으로 보이지만, 단일 실패점이라는 취약성을 안고 있습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마이크로그리드, 지역 자립형 전력망, 소규모 분산형 발전 등 분산형 모델을 검토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습니다. 전력을 ‘중앙에서 공급받는 것’에만 의존하지 않고 ‘지역에서 생산·저장하는 방식’을 병행하는 접근입니다.


다중화가 생존이다

조선이 한강 수로 외에 육로 운송이나 해상 경로를 병행했다면, 폭풍이나 선박 사고로 곡물 공급이 전면 차단되는 상황은 줄었을 것입니다. 경강상인의 담합도 한층 어려워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현대의 전력망에서도 경로와 수단의 다중화는 고려해 볼 만한 선택입니다. 송전망 확충과 함께, 대규모 ESS(에너지저장장치), 수요반응(DR), 가상발전소(VPP) 같은 우회로 확보를 병행하면 한 축의 전력 흐름이 막히더라도 다른 축이 이를 보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투명성이 효율이다

조선의 경강상인들이 힘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보 독점이었습니다. 곡물 재고, 운송 일정, 가격 형성 과정을 상인과 일부 관리만 알고, 민간은 결과만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현대의 전력 시장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송전 여유 용량, 노드별 부하율, 가격 결정 과정이 실시간으로 공개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병목 완화를 위해 이러한 정보를 보다 폭넓게 제공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P2P 전력 거래나 실시간 전력 지도 같은 기술은, 조선 시대의 ‘정보 상인’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현대판 해법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병목 너머의 미래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들은 “쌀을 독점한 자들이 나라를 망친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로부터 13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다른 이름의 곡물, 전기를 쥔 자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전기는 더 이상 단순한 에너지원이 아니라, AI 시대의 언어이자 화폐입니다.

병목은 기술 문제로만 보이지만, 실상은 권력과 이익의 문제입니다. 조선이 경강상인의 손아귀에서 쌀 병목을 풀지 못한 채 근대화의 첫걸음을 놓쳤듯, 우리가 전력 병목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AI와 디지털 경제의 주도권은 다른 나라로 흘러갈 것입니다. 역사는 형태를 바꿔 되돌아오고, 병목은 그때마다 국가의 가장 약한 고리를 시험합니다.

그러나 역사에는 또 다른 얼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반복을 끊을 기회입니다. 병목은 필연이 아닙니다. 제도를 바꾸고, 권력을 분산시키고, 흐름을 다중화하는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기술은 그 선택을 가능하게 만들지만, 선택 자체는 사람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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