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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정철 Mar 14. 2021

어떻게 살 것인가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여기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한 명의 판사가 죽고 있습니다. 아주 고통스럽게요. 그런데 가족들 누구도 그를 동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의 죽음을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죽음을 못 본 척 회피하려고 하죠. 다가오는 죽음이 무서워서 고개를 돌릴수록 그들은 서로를 증오하게 됩니다. 죽어가는 그의 이름은 이반 일리치입니다. 고등법원의 판사이기도 한 그는 4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뜹니다. 그는 죽음이 당도하는 와중에 이렇게 원망합니다.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됐느냐"라고 말이죠. 그의 삶은 대다수의 삶처럼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불치의 병에 걸려 누구에도 동정받지 못하고 고독 속에서 죽어가게 됩니다. 


레프 톨스토이. 나무위키

'이반 일리치'. 이름부터 아주 흔합니다. 한국어로 표현하자면 '김서방' 정도가 되겠습니다. 저자 레프 톨스토이는 한 특정인의 죽음이 아닌 우리 모두가 맞이하게 될 보편적인 죽음의 문제로 넓히기 위해 이런 이름을 사용합니다.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 이반 일리치에 대해서 설명해야겠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 공부도 곧잘 해 시쳇말로 '집안의 자랑거리'로 자라나죠. 그의 부모도 그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세 아들 중 둘째였는데 첫째는 타성에 젖은 관리가 되었고 셋째는 실패만 거듭하는 문제아였기 때문에 집안에 마지막 남은 희망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아주 순탄했습니다. 한 법학 대학을 졸업한 뒤 현() 지사에서 특임 보좌관직을 맡습니다. 법률학교에서 그래 왔던 것처럼 경력을 쌓으면서도 유쾌하고 품위 있는 삶을 즐깁니다. 아주 방탕하게 놀지는 않았지만 적당히 풍류도 즐겼고요. 다른 사람과도 원만히 지냅니다. 그는 출세욕이 있었습니다. 다른 도시에 더 좋은 자리가 있으면 그쪽으로 이동해 다시 일을 시작하곤 했죠. 그의 인생은 이 '자리'와 큰 관계를 갖습니다. 그는 인생의 성공 기준을 자리와 월급으로 치환했습니다. 높은 자리로 올라가 더 큰 권한을 갖는 것, 그로 인해 더 많은 보수를 받는 것이 그가 생각한 성공한 인생이었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에게 불행이 찾아옵니다. 운이 좋게 도시의 예심판사로 발령이 나 이사하던 날, 그는 커튼을 달다가 실수로 사다리에서 떨어집니다. 

당시에 옆구리에서 통증을 느끼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그렇게 몇 달간 평화로운 날을 보내는데 옆구리의 통증이 지속되는 것을 알고 의사를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의사들은 그의 병명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고 통증을 줄여주는 모르핀과 약을 처방해줄 뿐입니다. 그의 병을 고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서도 일언반구가 없습니다. 그는 더욱 아파지는 옆구리를 붙잡으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에 빠지게 됩니다. 사실 그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비롯한 가족들은 죽음을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죽음에 직면하는 것은 공포스럽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좋은 순간에 죽음이라니 말이죠. 그의 아내는 용한 의사를 찾아가 그를 살릴 방도를 찾지만 헛수고로 끝이 납니다. 가족들은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연민하지도 않습니다. 죽음이 평온한 삶 속에 들어오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딸은 그에게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저러시는 거예요"라고 말을 하고, 아내는 "남편의 끔찍한 성격 때문에 자신이 불행하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가족은 서로를 증오합니다.


이반 일리치는 이런 기만에 신물이 납니다. 가족과 의사, 그 자신조차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어느 누구도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기만인 거죠. 그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직면합니다. 그제야 자신의 삶을 반추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죽음을 회피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됩니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해왔던 거죠. 높은 사회적 지위와 그에 맞는 월급, 친구들과의 카드게임 같은 것들은 사실 죽음에서 눈을 돌리기 위한 속임수이었던 것이죠. 그는 자신이 거짓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인생 말미에 알고 후회하게 됩니다. 

장 레옹 제롬의 벌거벗은 진실. 거짓이 진실의 옷을 입고 도망쳐 진실은 그를 쫓는다. 세상 사람은 벌거벗은 몸을 보고 시선을 돌린다. 진실은 다시 우물 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

아내와 딸과 달리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동정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의 아들과 하인 게리심입니다. 하인 게리심은 죽음을 직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를 동정할 수 있습니다. 게리심은 이반 일리치의 대소변을 아무렇지 않게 받으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언제가 다 죽습니다요. 그러니 수고 좀 못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반 일리치는 이런 게리심 앞에서는 유독 편하게 마음을 열 수 있었습니다. 죽음 앞에 선 이반 일리치가 원했던 것은 사실 연민과 동정의 눈길이었기 때문이죠.


그의 아들 역시 이반 일리치의 아픔에 눈물을 흘립니다. 중학생 아들은 임종 직전에 아버지의 손을 잡아 자신의 입술에 대고 울음을 터뜨립니다. 연민의 감정이었습니다.  아들의 눈물을 계기로 이반 일리치는 옆에 있던 아내와 딸들을 연민의 눈으로 쳐다보게 됩니다. 그는 죽음의 문턱에 다 달아서야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아내에게 마지막 눈짓으로 용서를 말합니다. 그리고 긴 고통이 끝나고 그의 죽음도 끝나게 됩니다. "그래, 이거야! 이렇게 기쁠 수가!"라는 마지막 말으 남기고요.

 

이 소설은 톨스토이 판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의 전형입니다. 톨스토이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서 진정한 삶을 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은 이해하기 불가능한 것이지만 누구에게나 찾아오죠. 그리고 그 죽음 앞에서 재산과 지위들은 무의미하게 됩니다. 톨스토이는 그러면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천착합니다. 그가 이 소설을 쓴 시기도 인생의 황혼기였습니다. 작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고 엄청난 부와 지위를 가진 그 순간 죽음의 사신이 그의 옆을 찾아옵니다.


그는 죽음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데에서 평화를 찾으려고 합니다. 이 소설에서도 이반 일리치는 다가오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제야 삶을 제대로 살피게 됩니다. 죽음 앞에 서자 자기 자신과 가족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기 위해선 죽음을 알아야 하고, 죽음을 잘 맞이하기 위해서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겠죠.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반 일리치의 임종 직전의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었다. "그래, 이거야!" 그는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이렇게 기쁠 수가." (중략) "끝났습니다!" 누군가가 그를 굽어보며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이반 일리치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죽음은 끝났어.'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더 이상 죽음은 없어.'> 회개를 한 후에야 이반 일리치는 편하게 눈을 감습니다. 그것은 영생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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