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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탕국 Nov 08. 2021

내 생애 최초의 클래식 음악

내가 기억하는 내 생애의 첫 시점은 네 살 무렵이다. 당시 맞벌이 부모의 육아란 지금보다 여건상 더 힘들었을 터. 특히 일하는 엄마들이란 '슈퍼우먼'이 되어야 했던 시절이다. 태어날 때부터 허약해 빈혈을 달고 살던 엄마는 결국 이모에게 SOS를 청했고, 그렇게 20대 미혼이던 이모는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우리 집과 가까운 곳에 얻은 작은 집은 나의 부모가 일터에 있던 한낮엔 나의 쉼터이자 놀이터였다. 나는 그렇게 엄마도 모자라 이모라는 '슈퍼우먼'을 1+1 기획상품처럼 얻었다.


곤히 자는 나를 이모네 집에 옮겨두고 출근을 한 엄마 아빠 탓에 이모 침대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일이 많았는데, 내가 처음 만나는 그날의 이모는 거의 90% 정도의 확률로 크게 음악을 틀어두고 청소를 하고 있었다. 당시 그 집엔 20대 후반 서울살이로 독립을 막 시작한 이모가 큰 맘먹고 들여놨을 '전축'이 있었고, 그 옆 책장엔 LP가 수십 장 꽂혀 있었다. 학교 무용 시간에 춤 깨나 춘다는 소릴 들었다던, 오르간 치는 것도 좋아했다던 이모가 선택한 장르는 클래식. 조금씩 지지직거리는 소음마저 멋스러웠던 그 시절 이모의 낭만은 내게도 고운 기억을 남겼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 한참 어린 이모를 엄마 대신 의지하며 내가 이모와 나눠들은 무수한 곡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다.


이모와 그 음악을 공유한 건 고작 1년 정도였지만 그 후에도 가수 이현우가 날 사랑했냐며 처연하게 <헤어진 다음날>을 부르거나, 바이올리니스트 나이젤 케네디의 재즈에 가까운 <사계> 연주를 접할 때면 그때의 기억이 자동 재생되곤 한다.




초등학생이 된 후엔 자연스럽게 동네 피아노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그 시절 피아노 학원이란 입학과 동시에 등록해 졸업과 동시에 그만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예술적 소양을 기른다는 원대한 목표보다는 부모의 육아 수고를 덜어주면서 아이들이 제 취미도 가질 수 있는 시간이었달까.


30분 연습 - 10분 기다림 - 10분 레슨의 사이클이 반복되는 학원 스케줄. 또래 아이들 중 진도가 제법 빠르던 나는 과분한 칭찬을 받으며 틀에 박힌 시간표를 따박따박 이수하는 모범생이었다. 집에 피아노가 있었지만 따로 연습을 할 정도의 열정은 없었던, 우물 안 상위권의 안주에 물들었던 나의 평화를 박살 낸 건 원장 선생님의 겨울 계획 발표였다. 대략 6개월 후인 크리스마스 즈음에 동네 다른 음악학원 수강생들과 함께 발표회를 열기로 했다는 것. 흔히 여러 학생들이 참여하는 학예회 구성이란 어딘가 서툴지만 귀여운 꼬맹이들을 시작으로, 개중 실력이 나은 언니 오빠들로 마무리를 짓는 것이 일반적. 그런데 이 ‘피날레’를 누가 하느냐가 우리 원장 선생님에겐 매우 중요했던 모양이다. 그때의 분위기란 ‘그동안 아이들이 이만큼 배웠답니다!’ 느낌의 발표회라기보단 ‘000동 배 어린이 피아노 대회’에 가까웠다.


나에게 주어진 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1악장 악보와 진도표 속 무수한 사과들. 연습 하나에 사과 한 알, 연습 하나에 지적 한 마디, 아, 어머니, 어머니...

한없이 너그러웠던 선생님들은 “더 빨리!” “더 여리게!” “더 또렷하게!”를 외치는 호랑이 선생님들이 되었고, 나는 그날부터 오로지 <비창> 1악장을 위해 피아노 학원에 다니는 신세가 됐다. 하지만 수년간 칭찬으로 다져져 콧대가 한없이 높아진 내가 하루아침에 주눅이 들거나 연습 벌레가 될 리 없었고, 결국 나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원장 선생님 집에서 1대 1 레슨을 받는 호사 아닌 호사를 누렸다. 하교 후 언제나처럼 피아노 학원에 가긴 했지만 그건 사과 몇 개를 지우기 위함에 불과했고, 진짜 레슨은 그 이후였다. 지금 생각하면 내 생애 최초의 도제식 훈련이었다. 더불어 원장 선생님의 야망과, 퇴근 시간까지 딸이 안전하다는 엄마의 안심이 빚어낸 합작품이었다.


아마도 그때가 최초로 무언가를 열심히 한 경험이었을 거다. 무엇을 성취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시작한 반복된 연습은 기어이 사과 100알을 색칠하는 근면과 끈기 (6개월 한정이었지만), 떼를 써서 무언가를 얻어내는 게 아니라 내가 잘해서 쟁취하고 싶다는 오기도 심어줬다. 결국 나는 원장 선생님의 도제식 훈련 효과로 000동 발표회의 마지막 주자가 될 수 있었으며, 무려 8페이지에 달하는 곡을 암기해 사람들 앞에서 보여줘야 했다.


사실 발표회 무대에서 나는 한 마디를 점핑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무대 측면, 커튼 뒤에서 피아노에 앉은 나를 바라보던 원장 선생님이 순간 질끈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피아노 치기를 멈추지 않고 마치 원래부터 그 구간은 없는 듯 넘어갔다는 점이다. 하지만 실수보다 다정한 박수가, 아쉬움보다는 기특하다는 칭찬이 더 기억에 남는다. 별 다른 힘을 들이지 않아도 적당히 칭찬받을 수 있었던 그때의 내게 하지 못했던 것을 노력으로 해봤다는 성취감은 분명 꽤 벅찼을 것이다. 20년 넘게 흐른 지금도 나는 <비창> 1악장의 일부분을 어떻게 치는지 기억한다.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해당 곡을 들으면 악보가 그려졌는데… 음표는 잊어도 결국 해냈다는 그날의 기분만큼은 잊지 못할 것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피아노 학원을 관두었고, 피아노를 치던 시간은 학교 수업과 보습 학원, 과외로 채워졌다. 클래식 음악은 당시 내 삶의 어느 것과도 접점이 없었다. 그렇게 약 10년이 흐른 2008년에야 다시 우연한 기회로 클래식을 듣게 됐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이 장르의 음악을 사랑한다.


2008년의 이야기를 해보자면, 나는 유럽에 있었다. 두 달 간의 홈스테이를 마치고 들어갔던 집은 인종차별주의자 하우스메이트들 때문에 안 좋은 기억만 안고 나와야 했다. 세 달 만에 새로운 집을 찾아 들어갔는데 5명의 하우스메이트가 모두 유럽 사람이었고, 대화 중 문득 느끼는 고립감이 나를 외롭게 했다. (특히 비자를 연장할 필요가 없는 그들의 자유로움이 드러날 때라든가...) 외로움이란 감정을 처음 체감한 것 같다.


그때 접한 게 한국 라디오였다. 스마트폰이라는 걸 몰랐던 시절이라 한국에 있는 사람들과는 동시간 채팅이 어려웠기에 수년 전 타국에서 학교를 나온 친구가 외로움을 견디라며 추천해준 방법이었다. 나는 밤 12시에 잠자리에 들며 '오늘 아침, 이문세입니다'를 들었고, 학교에서 돌아와 늦은 점심을 해 먹으며 '타블로의 꿈꾸는 라디오'를 들었다. 한 번은 친구들이 나를 위해 이벤트를 해준답시고 박명수가 진행하는 라디오의 청취자 참여 코너에 출연해 내게 음성 편지를 띄운 적도 있었다. 새벽 2시에 방송되는 바람에 다시 듣기로 들을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낮밤이 바뀐 사연의 감성에 젖어들어 더 외로워지면 다른 채널을 찾아 이리저리 헤맸다. 그렇게 클래식 FM을 알게 됐다. 짤막한 작품 소개 후 가사가 없거나 뜻을 알 수 없는 노랫말이 있는 긴 음악이 주야장천 나오는 채널에 가장 위로를 받을 줄이야. 때로 마음이 크게 동하는 음악도 있었다. 연주자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1악장의 7분쯤 되는 구간 -양손으로 화음을 연달아 내리꽂는 듯한 타건-은 너무 처연해서 심장 부근이 저릿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2악장에 들어서면서는 전에 없는 평안함을 보여주고, 3악장은 긍정의 분위기를 내뿜으며 웅장하게 끝맺는다. 견딜 수 없이 춥고 외로운 감정을 절규하듯 토해내더니 그럼에도 다시 살아보겠노라고 외친다. 실제로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을 작곡할 당시 심한 우울증을 앓았고, 이 작품은 그의 우울증을 치료한 의사에게 헌정했다. 수시로 보슬비가 오고, 하지만 우산을 쓰고 다니면 촌스러워지는 그곳의 분위기와도 꽤 어울리는 그 음악이 좋았다. 나는 외로워도 여기서 더 살아야 하니까. 음악은 시차 없이 나를 토닥였다. 나는 아직도 공허한 마음이 들 때, 그러나 희망은 잃고 싶지 않을 때 여지없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찾아 듣는다.


이듬해 한국에 돌아온 후엔 더욱 적극적으로 클래식 음악을 찾아다녔다. 국문과지만 소설책과 시집을 빌릴 수 있는 중앙도서관보다 음악사 책을 볼 수 있는 음대 도서관을 자주 들렀다. 아스라이 들려오는 악기 소리도 낭만이었다. 10여 년 만에 다시 배운 피아노도 그저 좋았다. 이제 진도표에 그려진 사과를 색칠해야 하는 숙제는 없었지만 스스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용돈이 생기면 공연 티켓부터 눈여겨봤고, 좋아하는 연주자도 하나둘 생겼다. 클래식 음악이라는 내 취향의 레고 블록을 하나씩 쌓아가던 그때가 가장 열심히, 온 마음으로 음악을 들었던 시기다. 가장 바닥에서 취향의 요새를 받쳐주는 단단한 블록들은 <당신의 밤과 음악>, <객석>, 예술의 전당에서 진행한 수많은 마티네 콘서트 같은 것들이다.




이 글의 제목인 ‘내 생애 최초의 클래식 음악’에 적확한 내용을 엄격하게 따진다면 첫 문단에 담긴 이야기일 것이다.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일수록 ‘생애 최초’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기회는 점점 줄어든다. 삶에 익숙해지는 게 새로움이 줄어드는 일이라 생각하면 꽤 슬프기까지 하다. 사실 ‘최초’라는 수식어가 없다 해도 나는 충분히 즐거웠고 감동했다. 그래도 기어이 익숙함 가운데에서도 새로운 것을 찾아 최초라는 단어를 붙여 설렘을 강조해 본다.


그래서 앞으로 펼쳐질 수많은 ‘최초들 그려본다.  폭은 점점 작고 좁아지겠지만 하고 싶은  남아있다는  벅찬 일이다. 코로나 시국이 끝나고 가장 하고 싶은  ‘ 생애 최초 BBC 프롬스에 가는 , 독일의 도시마다 오케스트라 출석 도장을 찍는 , 네덜란드 현지에서 콘세르트헤보우 공연을 보는 . 갑갑함이 무럭무럭 비대해지는 와중에도 틈새의 설렘을 잃지 못하는 이유다. 그래서 아득하지만 언젠가  ‘최초들 오늘도 꿋꿋이 기다리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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