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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탕국 Feb 06. 2022

지나간 것을 좋아하는 마음


어느 날, 일터에서 나른한 낮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동료 작가가 아이돌 좋아하는 사람과 클래식 좋아하는 사람의 차이를 아느냐며 SNS에서 봤다는 유머글을 보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내용은 대충 이랬다.


- 이번 달 #일이 우리 오빠 생일이야! (아이돌 팬)
vs 이번 해가 베토벤 서거 ###년이야! (클래식 팬)
- 신보 나오면 ##장 사서 응원해야지! (아이돌 팬)
vs 베토벤 교향곡 전집 사야지! (클래식 팬)


좋아하는 노래마다 이미 이 세상에 없는 분들이 만들어놓은 것이고, 당연히 새로운 작품은 나오지 않는 웃픈 현실이라나. 물론 반박할 말은 넘친다. 같은 곡이어도 A연주자와 B연주자의 곡 해석은 다르며 그렇게 따지면 들을 수 있는 새로운 작품이 무수히 많은 것이다, 지금의 연주는 역사와 함께하며 거듭나는 것이다, 이런 곡들이 작곡될 때엔 베토벤 쇼팽 모차르트가 그 시절 아이돌이었다, 리스트라는 피아니스트는 어찌나 인기가 많았는지 관객이 그의 연주를 듣다 혼절하는 일이 빈번했다 etc etc…


그러나 과거가 기준이고 어느 누구도 직접 알려줄 수 없는 것을 해석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으며 그 과정까지 향유하는, 오래 전의 것을 가장 신성한 존재로 예찬하는 것은 ㅂㅂㅂㄱ ㅃㅂㅋㅌ. (반박불가 빼박캔트)




그 오랜 과거, 예술가가 한 생애를 보낸 시기를 생각해본다. 내가 그 시대 사람이었다면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비엔나 도심을 벗어난 아주 조용한 마을에 자리한 베토벤의 집에 들른 적이 있다. 그날 나는 그곳에서 베토벤이 죽기로 결심하고 써 내려갔던, 그러나 누구에게도 부치지 않고 간직했던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읽었다. 분명 베토벤의 생애를 담은 글과 영화를 보며 그 내용을 이미 접했을 텐데, 베토벤이 실제로 살았던 공간에서 그가 사용한 물건을 살펴본 후 읽는 글은 사뭇 달랐다. 청력을 잃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치료를 반복해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좌절, 다시 나아지기는 할 것인지에 대한 의심과 무력감, 그래서 더 이상 생을 이어나가고 싶지 않다는 결심 아래 글을 시작했지만 결국 음악만이 살아갈 이유임을 깨닫는 과정이 그 한 통의 부치지 못한 편지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21세기의 나는 그것을 읽고 가슴 저리지만 그 시절 이웃들에게 베토벤은 그저 성격이 괴팍한 미치광이 매독 환자였겠지. (사실 베토벤은 매독을 앓지도 않았다. 오죽했으면 죽어서라도 자신의 병을 밝혀달라는 부탁을 했고, 그의 사망 200년 후에야 그가 남긴 머리카락 분석을 통해 매독 치료를 받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이 과정은 다큐멘터리 <베토벤의 머리카락>으로 확인할 수 있다.)


사람들이여. 언젠가 이 글을 읽는다면 당신들이 나를 얼마나 부당하게 대했는지 생각해보아라.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 중 한 구절이다. 수백 년이 지나서야 후대의 인물들이 알아준 간절한 마음.


모차르트는 또 어떤가. 영재로 시작해 천재로 생을 마감했으니 내가 만약 그 시절 잘츠부르크나 비엔나 어드메에 살며 ‘이웃 모차르트’의 소식을 들었다면 시기와 질투만 했을지도 모르겠다. 항상 돈에 쪼들리고 도박을 즐겼던 그를 보면서는 ‘어릴 때부터 뜨더니 정신 못 차리네’ 하며 혀를 쯧쯧 찼을지도 모르겠다. 음악가뿐만이 아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중 한 명인 반 고흐는 생전 단 한 작품만 겨우, 그것도 헐값에 팔았다. 독하디 독한 압생트를 매일 같이 마시고, 정신병에 시달리다 못해 자신의 귀를 자를 정도라니 가까이 가기도 무서웠을 것이다. (반 고흐의 귀를 누가, 어떻게, 왜 훼손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고갱과의 갈등 때문에, 동생 테오의 결혼 소식에 충격을 받아서 등의 의견이 있으며 심지어 귀를 자른 사람이 고흐 본인이 아니라 고갱이라는 썰도 있다) 허나 흘러간 세월과 그들이 남긴 작품, 그리고 일기 따위의 기록이 이 모든 '비일상적'인 것을 납득하게 만든다. 때론 그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우리가 그저 애를 쓰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지만 말이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작가 길은 자정만 되면 한 세기 전의 파리로 시간 여행을 떠나 헤밍웨이와 문학을 논하고 피카소의 그림에 의견을 더하는 황홀감을 누린다. 전설적인 예술가의 세계에 갑자기 등장한 미국인 남자에 불과한 그에게 예술가들은 한없이 친절했고, 덕분에 길은 동경하던 시대의 낭만을 한껏 즐긴다. 자정이 되면 마법이 풀리는 신데렐라와 달리 12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면 낭만이란 마법에 빠지는 길의 모습을 보며 꿈에서라도 한 번쯤 누려봤으면 하는 마음을 품은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 순간이 오면 나는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할까? 길이 헤밍웨이에게 제 글을 봐달라고 조심스레 입을 뗐던 것처럼 나도 숨겨둔 습작을 옆구리에 끼고 대문호의 집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릴까? 아니면 시대를 풍미한 음악가를 찾아가 당신이 남긴 이 음악의 악보가 한 세기 후엔 몇 가지 버전으로 남아있는지 아느냐며 발설하고 싶은 마음을 비밀스레 숨긴 채 정확한 음표와 표현, 의도를 물어볼까? (그리고 21세기로 돌아와 발표한다면?) 궁금한 것과 이루고자 하는 것을 손쉽게 얻는 데에 그 시간을 다 쓰고 말까?


그러나 다시 생각해본다. 서서히 잃어가는 청력에 오로지 믿을 것이라곤 직감뿐인 채로 피아노를 꽝꽝 때렸을 베토벤에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림을 꾸역꾸역 그리며 매일 하루를 독한 술로 마감했을  고흐에게, 여성에게 주어진 능력은  시대에서 빛을 발하지 못할 거란 불안감을 안고 문장을  내려갔을 버니지아 울프에게 나는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지를.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르면 당신이 머무는  공간엔 구름 떼처럼 사람들이 몰려와 발도장을 찍고,  자신마저 의심해가며 하나씩 남겼을 작품에서 당신의 흔적을 찾으며 이것은 어떤 생각의 결과일까 아주 많이 헤아려  것이라고. 그러나 내가 그들이 살았던 , 자주 가던 카페, 잠들어있는 무덤 등지에  때면 속으로 가만히 읊조렸던 말은 끝내  밖으로 내지 못할 것이다. 시간을 초월한 공간을 찬찬히 훑고 느끼며 기꺼이 고개 숙였던 그날들마다 나는  죄스러웠다고, 당신의 괴로운 생애마저 하나의 작품으로 소비한 것을 부디 용서해달라고.


아주 오래 전의 것을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에서야 좋아하는 나의 마음은 이렇다. 오늘의 예술 감상은 그 시절 어떤 예술가의 고통에 빚을 지는 행위라는 생각. 좋아하는 것을 아끼는 마음이야 누군들 그렇지 않겠냐마는, 지금 이 순간 현존한 이들끼리 과거의 것을 향유하는 마음은 그리하여 더욱 신중하고 조심스러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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