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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탕국 Nov 25. 2023

점의 위로

아무것도 모르고 뛰어들었다. 프로그램이 뱉어낸 숫자를 한참 들여다보며 그 뜻을 알기 위해 고민할 줄은, 이 학문이 사회학과 심리학 같은 다른 사회과학의 살점들을 떼어다 형상을 만들었을 줄은 전혀 몰랐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헛되지 않듯 1년 전의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서 10년 넘게 한 일도 놓은 채 이 세계에 내 몸을 풍덩 빠뜨렸다.


지난 1년은 참 즐거웠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렇게 둥둥 떠다니다 보면 어딘가에 당도할 것 같았고, 그렇게 마주하게 될 또 다른 세계가 나쁘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특히 지난 학기엔 새로운 연구방법의 존재를 알게 돼 내가 관심 갖던 것을 그 방법을 흉내 내어 분석해 보는 것이 너무 즐거웠다. 이번 학기에는 그 방법을 보다 구체적으로 배워서 또 다른 것을 들여다보는 중인데, 여전히 재미는 있지만 이전보다 재미있는지는 모르겠다. 분명 반년 전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아는 게 더 많을 텐데, 그만큼 모르는 것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모르는 걸 그저 호기심을 갖고 탐험할 수 없게 됐다. 가라앉고 싶지 않은데 앞으로 나아갈 동력도 찾지 못했다. 언젠가 다시 일을 하게 되면 내가 한 공부가 유용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학문과 현장의 접점을 찾지 못했다. 그게 나의 동력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고작 1년 하고 뭘 알고자 하는 게 욕심이지. 얼마 전 교수님은 내 학부 전공과 관심사를 고려해 보니 이런 연구를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고 툭 어떤 주제를 던지며, 한 20년 하면 알 수 있을 거라고 했다. 1만 시간의 법칙 같은 게 한때 진리처럼 여겨졌던 걸 보면 틀린 말은 아닐 거다.


김환기를 보러 가야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미술관 벽을 가득 채울 듯한 크기의 김환기 작품 Universe를 보며, 이것이 과연 무한한 세계라는 생각을 했다.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더 작은 신안 섬마을을 생각하며 그린 점들이 모여 캔버스를 가득 채운다. 커다란 원을 그리며 빼곡하게 채워진 점은 캔버스 바깥으로 이어질 듯하다. 광활한 블루지만 서늘하지 않고, 무한한 우주지만 블랙홀처럼 두렵지 않다. 퐁피두 센터에서 큰 벽면을 가득 채운 차갑기 그지없는 이브 클라인의 모노크롬 페인팅에 위로받았듯 김환기의 푸른색도 그랬다.


1960년대부터 김환기는 점과 선에 천착한다. 1968년 신문지에 그린 형상들은 투박하고 거칠었다. 1970년대가 되면 우리가 아는 캔버스에 그린 대형 점화가 쉴 새 없이 탄생하는데, Universe처럼 질서와 균형이 돋보이는 작품도 있지만 몇몇 작품들에선 점의 크기도 다양하고 물감의 농도도 짙었다 옅었다를 반복한다. 마치 정돈되지 않은 점과 선이 캔버스 위를 유영하는 듯하다. 그러나 수많은 드로잉을 보면 그것이 그의 치열한 고민의 결과물임을 알게 된다. 그 많은 점은 사유의 과정이었다.


서러운 생각으로 그리지만 결과는 아름다운 명랑한 그림이 되길 바란다. 김환기의 말이다. 죽을 만치 그림을 그렸다는 그만큼은 할 수 없을지라도 점 하나는 찍어보련다. 스쳐 지나갈 작은 흔적이지만 한때 내 사유의 결과라는 걸 나는 언제고 알 수 있을 테니까. 결과는 아름답고 명랑하기를 바란다.


환기미술관. 2023.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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