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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향기 May 20. 2024

브로콜리 하나에 9900원

아침마다 해독주스룰 갈아서 먹는데, 브로콜리가 없었다. 내일 먹을 것을 위해 남편에게 하나 사 오라고 부탁했다. 남편은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옛날에는 마트에 가서 무엇을 사 오라고 하면, 마트에 가서 꼭 전화를 해서 어떤 것으로 사야 하느냐, 큰 것이 있고 작은 것이 있다, 묶어진 것이 있고 낱개로 되어 있는 것이 있다, 등등 자질구레한 것을 묻고 사 오곤 했는데 요즘 들어서는 그냥 사 오는 때가 많아졌다. 다른 것도 없이 달랑 브로콜리 하나만 사 오는 것이니까 역시 알아서 사 오겠지 싶었다. 

 내가 동네 한 바퀴 산책을 끝내고 들어오니까 남편이 묻는다. 

"브로콜리가 원래 비싼가?"

남편이 사 온 브로콜리 비닐껍집을 보니 9900원. 엥? 9900원?? 이렇게 비싸?

"이렇게 비싸지 않은데? 큰 것도 5000원이면 샀는데?"

나는 마치 불의를 목격한 것처럼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니 브로콜리 하나에 9900원이라니! 아무리 물가가 올랐다고 하더라도 이건 너무한 것 아니야? 뭐가 잘못된 거 아닐까? 점원이 물건 값을 잘못 붙인 거 아닐까? 이렇게 비싼 것을 사 오란다고 전화도 안 하고 그냥 사 온 남편이 철없어 보였다. 


 당장 마트에 전화를 했다. 마트는 한 달 전에 개업한 곳이었다. 근처에 큰 마트가 있지만 집과 가까운 곳에 또 하나 작은 마트가 생겨서 반가운 마음이었다. 서로 경쟁을 하면 좀 더 좋은 물건을 가져다 놓거나 가격이 조금 떨어지겠거니 하는 기대도 있었다. 

 좀 전에 남편이 브로콜리 하나를 사 왔는데 9900원이라고 해서, 이상해서 전하했다고 했다. 마트 주인인 듯싶은 여자는 국산이어서 조금 비싸다고, 안 그래도 남자분께 비싸도 그냥 사시겠냐고 물어보았다고 했다. 나는 지금 당장 가면 환불이 되냐고 물었고, 마트 주인은 가져오시면 환불해 주겠다고 했다. 나는 헐레벌떡 저녁준비도 미루고 달려갔다. 브로콜리 하나 달랑 들고. 

 " 저기요, 아까 브로콜리 때문에 전화한 사람인데..." 하면서 문제의 그 브로콜리를 내밀었다. 주인은 아무 말 없이 결재한 카드를 받아 쥐고 취소했다고 취소영수증을 챙겨주었다. 

 씩씩하게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남편에게 취소영수증을 내밀었다. 내가 환불하러 간다니까 남편은 말렸다. 아니, 그냥 먹자고, 우리가 9900원짜리 브로콜리 하나 먹었다고 집안이 망하겠냐고. 나는 그런 식으로 살림을 하면 끝이 없다고 없다고 응대했다. 그런 남편에게 마치 잘못을 바로잡아주는 선생처럼, 네가 잘못한 것, 내가 바로잡았다는 식의 의기양양함으로 취소 영수증을 내밀었다.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영수증을 힐끗 보더니 아무 말이 없었다.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일었다. 브로콜리 하나 때문에 두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했음을... 남편은 사 오라는 것을 사 온 수고를 했는데, 거기에 대고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부리나케 달려 나가 환불을 해왔으니, 내색은 안 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민망했을 터였다. 마트 주인은 이제 막 개업해서 좀 잘해보려고 좋은 상품을 가져다가 팔아보려고 했는데 비싸다고 전화를 하고 달려와서는 환불해 주라고 하니, 장사할 맛이 확 떨어졌을 것.

  두 사람의 마음을 짐작해 보고는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냥 먹으면 됐는데... 마침 그 브로콜리는 단단하고 싱싱하고 컸는데...


 나는 왜 그렇게도 순간 열을 내고 마트에 쫓아갔을까. 부당하다고 여겼다. 브로콜리 하나에 9900원이라는 사실이. 거기에는 치솟는 물가에 대하 불만이 있었다. 어딜 가나 오르지 않은 것이 없고, 한 끼를 사 먹으려고 하면 만원 한 장 가지고도 안 되었다. 밥에 반찬이 있는 것이면 만 이천 원은 훌쩍 넘고 두 사람이 먹으면 3만 원은 가져야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요즘이다. 인플레에 화를 내고 있나? 아마 그런 비슷한 감정이었던 것 같다. 브로콜리 하나를 그렇게 튼실하게 키우기 위해서는 비닐하우스에 전기도 많이 들었을 것인데, 때에 맞춰 돌보고 수확하는 농부의 수고를 따지면 어디 9900원 가지고 될 일인가? 내가 당장 9900원 가지고 브로콜리 하나를 키워서 만들어내라고 하면 만들 수 있냐는 것이다. 농부의 수고를 생각하면 하나에 2만 원을 해도 부족할 것이다. 

 그래도 두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아직 못 했다. 남편에게는 다른 브로콜리를 사 와서는 "이게 아까 것보다는 좀 작긴 하네" 하면서 스리슬쩍 넘어갔고, 새로 개업한 그 마트에는 민망해서 두 번 다시 발걸음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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