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outside the box
꽃무늬를 좋아하면 나이가 든 거라는데 나는 중학교 때부터 꽃무늬를 좋아했다. 지금은 누구나 잘 입고 다니는 기다란 하늘색 꽃무늬 원피스를 입었고 (그 당시에는 미니스커트가 유행이었다) 그 옷을 가장 아꼈다. 교복을 입는 게 일상이라 사복이 많지도 않았지만. 나의 꽃무늬 사랑은 취업을 한 이후, 쥐꼬리만 한 월급이지만 '내 돈'을 벌고 나서 더 깊어졌다. 대학교 때는 부모님이 사주지 않으면 입지 못했던 써스데이아일랜드 원피스를 월급날마다 하나씩 샀다. 어느 순간 내 옷장은 그 브랜드의 꽃무늬 원피스가 색깔별로 걸려 있었다.
MBTI가 유행한 이후 나는 줄곧 ISFP-INFP라는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출판업계에 발을 담근 후 안 그래도 별로 없었던 현실 감각이 더 떨어져 INFP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나와 잘 맞는 친구들, 나와 결이 비슷하다고 느끼는 친구들은 모두 I로 시작하는 MBTI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함께 한 상자에 담겨 있고 싶었다. 그들과 다른 나를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실상은 E 40% I 60%로 두 성향을 나름대로 골고루 갖추고 있는 데도 말이다.
그러다 친구들의 단체 카톡방에 MBTI별 옷차림 짤이 올라왔다. 나는 당연히 INFP잖아! 하면서 두 눈을 굴렸지만 내 옷차림과 가까운 MBTI는 ENFP였다. 내가 ENFP라고? 친구들은 인프피 감성을 잃지 말라면서 충격받은 나를 보며 깔깔 웃었다. 또 보고, 다시 봐도 알록달록한 꽃무늬로 가득한 내 옷장은 영락없는 ENFP의 옷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INFP들의 옷차림을 보았다. 무채색의 셔츠에 채도가 낮지만 포인트가 되는 스카프, 그리고 슬랙스. 내가 가장 불편해하는 복장들뿐이었다.
올해 나의 큰 행사 중 하나인 이사를 앞두고 돈을 더 주더라도 오래 쓸 수 있고 기능성과 디자인이 모두 만족스러운 가구를 사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열심히 침대와 소파, 책장 겸 TV장으로 쓸 낮은 책꽂이를 찾았다. 어느 홈페이지에 가면 침실은 앤틱한 분위기로 꾸미고 거실은 원목톤으로 하면 좋다고 하고, 또 어떤 후기를 보면 오래 쓸 걸 생각해서 침대 헤드는 패브릭으로 사지 말라고 하는 말들이 있었다. 그런 말들은 다 흘러가지 않고 내 속으로 들어와 남들은 얼마짜리 소파를 샀는지, 낮은 책장 위에는 무엇을 올려 두었는지 살피기 급급했다.
이렇게 인터넷에 빠져서 찾다가는 파도에 휩쓸려 다닐 것 같아 주말에 우연히 들른 백화점에서 내가 직접 침대를 보고, 만지고, 누워 봤다. 다른 사람의 방이 어떤지 살피지 않고 침대만 진열되어 있는 쇼룸에서 오로지 내 눈으로 가구들을 살피니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선명해졌다. 부드러운 촉감의 패브릭 헤드, 모서리에 포인트로 세워진 작은 호두나무 기둥, 그리고 딱딱하지는 않지만 나의 몸을 지지해 주는 매트리스까지.
그리고 더 이상 오늘의 집 어플과 인스타그램에서 그들의 입맛에 맞게 꾸며 놓은 집들을 보지 않기로 했다. 내 눈으로 실재하는 물성을 하나씩 살피면서 질리지 않고 오래오래 머물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 나가기로 했다. 그렇게 돼서 조금 느리게 채워져도 괜찮다. 그러면서 오로지 내가 원하는 가구의 촉감, 눈으로 보이는 나무의 결, 조명의 색을 알 수 있으니까. 조만간 용산 근처에 가게 되면 대학교 때부터 자주 찾던 옷가게에 들러야겠다. 새로 업로드된 꽃무늬 긴치마를 직접 입어 보고 사야지. 아마 무척 마음에 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