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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호박 May 09. 2022

꽃무늬 원피스를 좋아하는 INFP 이야기

thinking outside the box


꽃무늬를 좋아하면 나이가 든 거라는데 나는 중학교 때부터 꽃무늬를 좋아했다. 지금은 누구나 잘 입고 다니는 기다란 하늘색 꽃무늬 원피스를 입었고 (그 당시에는 미니스커트가 유행이었다) 그 옷을 가장 아꼈다. 교복을 입는 게 일상이라 사복이 많지도 않았지만. 나의 꽃무늬 사랑은 취업을 한 이후, 쥐꼬리만 한 월급이지만 '내 돈'을 벌고 나서 더 깊어졌다. 대학교 때는 부모님이 사주지 않으면 입지 못했던 써스데이아일랜드 원피스를 월급날마다 하나씩 샀다. 어느 순간 내 옷장은 그 브랜드의 꽃무늬 원피스가 색깔별로 걸려 있었다.


MBTI가 유행한 이후 나는 줄곧 ISFP-INFP라는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출판업계에 발을 담근 후 안 그래도 별로 없었던 현실 감각이 더 떨어져 INFP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나와 잘 맞는 친구들, 나와 결이 비슷하다고 느끼는 친구들은 모두 I로 시작하는 MBTI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함께 한 상자에 담겨 있고 싶었다. 그들과 다른 나를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실상은 E 40% I 60%로 두 성향을 나름대로 골고루 갖추고 있는 데도 말이다.


그러다 친구들의 단체 카톡방에 MBTI 옷차림 짤이 올라왔다. 나는 당연히 INFP잖아! 하면서  눈을 굴렸지만  옷차림과 가까운 MBTI ENFP였다. 내가 ENFP라고? 친구들은 인프피 감성을 잃지 말라면충격받은 나를 보며 깔깔 웃었다.  보고, 다시 봐도 알록달록한 꽃무늬로 가득한  옷장은 영락없는 ENFP 옷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INFP들의 옷차림을 보았다. 무채색의 셔츠에 채도가 낮지만 포인트가 되는 스카프, 그리고 슬랙스. 내가 가장 불편해하는 복장들뿐이었다.


올해 나의 큰 행사 중 하나인 이사를 앞두고 돈을 더 주더라도 오래 쓸 수 있고 기능성과 디자인이 모두 만족스러운 가구를 사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열심히 침대와 소파, 책장 겸 TV장으로 쓸 낮은 책꽂이를 찾았다. 어느 홈페이지에 가면 침실은 앤틱한 분위기로 꾸미고 거실은 원목톤으로 하면 좋다고 하고, 또 어떤 후기를 보면 오래 쓸 걸 생각해서 침대 헤드는 패브릭으로 사지 말라고 하는 말들이 있었다. 그런 말들은 다 흘러가지 않고 내 속으로 들어와 남들은 얼마짜리 소파를 샀는지, 낮은 책장 위에는 무엇을 올려 두었는지 살피기 급급했다.


이렇게 인터넷에 빠져서 찾다가는 파도에 휩쓸려 다닐 것 같아 주말에 우연히 들른 백화점에서 내가 직접 침대를 보고, 만지고, 누워 봤다. 다른 사람의 방이 어떤지 살피지 않고 침대만 진열되어 있는 쇼룸에서 오로지 내 눈으로 가구들을 살피니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선명해졌다. 부드러운 촉감의 패브릭 헤드, 모서리에 포인트로 세워진 작은 호두나무 기둥, 그리고 딱딱하지는 않지만 나의 몸을 지지해 주는 매트리스까지.


그리고 더 이상 오늘의 집 어플과 인스타그램에서 그들의 입맛에 맞게 꾸며 놓은 집들을 보지 않기로 했다. 내 눈으로 실재하는 물성을 하나씩 살피면서 질리지 않고 오래오래 머물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 나가기로 했다. 그렇게 돼서 조금 느리게 채워져도 괜찮다. 그러면서 오로지 내가 원하는 가구의 촉감, 눈으로 보이는 나무의 결, 조명의 색을 알 수 있으니까. 조만간 용산 근처에 가게 되면 대학교 때부터 자주 찾던 옷가게에 들러야겠다. 새로 업로드된 꽃무늬 긴치마를 직접 입어 보고 사야지. 아마 무척 마음에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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