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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호박 May 13. 2022

할머니를 기억하는 법


오늘은 잠시 외부에서 업무 일정이 있었다. 회사로 복귀하는 길에 예기치 못한 복통으로 급히 약국을 찾았다. 길 건너 바로 약국이 보여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길 기다렸는데 그 약국에는 '12시 30분-2시 점심시간'이라는 종이가 입구에 붙어 있었다. 근처에 약국이 더 있을 거란 생각으로 길을 건너고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가자 금방 문을 연 약국이 있었다. 약을 사고 회사로 돌아가는 그 길목에서 수많은 의원과 약국을 보았고 함께 있던 동료와 "점심시간이 저렇게 긴 약국은 처음 봤어요. 신기해요"라는 대화를 나누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약 기운이 떨어졌는지 다시 복통이 찾아왔다. 가방에서 약을 꺼내 두 알을 먹었다. 할머니가 늘 끓여주던 결명자차를 집에서 혼자 우려 마시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면서 문득 아까 점심시간이 아주 길었던 희한한 약국이 생각났다. 그러자 20년을 살았던 동네의 ㅇㅇ희망 약국 사람들이 떠올랐다.


ㅇㅇ희망 약국은 우리 집 옆에 있던 ㅇㅇ아파트의 이름을 딴 ㅇㅇ약국과 희망약국이 합쳐지면서 생긴 약국이다. 무서운 인상에 그 누구보다 친절한 목소리로 약의 성분과 주의할 점을 조곤조곤 설명해 주셨던 희망약국의 약사님. 그리고 안에서 약을 제조하고, 따뜻한 웃음으로 아내분이 손님을 맞이했던 ㅇㅇ약국. ㅇㅇ약국의 아줌마는 몸이 편치 않아 종종 자리를 비우게 되셨고, 그 자리를 아르바이트생이 채우다가 결국 희망약국과 합쳐서 ㅇㅇ희망약국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경쟁 약국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약국이 합쳐지다니. 그것도 참 독특한 일이다.


ㅇㅇ약국의 아줌마는 내가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고 약을 타러 갈 때마다 비타민C 사탕을 챙겨 주셨다. 자주 병원에 가던 우리 할머니와 친하기도 했고, 할머니와 함께 사는 아이들 중에 할머니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는 아이는 처음 봤다며 나와 동생을 늘 기특하게 여겼다. 일 년에 한 번씩 꼭 고열이 난 채로 약국에 들어가면 우리 할머니보다 더 걱정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할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후 아빠가 동네에서 할머니와 가깝게 지내던 분들께 인사를 다닐 때, 소식을 듣자마자 아줌마는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와 할머니의 유품을 마저 정리하고 처음으로 학교에 가던 날, 대문에서 내가 나오자 "여기 사는 할머니 요즘 안 보이던데, 무슨 일 있나요?"라고 물어보던 할머니도 있었다. 저희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대답을 들은 할머니는 작은 한숨을 쉬며 집으로 돌아가셨다. 사람들과 있으면 때때로 소심해 보이고 외로워 보이던 우리 할머니였는데. 할머니를 기억하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조금은 기뻤다.


올해도 할머니의 기일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오늘 마주친 희한한 약국 덕분에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는 내내 할머니를 떠올렸다. 할머니가 떠나는 날 함께 있어주었던 친구들의 얼굴도 하나씩 생각났다. 입관 예배 때 술 먹고 자고 있었던 사람의 이름까지 기억하는 걸 보니 기억이 미화될 정도로 희미해지지는 않았나 보다. 다행인 일이다. 나는 그 동네를 떠났지만 여기에도 여전히 할머니를 생각하게 하는 것들이 있다. 우리가 함께 살던 동네에 있는 것들은 이곳에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다른 모양으로 있어도 실처럼 엮여 있어 생각을 풀어가다 보면 그 끝에는 늘 할머니가 있다. 그 실이 풀리지 않도록 자주 할머니를 떠올리는 것. 그래서 떠난 할머니가 외롭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이곳에 남아 있는 내가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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