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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리 Ella Jun 08. 2021

신조어가 낳은 편견사회

Think Different: 신조어의 어원, 언어로 규제되는 감정

 어서 자리를 뜨고 싶던 소개팅이 있다. 개그 캐릭터로 많이 풍자되는 오글남의 표본이었다. 성격에 모난 구석 없이 좋은 사람이어도 대화하다 참기 힘들 정도면 말짱 도루묵이다. 그분은 솔직한 마음을 드러낸 것뿐인데, 왜 나는 그토록 참기 힘들었을까. 손까지 움켜쥐게 만드는 감정은 대체 어디에서 부는 바람일까. 오그라든다는 건 감정일까, 기분일까, 느낌일까. 어린아이들도 그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혹은 커가면서 자연스레 생기는 걸까. 신조어가 만들어낸 감정은 아닐까. 그렇다면 신조어가 우리의 감정을 더 소극적으로 컨트롤하게 만드는 걸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글쎄, 신조어의 어원이 궁금해졌다.



오그라들면

방법 한다


오그라든다, 오글거린다, 오글오글, 오그리토그리, 손발 이미 접혔다, 레벨업 된 육글과 칠글, 시공간이 오그라든다.. 별의별 재기 발랄한 응용까지 나올 정도로 일상에서 자주 쓰이는 신조어 중 하나다. '오그라든다'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물체가 안쪽으로 오목하게 휘어져 들어가거나, 거죽이 오글쪼글하게 주름이 잡히며 줄어드는 모양새라 풀이되어 있다. 손발이 오그라든다는 표현은 이 오그랑오그랑해진 모양을 빗대어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허나 이 의미만으로는 개연성이 부족하다.



이 짤을 알아보는 당신의 나이는 최소 삼땡. '오그라든다'의 시초가 된 짤이다. 해석해보자.

깔고 앉은 나일론 방석 갖다 놔라. 안 갖다 놓으면 방법 한다.
방법 하면 손발이 오그라든다. 갖다 놓으면 안 한다.
* 방법하다: 1. 상대방에게 응징하다 2. 공격하다 3. 해치우다

할머니의 무시무시한 시조(?)가 히트를 치면서 '안 하면 방법 한다. 방법 하면 손발이 오그라든다' 등 원뜻 그대로의 협박용 언행으로 쓰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못 볼 꼴을 대체하는 용어로 굳혀졌다.


오글거린다는 표현이 보편화되자 이를 버티는 힘, '항마력'이라는 신조어가 파생됐다. 모 드라마에서 강스카이씨는 전학 온 학생을 지긋이 내려다보며 읊조린다. -사탄들의 학교에 루시퍼의 등장이라..(후훗)- 항마력 테스트의 대표적인 예시다. 사실 이 정도면 약과고, 한 항마력 한다고 자부하는 필자에게도 버티기 힘든 장면이 있다. 일본판 프듀(프로듀스 101) 엔딩 요정들의 만행은 곱씹어봐도 머리카락이 삐죽 선다. 모든 엔딩 요정들을 보고도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경의의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최근에는 최준이라는 부캐도 나왔다. 우리 준이오빠(?)는 이성 관계에서 오글거리는 군상을 잘 표현한다. 특유의 능글맞고 느끼한 말투로 젠지부터 밀레니얼 남녀 모두 준며들게 되는 파장을 일으켰다.


Illustration by Hacci


중2병에 걸린 사람에게서도 오그라드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신조어가 신조어를 수식한다.- 자신에게 흠뻑 도취한 듯한 모습에서 나르시시즘과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자아에 취해있기보단 본인만의 세계관에 잠식당해버린 듯한 데서 결이 좀 다르다.

                                           

오그라든다는 표현이 생기기 전 세대들도 비슷한 감정은 느꼈을 거다. 그땐 어떻게 표현했을까 되짚어보니 끽해야 오버한다? 느끼하다? 정도겠다. 오버한다는 뜻은 굉장히 넓은 범위로 쓰이고 있기에, 특정인을 신랄하게 꼬집진 못한다. 허나 오그라든다는 표현은 손발을 움켜지게 되는 의태어 하나로 복합적인 감정을 아우른다. 뒤섞인 감정을 딱 꼬집지 못할 때 쉽게 뱉어낼 수 있는 말, 이제 뭐만 하면 오그라든다는 말이 자연스레 따라붙는다.



과몰입 해봤냐능?

오타쿠와 OO충


특정 현상이나 대상을 좋아하는 수준을 넘어 지나치게 몰입하는 사람들의 대명사, 알다시피 오타쿠다. '-충'은 오타쿠와 비슷한 듯 다르다. OO충의 국내 커뮤니티에서 나온 신조어로, 이름에서도 느껴지듯 초반에는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쓰였다.


오타쿠의 어원에는 여러 설이 있는데 그중 아래 두 가지가 대표적이다.

1. 오타쿠(お宅)는 대화를 할 때 당신을 높이는 '댁'과 같은 의미다. 애니, SF 동아리 등의 오타쿠 집단에서 상대를 높이는 의미로 오타쿠라 칭하던 게 현재의 어원이라고.
2. 오타쿠는 '집'을 의미하기도 한다. 집안에만 틀어박혀 본인이 좋아하는 것만 한다는 의미로, '먼 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에서는 이 설을 따랐다.

오타쿠에 반해 충은 좀 더 집단적인 의미가 강하다. 충의 어원도 살펴보자.

1. 디시인사이드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초기 커뮤니티에서는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대상을 낮잡는 의미로 쓰였다. ex. 급식충, 일베충
2. 인물이나 사물, 사상을 가리지 않고 자신이 추종하는 대상을 맹신하는 개인 혹은 집단을 이른다. 집단에서는 대결 구도에서 나와 관점이 다른 상대편을 '충'이라 부른다.  의미 자체는 표준어 접미사인 '-파'와 거의 같다. ex. 부먹파vs찍먹파


우선 오타쿠는 어원만 봐도 초기에는 그리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일본에 애니메이션, 게임과 같은 서브컬처에 기반한 가상 세계와 특정 대상을 집요하게 탐닉하는 무리들이 상징화되면서, 이들의 극단적인 행동이 더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관련 지식이나 상품을 소비하며 정체성을 형성하다가, 점점 과몰입을 넘어 가상의 대상을 현실로 끌어와 마치 옆에 현존하는 듯 행동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일본에서 오타쿠는 사회적으로 잘 어울리지 못하고 골방에 틀어박힌 이른바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 더 심하게는 가상의 정체와 사랑에 빠지는 변태(?) 같은 이미지로 자리잡았다. 오타쿠 문화가 우리나라로 넘어왔을 때 이미 부정적인 인식이 지배적이었을 수밖에 없던 이유다.


Illustration by Hacci


오타쿠라는 말이 생기기 전에는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라는 뜻의 '마니아'가 있었다. 마니아와 오타쿠는 엄연히 구분되어 불렸다. 취미가 건설적이거나 적당히 즐기는 선이라면 무조건 마니아였다. 현대미술 오타쿠, 필카 오타쿠라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미디어에서 오타쿠를 언급하는 빈도가 잦아졌고, 반대로 마니아는 종적을 감췄다. 격음(ㅌ, ㅋ)이라 격하게 들리던 오타쿠에서 (오)덕후로 K-패치되면서 구수하고 편한 느낌에 의미가 완화된 걸까? 그저 자연스럽게 마니아의 언급량이 줄어들면서 무언가에 몰입한 사람들을 전부 덕후라 퉁쳐 부르게 된 걸까?


이에 앞선 근본 원인은 사회 현상의 변화에 있다. 개인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전문성을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기성세대의 획일화된 주입식 교육보단 자신의 관심 분야에서 전문적인 역량을 발휘하는 사례가 주목받게 됐다. 다시 말해 우리 인식 속 오타쿠의 의미가 '코스튬 할 것 같은 이미지'에서 '무언가에 흠뻑 빠진 상태'가 우선적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깊게 향유하는 취미가 있으면 그 뒤에 덕후가 붙어 하나의 별명처럼 불린다. -나 또한 취향이나 취미를 소개할 때 내추럴와인 덕후, 재즈 덕후라 한다.- 덕업일치, 입덕, 덕밍아웃.. 오늘날 덕후들은 소비의 주체가 되어 좋아하는 분야를 섭렵하고, 트렌드를 선두하며 추종자들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친다. 덕력을 잘만 어필하면 퍼스너 브랜딩의 핵심 요소가 되듯, 이제 덕력은 스펙이다.


충도 기존 의미보다는 많이 완화되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캐주얼한 관계에서는 "감성충이네!" 라며 상대만의 센시티브한 생각이나 취미를 거들어주지만, 오피셜한 자리에서는 멈칫하게 된다. 하기야 사전적 의미로만 따져보자면 벌레지 않나. 이 표현은 상황에 따라 비꼬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예컨대 SNS에서 활발하게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에게 SNS충이라 하면, 순수하게 그의 시선과 콘텐츠에 공감하고 열정에 감탄해 건넨 말이어도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실제 즐기는 태도 없이 '보여주기' 식으로 인증하거나, 허례허식이 지나친 과시형 콘텐츠만 올리는 사람들을 지적하는 사회적 관념이 얽힐 수 있기 때문이다. 편해지자고 부르는 건 좋지만, 상대와 상황에 따라 눈치를 볼 필요가 있겠다. 모든 표현에 있어 눈치는 필수템이다.



관심종자 씨앗,

발아하다


관심종자(이하 '관종')는 관심병 종자가 있다는 의미로, 타인에게 주목받고 싶어 하는 정도가 심해 사람들의 관심을 과도하게 끄는 병폐를 일컫는다. 신조어가 생겨나기 전부터 통상 '관심병'이라는 말로 쓰여왔다. 물론 공식적인 의학 용어는 아니다. 그렇다면 관종은 관심병자의 끝음절에 라임 맞춰 종자로 재탄생한 응용 사례일일 테다. 억세게도 초기의 관종은 종자라는 신분으로 씨가 발아한다는 드립과 함께 쓰였다. 정말 우리나라 사람들 말 갖다붙이는 덴 천재다. 영어권에서는 Attention Seeker, 일본에서는 かまってちゃん(카맛테쨩), 많은 유럽 국가에서도 관종을 부르는 나름의 명사가 있다고 한다. 관심병은 만국 공통이다.


Illustration by Hacci


사람이라면 대부분 타인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한다. 흔히 내향적인 사람은 타인의 주목을 꺼린다고 생각하지만 대개 그렇지 않다. 저마다 추구하는 관심의 종류나 정도가 다를 뿐, 내/외향 불문하고 타인에게 관심받고 싶은 마음은 매한가지다. 갓 태어난 아기는 부모에게 관심받고 싶어 울고, 유아는 유치원 선생님의 시선을 끌려 떼쓰고, 사회인들은 소속감 그 이상의 만족을 위해 관심을 필요로 한다. SNS의 근본도 여기에 있다. 욕구 이론을 떠올리면 다 이해되는 행동일지니, 매슬로우가 괜히 저명한 게 아니다. 현대인에게 인정 욕구가 얼마나 강하면, 급기야 현실을 넘어 가상세계의 자아까지 인정받고자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메타버스가 계속해서 주목받는 까닭이다. 어느 날 제페토를 보며 Gen Z 세대관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던 내게 지인은 말했다. 너도 큐플레이 하지 않았느냐고. 아하, 단박에 이해 완료.


적당한 관종은 귀엽고, 활발한 관종은 멋지면서도 아주 가끔 부담되고, 과한 관종은 버거울 때가 있다. 이해 가능한 정도를 넘어 어그로를 끌기 위해 허위사실을 유포하거나, 무시당할 만한 행동을 보이며 부정적인 반응을 즐기거나, 지속적으로 민감하고 자극적인 사안만 언급하거나, 경/중범죄를 저지르고선 개인 SNS에 자랑하듯 올리는 경우를 보면 경악을 금치 못한다.



흑역사의 이름으로

과거를 용서하지 않겠다


누구에게나 흑역사는 있다. 2 폭발하던 시기 하필이면 싸이월드가 아주 재밌을  뭐야. 태블릿 PC 보편화되지 않던  시절부터 사진첩 다이어리, 게시판넘나들며  그리 기록하는 데 안달났는. 애쓸수록 느는  검은 날의 역사뿐이었다.


흑역사는 어디서부터 등장했을까. 유래를 찾기 전까진 '검게 칠해버려 감추고 싶은 역사'가 아닐까 나름 추측해봤다. 놀랍게도 이 단어는 애니메이션 '건담'에서 등장한 고유명사다. 극중 세계관의 배경으로, 현 인류사가 있기 전 끊임없이 전쟁해온 어두운 과거사의 총체를 가리킨다. 어두운 과거는 덮어버리고 싶을 테니 아주 틀린 추측은 아니다.


피식대학의 시리즈 중 '05학번 이즈 백'에서는 05년도에 갇힌 사고와 행동으로 흑역사를 희화화한다. 아디다스 트랙탑과 비니에 푸마 스피드캣, 중절모와 십자가 목걸이, 본더치 메쉬캡과 왕버클 벨트, 구제 폴로셔츠에 리바이스 엔진스커트, 모토로라, 가르텐비어, 쪼끼쪼끼, 캔모아, 민들레영토, 밀리오레 댄스 배틀, DDR, 마지막으로 프리스타일의 Y. 캬, 어마어마한 흑역사다. 혹자는 이들의 과거 고증을 보고 추억과 동시에 자괴감까지 느낀다며 기억 폭행이라 한다. 그 시절 우린 역시 반쯤 미쳐있었다.


Illustration by Hacci


그 콘텐츠는 우리 모두의 '흑역사'를 현재로 끄집어냈고, 캐릭터마저 '오그라드는 중2병' 컨셉으로 설정했다. 신조어 총출동이다. 생각해 보면 앞서 말한 신조어 모두 2000년대 초반 쯤 나왔던 것 같다. 대체 이 시기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것은 순전히 뇌피셜이다.- 2000년대 초반, 그중에서도 2005-2010년을 떠올려보자. 일단 영화만 봐도 '연애사진', '클래식', '봄날은 간다', '시월애' 등 아날로그 감성의 서정적인 작품들을 만들던 충무로가 역변해(?), '그놈은 멋있었다', '늑대의 유혹' 같은 로맨틱 코미디를 킬링타임 식탁에 내놓았다. 시기적으로 인터넷이 보급화되면서 순수한 인간의 심리가 디지털에 반영되기 시작한 때다. 마음속에만 담아둔 말들, 친한 사람들에게만 편지로 혹은 구두로 옮기던 말들이 가차 없이 컴퓨터로 옮겨져 인터넷으로 퍼졌다. 싸이월드, 버디버디 같은 커뮤니티도 하나 둘 생겨나며 너무 많은 군상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필터링 되지 않은 감정에 과장까지 한 스푼 얹혀 쓰인 글들이 지금의 흑역사가 된 게 아닐까. 그러다 '감정 곧 내용'의 시기를 거쳐 점점 써도 될 표현, 자제해야 할 표현이 구분된 게 아닐까 하는 뇌피셜은 여기까지다.



감정일까 느낌일까

혹은 기분일까?


오그라드는 사람, 오타쿠, 관종, 흑역사를 마주할 때의 감정, 대체 뭘까?


하나, 어린아이는 느끼기 어려운 감정이다.

어린아이의 감정은 단편적이지만 개성이 강하다. 어른이 되어갈수록 한 가지 사건에 여러 감정을 느끼며, 각각의 감정들은 점차 개성이 약화된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이 떠오른다. 아동기인 주인공 라일리의 감정 캐릭터를 보면 서로 판이한 모습이다. 기쁨이, 슬픔이, 버럭이, 까칠이, 소심이는 각자 자신의 의견에만 충실하다. 감정 계기판의 크기도 상황에 따라 한 캐릭터가 전부 조작해버릴 정도로 극단적이다. 하지만 커갈수록 캐릭터의 모습이 엇비슷해진다. 비슷한 치장을 하고, 리더의 말에 따르며 협력하고, 감정 계기판도 다같이 조작할 수 있을 정도로 세밀해진다. 극단적인 모습은 종적을 감추고, 서로 뒤섞여 이 감정 저 감정을 복합적으로 느낀다. 복잡미묘한 감정을 단박에 이해하게 만든 실로 대단한 묘사다. 이 영화는 로버트 플루치크(Robert Plutchik)가 밝힌 '감정의 바퀴(Feelings Wheel)'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여덟 가지의 기본 감정이 섞여 또 다른 감정들이 만들어진다는 가설이다. -그 가설은 참고용일 뿐, 감정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수를 헤아리자면 끝이 없다는 부분도 함께 인지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둘, 정서라 할 수 있는 감정이다.

감정을 뜻하는 단어는 여럿이지만, 학술적으로는 좀 더 세밀하게 구분된다. 흔히 감정이라고 해석하는 'emotion'은 학술적으로 '정서'라 부른다. 정서란 어떤 외부 자극에 대해 보이는 주관적인 '느낌(feeling)'과 함께 관찰 가능한 행동, 상황에 대한 인지적 평가가 수반되는 복합적인 반응이다. 기분(mood)은 또 다른 의미다. 일반적인 정서보다 더 오래가며, 특정 대상이나 자극에 의한 반응이 아닐 수도 있다.


셋, 경향성과 선입견이 작용된 감정이다.

대체 감정이 뭐길래 이렇게 복잡하게 존재하는 걸까? 정서 치료에서 감정은 '빠른 정보 처리를 위해 생겨난 것'이라 본다. 이는 행동경향성을 뒷받침한다. 좋아하면 믿을 수 있고, 싫어하면 내게 해롭다 생각되며, 분노하면 나를 보호해야 한다고 느끼고, 슬플 땐 잃어버린 대상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행동 지시가 수반된다. '경향성'이라는 단어만 봐도 느껴지듯, 감정에 의한 행동 지시는 실제 많은 반례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일반화를 위해 '그런 경향이 있다'고 표현한다. 그런 의미에서 경향성은 강력하고 무섭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다양성을 하나로 묶어 판단해버릴 수 있는 것이다. 이중정보처리이론에서는 인간의 마음에 두 가지 시스템이 있다고 가정한다. 전체적인 맥락을 두고 직관적으로 판단하는 '선입견'을 이용한 첫 번째 시스템과, 맥락과는 별개로 합리적으로 판단하려는 '심사숙고'적인 두 번째 시스템이다. 대개 인간은 중대한 사건이 아니라면 심리적인 에너지를 적게 소모하기 위해 첫 번째 시스템으로 상황을 판단한다. 지레짐작과 왜곡이 일어나는 까닭이다.


세 가지 논리에 의거했을 때 '오글거림'은 복잡미묘한 감정이다. 그 감정은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받는 느낌에 인지적 평가가 동반된 정서다. 신조어를 쓰게 되는 상황은 우리의 경향성에서 나온다. 사회 학습으로 쌓아온 경향성으로 현상을 파악한다. 경향성을 이용한다는 건 달리 보면 선입견을 이용한 정보 처리일 수도 있겠다. 비약적 판단일 수 있겠으나, 이렇게 정리해보니 신조어의 흐름이 이해가 된다.



감수성의 변주,

표준으로 둔갑하다


흑역사는 달리 보면 고마운 기억이다. 과거에 기록된 어리숙한 말들 가운데 잊고 있던 순수성을 발견할 수 있다. 아 이렇게 간단한 거였지 참, 하며 과거에 남긴 기록에서 고민의 답을 찾기도 한다. 부끄러워 흑역사로 치부해버리고 만 그때 그 이야기는 사실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역사이자 자산이다.


헌데 우리는 소중한 추억을 흑역사로, 과몰입을 오타쿠로, 세밀한 감정 표현을 오글거린다는 말로, 인정받으려는 기본 욕구를 관종이라는 질책으로 무작정 막아버린다. 신조어로 감정 표현이 규제된 것이다. 표현해도 되는 감정과 눈총 받게 되는 감정의 기준이 생기고, 모두가 그에 맞게 엇비슷한 감정만을 노출한다. 감성도 마찬가지다. 표준에서 튀기만 하는 감성은 외면당하고, 어떤 감성은 좋아 보이는 취향 같은 후천적 요인과 묶여야만 개성이 된다. 으레 말하는 '개성 있고 입체적인 인간'이라 함은 사실 인간 고유의 영역보단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모습에 가까울 수 있겠다.


우리의 마음은 바쁘다. 조급한 마음에 순간적인 판단을 따른다. 이로 인해 상대적인 것들은 쉽게 매도된다. 조롱과 혐오가 만연해진 세상 속, 지금 우리에겐 따뜻하고 세심한 시선이 필요하다. 경향성을 절대적인 축으로 두고 판단하기 전에 상대가 지닌 고유의 감정과 감성을 먼저 이해해보자. -물론 너무 과해 본인의 인생을 망치거나 사회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은 자유겠지만- 쉽게 뱉는 말들에 성급한 단정이 있진 않은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표현할 때, 당신의 혀끝에 사려 깊은 품격이 더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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