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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무사 Dec 17. 2021

쿠바한인의 불꽃같던 독립운동 어떻게 가능했나

멕시코로 건너간 구한말 퇴역군인들의 반일 무력투쟁 정신과 쿠바 한인

올해는 쿠바 한인 이주 100주년이 되는 해다. 1921년 3월25일 멕시코 유카탄주에서 한인 288명이 마탄사스의 마나티항에 입항했다. 


한국 사회에서 보통 쿠바 한인에 대한 이해는 ‘1905년 4월 인천에서 조선인 1033명이 멕시코 유카탄 반도로 건너가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다 그보다 노동환경이 낫다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쿠바로 건너갔다’라는 식이다. 


좀 친절한 경우에는 쿠바로 건너간 해를 명기함으로서 유카탄 반도에서 쿠바로 바로 건너간 것이 아니라 16년정도 머물렀다 간 것이라는 점을 알게 한다. 


그러나 대개는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다 너무 힘들어 쿠바로 건너갔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만다. 따라서 유카탄 반도에서 쿠바로 건너간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이 멕시코에서 머무는 16년 동안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한 고려가 없다. 따라서 쿠바의 한인 이민사는 ‘박해받은 약소민족의 디아스포라사’에 그치거나 간혹 그들의 독립운동을 언급해도 평지 돌출식이 되기 쉽다. 


이민 100년이 다되도록 한국 사회는 여전히 쿠바 한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특히 이제는 전설이 돼 버린 ‘1925년부터 1945년까지 그들의 불꽃 같았던 20년 역사’는 여전히 우리 역사 바깥에 존재한다.


쿠바 한인의 역사는 그들이 떠나왔던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메리다 한인의 역사에서부터 되짚어 봐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1905년 4월 인천에서 멕시코로 출발한 1033명의 이민사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19세기 후반 미국의 맥코밀사가 말 대신 기계로 작동하는 밀 수확기를 발명했다. 이로 인해 밀 생산량이 급증하자 포대용 굵은 밧줄의 수요가 폭증했고 이것이 유카탄 반도의 에네켄 재배 급증으로 이어졌다. 


유카탄의 농장주 협회와 의회가 이민 브로커인 존 마이어스에게 의뢰해 해외노동자 이민을 추진했는데 그는 1904년 11월부터 1905년 1월 사이 황성신문과 대한일보에 농부 모집광고를 내게 된다. 이렇게 하여 모인 1033명 중에 대한 제국 퇴역 군인 200명이 포함돼 있었다. 바로 이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07년 일제의 간계에 의한 군대 해산으로 울분에 차있던 퇴역군인 200여명이 포함된 이민 행렬. 이것이 보통 얘기하는 멕시코 에네켄 이민사에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이면의 역사다. 그 외에는 소작인 잡역부 전직하급관리 양반 부랑아 걸인 등 다양했다.


1905년 4월 이들을 태운 화물선 일포드호는 약 40여일의 항해 끝에 5월13일 유카탄 반도의 에네켄 수출항 프로그레소에 도착한다. 유카탄의 주도 메리다는 이곳에서 35km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한인들은 이곳의 32개 농장에서 계약기간 4년 동안 노예노동에 준하는 혹독한 환경에서 에네켄 채취에 종사했다.


문제는 계약 기간이 완료되는 1909년 발생했다. 유카탄에 들어와 있던 일본인들이 한인 노동자들을 지배하려는 음모를 획책한 것이다. 마침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도산 안창호 선생 주도로 해외 한인 독립운동 단체를 총망라한 ‘대한인국민회’가 결성 중이었다.  


메리다 한인의 보호 요청을 받은 국민회 측에서 요원을 보내 농장 계약 만료 3일 전인 1909년 5월9일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가 창립됐다. 메리다지방회는 한인 사회의 단결과 권익 옹호 독립운동 지원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이주한인들에 포함됐던 퇴역군인들을 중심으로 1909년부터 3곳의 농장에서 병법 훈련이 진행했다.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이 있었던 1910년 본격적인 사관양성 기관인 숭무학교를 창설, 3년간 118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기도 했다. 일제에 맞서 독립전쟁이 벌어질 경우 언제든 뛰어들 준비를 한 것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17년 10월부터 1918년 8월까지 10개월간 에네켄 농장 노동자로 일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한 곳도 이곳이었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는 대한공화국 건설과 새 정부 조직 축하 경축식을 열고 그때부터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모금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당시 한인들은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수입의 20%를 독립자금으로 내어놓았다고 한다.


쿠바 한인은 바로 이 메리다한인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멕시코의 경제 사정이 안좋아 쿠바의 사탕수수 농장을 찾아 떠난 288명의 한인 중에 메리다지방회 회원이 42명이 포함됐다. 그들의 가족 95명을 더하면 137명이 메리다 출신이다. 당시 멕시코에는 메리다 말고도 코아트사코알코스지방회와 묵경지방회 등 대한인국민회에 속한 지방회가 더 있었으므로 독립운동과 직간접으로 관계가 있는 사람은 이 외에도 많았을 것이다. 


쿠바 한인 독립운동사의 대표적인 인물인 임천택 선생(1903년~1985년)도 메리다지방회 출신이다. 그가 1905년 인천에서 어머니와 함께 일포드선을 타고 유카탄에 온 게 2살 때였다. 1921년 쿠바의 마나티 항에 입항할 당시 그의 나이가 19세였으니 독립운동가로서의 그의 투철한 정신과 자세는 메리다지방회에서 형성됐다고 할 수있다.


288명의 한인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마나티 항구에 도착한 1921년 3월25일 공교롭게도 설탕 1파운드 가격이 22.5센트에서 3센트로 폭락했다. 에네켄 농장의 노예노동을 피해 쿠바까지 왔는데 졸지에 갈 곳이 없어진 것이다. 할 수없이 찾아간 곳이 나중에 한인들의 근거지가 된 마탄사스 핀카 엘 볼로 마을의 에네켄 농장이었다. 한인들은 이곳에 정착해 한인 마을을 이뤘다.


이때 메리다에서와 비슷한 일이 또 발생했다. 현지에 있던 일본 영사관이 한인들을 일본 신민이라 우기며 등록을 시도한 것이다. 60여명의 한인이 이에 강력 반발하며 1921년 6월14일 쿠바 한인의 공식 대표기구로서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의를 설립한다. 메리다지방회가 만들어진 과정이 쿠바에서 재현된 것이다. 


1921년 9월 마니티지방회가 만들어지고 1923년 3월 카르데나스 지방회가 만들어지면서 1923년 5월부터 쿠바지방회는 마탄사스지방회로 불렸다. 이들 지방회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를 통해 김구 주석의 상해임시정부와 연결됐다. 따라서 단순한 한인단체가 아니라 사실상의 정부 기능을 담당하는 자치기구이자 독립운동기관이었다. 


임천택 선생의 기록에 따르면 “마탄사스지방회는 의무금을 납부한 회원 30여명이 1945년까지 약 25년간 지방회 경상비 교육비 외교비 등으로 2만원 가까운 금액을 출연했고 1938년부터 1945년까지 8년동안 상해 임정에 1489원 70전을 독립운동 성금으로 납부했다"고 돼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1930년 2월부터 5월까지 광주학생운동 지지대회를 개최하며 3개 지방회 소속 100여명의 한인이 100달러의 특별후원금을 모아 보내기도 했다. 당시 시세로는 쌀 400 가마니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독립운동 자금 지원 외에도 민성국어학교, 진성국어학교, 흥민학교 등 우리 말과 글,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친구회’를 조직해 쿠바 관료들이나 현지인들에게 한국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설파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벌이자 참전을 고려하는 쿠바 정부를 설득해 한인들의 공동 참전을 도모하기도 했다.


한인이 쿠바에 건너간 1921년부터 엘 볼로 농장 해체로 한인회가 급격히 약화된 1945년까지 쿠바 한인의 삶은 조국 독립을 위한 불꽃같은 헌신의 삶이었다. 그 뒤 남북 분단과 쿠바혁명으로 그들이 뿌리로 삼았던 상해임시정부의 후신인 한국정부와 선이 끊어지고 후손들의 현지화가 계속 진행됐다. 이제 그들 1세대와 2세대의 독립투쟁은 전설이 됐다. 


당시 이들이 보내준 독립자금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는 김구선생의 백범일지에 소상히 기록돼 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동북3성에 250만, 러시아에 150만, 일본에 40~50만의 동포가 있으나 각각의 사정으로 기댈 수 있는 형편이 아니고 오직 미국본토와 하와이 멕시코 쿠바를 아우르는 1만여명의 동포 성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임을 솔직히 토로했다. 그들이 보내온 피같은 성금으로 임시정부를 꾸리고 윤봉길 이봉창 열사의 거사를 진행한 것이다. 33분의 쿠바 한인이 현재 정부에 의해 독립유공자로 추서돼 있으나 그중 20여분 후손들과만 연락이 닿았을 뿐이고 그 나머지 다른 이들은 자기 선조의 역사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쿠바의 한인을 단순히 에네켄 채취를 위한 디아스포라가 아니라 해외 한인 독립운동사의 관점에서 우리 역사에 정당하게 편입하자는 움직임이 비교적 최근에 일어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지난 2019년 1월 쿠바 현지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 진혼제를 쿠바한인회와 공동으로 주최한 국제코리아재단(이창주 상임의장 <쿠바한민족사>의 저자)) 측이 올해가 가기 전인 12월21일~12월31일까지 ‘쿠바 한인 디아스포라 100주년 기념 행사’를 갖는다. 


이창주 의장은 “2019년 3.1운동 100주년 행사 이후 각계에서 쿠바 한인 100주년 행사도 했으면 좋겠다는 주문이 많았다”라며 코로나와 쿠바 관광 시즌 등을 감안해 하반기에 행사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호세마르티문화원과 쿠바한인후손회 등이 협력기관으로 참여한다. 행사는 하바나와 마탄자스의 엘 볼로 마을 및 바라데로 등에서 기념식, 한-쿠바 경제 포럼,  숭모기림문화제 및 기림비 헌정식을 갖고 국내 참가자들과 함께 버스 2대를 대절해 하바나에서 산티아고 데 쿠바까지 쿠바 혁명과 한인의 숨결을 찾아 순례길에 오르는 것으로 돼 있다.(자세한 행사 내용은 

www.koreanglobalfoundatio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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