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2편을 쓰지 않았던 이유는 (1) 좀 귀찮아서, (2) 생각 정리가 잘 되지 않아서, (3) 내가 생각해온 '성공한 삶을 위한 노력'의 정의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의구심이 들어서, 따위의 이유들 때문입니다. 우선 어찌 되었든 이 글을 매듭 지어야 할 것 같아 깊게 생각하지 않고 머릿속에 떠다니는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1. 2016년 5월
2016년 봄, 저는 K로펌의 staff으로 입사했습니다. 광화문에 입성해, 때 빼고 광내며 겉보기에는 진짜 커리어우먼처럼 차려입고 다녔습니다. 구조적인 문제인지, 제 능력의 부재인지 저는 그곳에 적응하기가 좀 어려웠습니다. 같이 일했던 팀원들, 또, 업무적으로 컨택한 비서들은 하나 같이 국내 상위 10위권 대학이나 해외대학을 졸업한 분들이었습니다. 입사 시에 영어 면접을 깐깐하게 보니까 당연하게도 영어능통자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스펙과는 정반대로 처우가 좋지 않았고, 마치 계급사회를 체험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당연하게도 프로(변호사, 회계사 등)에게 동료로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가끔은 staff, 비서가 분명 uneducated person일 거라 생각해 무시하듯 발언하거나 대놓고 '대학은 나왔냐'라고 묻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앞구르기, 뒷구르기를 하며 봐도 자격지심을 느끼는 게 당연한 곳에서 공부해본 바 없는 전문가 영역의 일을, 무시받지 않을 정도의 수준으로 하는 것은 생각보다 고됐습니다. 입사 초엔 도서관에서 세법, 자본시장법 등 여러 법률에 대한 공부를 했을 정도로요.
K로펌에서 3년을 일했는데, 솔직한 얘기로 업무를 포함한 90%의 것들이 불만족스러웠고, 퇴사 직전에는 울면서 회사를 다녔습니다. 그래서 입사 후에도 여러 기업에 지원 서류를 내고, 리트 시험을 치고, 대학원을 알아보고, 무튼 별안간 탈출 방법을 많이도 구상했습니다. 화장실도 겨우 갈 정도로 빽빽하게 채운 일과시간과 주 2회 야근은 디폴트인 곳에서 벗어나 집에 돌아오면, 저녁 이후 무언갈 준비하는 게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이마저도 알량한 핑계로 만드시는 대단한 분들도 다수 계시지만, 결국 저는 어느 하나 제대로 성취하지 못한 채로 퇴사를 결정하게 됩니다.
6년 전 기준으로 초봉 4천만원으로 입사해서 3년을 빠듯하게 모았는데, 퇴직금을 포함해서 수중에 남은 돈은 8천만원이었습니다. 이마저도 긴축재정, 엄카찬스 등 갖은 수단을 동원한 결과였고요. 그러다 내 집 마련의 꿈에 대해 어렴풋이 설계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에 아파트 한 채를 10억으로 잡고, 상승될 연봉까지 고려해 3년 평균 1억을 모은다고 생각하면, 앞으로 30년은 꼬박 일해야 한 채를 온전히 내 것으로 가질 수 있겠더군요. 이것도 5년 전 기준이니, 현재의 미칠듯한 부동산 가격 상승은 고려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앞길이 막막해졌습니다. 친구에게 제 계산을 얘기했더니 돌아온 답은, "야, 우리 세대는 집을 '사는' 세대가 아니야, '물려받는' 세대지." 이 친구의 예상치 못한 말에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2. 2019년 1월
1월 말에 퇴사를 하고 보름쯤 쉬다가, CPA 시험을 준비해보고자 종로에 있는 경영학원에 들어갔습니다. 이쪽 공부는 난생처음이고, 뻔히 알고 시작한 스스로의 선택이었으면서도 딱 봐도 저보다 대여섯 살은 어린 친구들과 공부를 하는 게 조금은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게 동력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진짜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공부했습니다. 이때 망가지 등과 허리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아프네욤..
공부했던 1년이 좀 넘는 기간 동안 기억에 남은 건 없습니다. 아니 지식 외, 무언갈 추억할 저장공간이 뇌에 남아 있다는 게 사치죠.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오전 8시부터 오후 11시까지, 2번의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장장 11시간의 공부를 1년 동안 하다 보면, 잠자는 시간이 제일 좋습니다. 근데 또, 일어나서 다시 루틴을 반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잠드는 게 무섭기도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됩니다. 무튼 이 시기를 여차저차 보내던 중 큰 수술을 하게 되어, 자격증 시험공부를 접게 되었습니다. 내 역사 속, 못돼 처먹은 인간들의 기억을 굳이 꺼내어 되짚어 보기 싫은 것처럼, 이 기간은 짧게만 읊고 싶습니다.
3. 2020년 6월
1년간 공부한 게 이렇게 쓰이게 될 줄을 몰랐지만, 금융공기업에 합격해버렸습니다. 어찌 되었든 당시 제 기구한 상황을 구제해 준 곳이라, 합격 발표를 본 순간 정말 제가 알고 있는 모든 신께 감사 인사를 드린 것 같습니다. 대학교 다닐 때 하도 여기저기서 금공이 '신의 직장'이라고 하질 않나, 금공에 입사 준비를 하는 것 자체도 나름의 스펙이 되는 분위기였던 터라 기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입사 이후 2년을 꽉 채워가는 지금, '신은 직장을 다니질 않는다'는 우스갯소리를 제가 하고 있습니다.
4. 2021년 12월
K로펌에 있는 동안 만난 모든 분들이 별로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중 제가 존경하는 회계사 한 분과 연말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젊은 나이에 대기업 사외이사가 되셨다는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사외이사가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기업의 회장님과도 가까워졌고, 해당 기업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반의 대기업 현안에 대해 속속들이 듣게 된다고 하시네요. 그중 인상 깊었던 것은 요즘 대기업들은 해외에 본사를 세우는 걸 고려한다는 점입니다. 그니까, 예를 들어, 삼성전자가, SKT가 우리나라 수원, 종로에 본사를 둔 게 아니라, 런던, 터키 이런 데에 본사를 둘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제게는 과히 충격적인 얘기였습니다. '아니,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