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 상담에서 마주하는 ‘본질’(1)
요즘 교실의 현실은 이전과 다르다.
작은 갈등 하나가 곧바로 학폭 신고로 번질 수 있고,
아이의 말 한 문장이 그대로 가정의 불안을 자극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교사가 서게 된다.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면서,
두 아이의 입장과 두 가정의 감정이 모두 향하는 자리 한가운데에.
아이와 아이 사이에서 벌어진 ‘복잡한 진실’을
그대로 옮길 수도 없고,
단순화해서 말할 수도 없다.
그래서 교사는 결국
그 사건을 풀어내기보다
그 사건을 둘러싼 마음들을 하나씩 만지게 된다.
학부모와 통화를 하면
사건의 구체적 사실보다 먼저 등장하는 건
대부분 “아이의 마음”이다.
억울했다는 말
무시당했다고 느낀 표정
예민한 부분이 건드려졌다는 이야기
작년부터 조금씩 불편했던 관계
통화를 할 때마다 느껴지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일보다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시간이 먼저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귀가 향하는 곳도 사건 자체가 아니라
어떤 부분이 불편했는지
그 불편함이 이번 한 번의 일에서 비롯된 건지
아니면 이전의 경험과 겹쳐지면서 더 크게 느껴지는 건지
그 ‘걱정의 구조’를 듣게 된다.
그걸 듣고 나면,
부모가 바라는 건 어떤 단정이나 판정보다 결국은
“우리 아이의 마음이 외면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물론 교사 입장에서는
‘우리 아이가 마음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 마음까지
함께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 버겁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래서 교사들 사이에서는 그런 말을 두고
농담 반, 냉소 반으로 이야기하게 되는 순간도 있다.
“요즘 부모님들 너무 예민하다”라는 말이
피곤함과 함께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조금 더 들여다보면,
아이의 마음이 상한 것만이 아니라
그걸 지켜본 부모 본인의 마음이 함께 상해 있는 경우가 많다.
자기 아이가 겪은 일을 듣는 순간,
“우리 아이가 또 이런 일을 겪게 되면 어떡하지?”,
“우리 아이가 무시당하는 건 아닐까?”,
“내가 뭔가 잘못 키운 건가?”와 같은 두려움이
말로는 잘 드러나지 않은 채 뒤에 남아 있다.
어떤 부모는 그 두려움을 곧바로 분노로 쏟아내기도 하고,
어떤 부모는 한참을 숙고한 뒤에
“우리 아이가 이런 부분이 걱정되는데,
이번 일이 겹쳐져서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
앞으로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태도로 연락을 주기도 한다.
“그래도 교사는 부모의 마음을 다 받아줘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경계를 지켜나가는 부분에 대해서도 하나 하나 이야기 해 보겠지만,
‘이렇게 해야 한다’는 당위로서 움직이면 결국 ‘화’가 나기에.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싶은 만큼 하면 된다.
상담에서는 사실과 감정이 시간 순서대로 나오지 않는다.
아이의 말은 보통 이렇게 흘러온다.
“그 친구가 이렇게 했어요 → 그래서 너무 화났어요 → 그래서 일부러 한 것 같았어요.”
그리고 부모의 말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랬다면 장난이 아니라 문제가 있는 행동 아닌가요?”
이 흐름은 자연스럽고 이해되는 반응이지만,
사실·감정·해석이 한꺼번에 섞여 있는 상태다.
교사가 이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 적으면
“그랬다면 가해–피해가 이렇게 나뉘겠구나” 하는 단정으로 이어지기 쉽고,
반대로 곧바로 “그건 아닐 것 같습니다”라고 정정해버리면
부모가 들고 온 감정도,
그 감정의 출발점이 되었던 아이의 마음도
어느 쪽도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한 채 남는다.
그래서 대화가 멈추지 않도록,
사실과 감정을 조금씩 분리해서 놓아보려 한다.
“그때 아이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제가 잘 들었습니다.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두 아이에게 모두 한 번 더 확인해보겠습니다.”
“말씀 들어보니 아이가 느낀 마음이 굉장히 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정확하게 상황을 살펴보고, 정리해서 다시 말씀드리고 싶어요.”
이런 말은 “이렇게 말해야 한다”는 매뉴얼이라기보다,
사실과 감정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그 자리에서
대화가 한쪽으로 쏠려 버리지 않도록
교사가 자기 자리를 잃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나오는 문장에 가깝다.
사실과 감정이 동시에 밀려들어오는 자리에서,
누구의 편도 들지 않은 채
대화를 끊지 않고 이어가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갈등 상황에서 어른들은 원인을 알고 싶어 하고,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어 한다.
그런데 교실은, 학교는
아이들이 누가 옳고 그른지를 가르기 위한 곳이라기보다,
서투른 말과 행동 속에서
조금씩 관계를 배워가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그걸 위해 제도적으로 마련되어야 할 것들에 대해 노력해주시는 분들도 많다.)
교사로서는 이 점을 부모도 함께 볼 수 있도록,
“지금 벌어진 일”만이 아니라
“이 아이들이 어떤 관계 안에서 자라고 있는지”까지
조금씩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통화 속에서
누가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를 단정하는 자리로 서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이런 고민을 붙들게 된다.
두 아이가 이 일을 지나서도 같은 교실에서 덜 어색하게 지낼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이번 일을 통해 각자에게 어떤 과제가 있는지를 한 번쯤 짚어볼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집과 학교가 그 배움의 과정을 어떻게 나누어 맡으면 좋을까.
그 고민을 부모와 나눌 때, 이런 말들을 건네볼 수도 있다.
“이번 일을 누구 한쪽 잘못으로 딱 정리하기보다는, 두 아이가 이 일을 지나서도 같은 반에서 덜 불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무엇을 도와야 할지 함께 생각해보고 싶어요.”
“각자 아이가 이번 일을 통해 무엇을 한 번 배워보면 좋을지, 집에서는 어떤 말을 건네주시면 좋을지, 학교에서는 제가 어떤 부분을 더 살펴보면 좋을지 같이 나눠봤으면 좋겠습니다.”
“한쪽이 완전히 잘못이고 한쪽이 완전히 피해자인 구조로 보기보다는, 두 아이가 각자 이번 일을 계기로 ‘앞으로는 이렇게 해보자’ 하는 지점을 하나씩 갖게 되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어쩌면, 상대 학생의 잘못으로 사건이 정리되고
그 아이에게 어떤 조치가 취해진다 해도
우리 아이가 삶에서 풀어가야 할 과제들
예를 들어
관계에서 불편함을 어떻게 표현할지,
싫은 상황에서 자신의 경계를 어떻게 세울지,
상대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할지와 같은 문제들은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다.
그 과제가 남아 있는 한, 상황과 상대만 달라질 뿐
비슷한 마음의 상처가 다른 장면에서 반복될 가능성도 함께 존재한다.
그래서 어떤 통화에서는
“이번 일을 통해, 자녀가 좀 더 표현력을 키울 수 있도록
가정에서는 이렇게 도와주세요, 학교에서는 이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말씀드리기도 한다.
부모라는 자리는
당연히 “내 아이”에게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다.
그건 너무나 자연스럽고, 그래서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다.
다만 우리가 동시에
이 사회의 ‘어른’이라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같은 교실에 서 있는 두 아이 모두를
조금은 더 넓게 품고 보는 눈도
함께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 아이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자라는 또 다른 아이도
이 일을 통해 조금은 배우고 변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조금씩 만나게 될 때
교사의 언어도,
부모의 언어도,
조금은 덜 날카로운 방향으로
길을 잡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