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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 Oct 31. 2024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음지에서 양지로

미술관이 된 옛 건물 11

2023년 개봉해 천만 관객을 돌파한  김성수 감독의 <서울의 봄>은 관객들로 하여금 뒷목 잡게 만드는 장면이 많다. 전두환과 하나회가 의기투합해 벌인 12.12 군사 반란자들의 쿠데타를 막을 수 있던 골든타임을 놓치는 장면도 속 쓰리지만 가장 혈압이 오르는 건 따로 있다.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주동자들이 단체사진을 찍는 모습을 재현한 마지막 장면이다. 스틸컷으로 처리된 단체 사진 위로 향후 이들이 얼마나 떵떵거리고 잘 살았는지 자막이 나오고 객석 곳곳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영화 <서울의 봄> 단체사진 장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최악의 사익 단체인 하나회가 쿠데타 성공 기념으로 1979년 12월 14일 사진 찍은 곳.  현재 소격동 165번지에 위치한 국립현대미술관(이하 국현) 서울관이다.


원래 이 건물은 1928년 개원한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의원의 외래 진찰소 건물이었다. 본관은 간송미술관을 설계했던 한국 최초의 근대 건축가 박길룡(1898~1943)이 설계했다. 1933년 3층 규모로 증축했는데 해방 이후에는 서울대 의과대학 제2부속병원으로 사용되었다. 넷플릭스 시리즈 <경성크리처>에서도 CG로 복원한, 이 건물과 닮은 병원이 등장한다.

 한국 전쟁 중 육군통합병원이 되었다가 1971년부터 국군기무사령부(이하 군 기무사) 본관으로 줄곧 사용되었다. 영화 <서울의 봄>의 전작처럼 여겨지는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도 이 건물이 나온다. 10.26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을 맞고 후송된 곳이 여기였다. 기무사 바로 옆 국군병원에서 박정희의 시신이 검시되었다.


군 기무사는 이렇게 37년간 소격동 알짜배기 땅을 점유하고 있었다. 일반인들은 얼씬도 할 수 없었고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고 싶지 않을 정도로 음습한 곳이었다.  2008년 기무사는 과천시 주암동 새 청사로 이전했고 같은 해 등록문화재 제375호로 지정되었다.


2009년 빈 공간이 되어버린 이곳에서 미술 축제가 열렸다. 100여 명의 아티스트들이 모여  “플랫폼 인 기무사”라는 프로젝트로 회화, 비디오 아트, 공연, 공공미술을 선보였다. 


당시 반 세기 넘게 일반인 출입이 금지된 곳에 대규모 전시가 열렸다는 소식에 많은 관람객들이 몰렸고 연일 화제가 되었다. 아직 리모델링 전이라 칸칸이 방으로 나뉜 공간에 주로 설치미술과 영상물이 선보였고,

건물 옥상에서 바라본 경복궁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디카로 사진을 많이 찍어 놨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찾을 수가 없다.

2013년 개관전에 선보였던 서도호 적가의 <집>

그때 전시된 작품은 기억나는 게 없지만 온갖 고문과 인권침해가 자행된 지하실을 비롯해 으스스한 분위기가 공간마다 서려 있는 것 같아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후 이 건물은 4년 간의 리모델링을 마치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 재탄생했다.

일제 강점기 때 재판소였던 덕수궁길 서울시립미술관(2002년) 개관에 이어 우리도 이제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접근성 좋은 미술관을 하나 더 가지게 되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은 88 올림픽 때문에 국가에서 어쩔 수 없이 세운 현대미술관이었는데 접근성이 너무 떨어져 큰맘 먹고 가야 했다. 현재 국현 과천-덕수궁-서울관을 연결하는 무료 아트 셔틀도 운행되고 있다. 물론 하루에 국현 세 곳을 다 본다는 건 힘든 일이겠지만.


군 기무사가 이전하는 바람에 현재의 자리에 둥지를 튼 국현 서울관 덕분에 원래 갤러리들이 점점이 모여있던 소격동 일대에 미술관 투어가 가능해졌다.

안국 역에 내리면  제일 먼저 과거 풍문여고 자리였던 곳에 조성된 공예박물관이 눈에 띈다. 감고당길이나 윤보선길을 따라 국립현대미술관 쪽으로 가면 크고 작은 수많은 갤러리들이 클러스터를 형성한다. 국현 서울관에서 전시를 보고 나와 삼청동 쪽으로 진입하면 학고재 갤러리와 바로 옆 국제갤러리로 이어지면서 사진미술관인 뮤지엄한미 삼청까지 둘러볼 수 있는 동선이 생겨났다.


2000년대 초반과 비교해도 서울의 갤러리와 미술관 인프라는 눈 부시게 발전해 이젠 덕수궁과 함께 전 세계인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그중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대한민국 동시대 미술이 모여있는 보물창고나 다름없다.  


20세기 초 서구 미술이 우리나라에 착륙한 후 한국의 현대미술 역사는 길다고 할 수 없지만, 이젠 K아트란 용어도 생기고 전 세계 유명 미술관에서 한국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 위상이 높아졌다.


일본수도육군병원으로 지어졌고 한국 현대사에서 용서받지 못할 일을 저지른 자들이 기념사진을 찍던 음지에서 양지바른 미술관으로 바뀐 국현 서울관. 100년 넘게 높은 담장들로 둘러싸여 들여다볼 수 없었던, 미술관 옆 ‘열린 송현’ 녹지광장과 더불어 볼 때마다 뿌듯해진다.  

기무사 터에서 발견된 조선시대 종친부 건물도 복원되어 미술관과 상생 중이다.


매년 이맘때쯤 동시대 한국미술 대표작가 4인의 신작과 작품세계를 선보이는 ‘올해의 작가상’이라는 이벤트가 벌어진다. 요즘 화제의 JTBC 드라마 <정년이>의 소재가 된 ‘여성국극단’이 화제다. 2018년 국현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한 정은영 작가가 ‘여성국극’을 소재로 한 영상작품을 선 보이며 국극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진 덕분이다. 얼마 전 2024 오늘의 작가상 후보들이 공개되었다. 서울의 가을은 소격동에서 더 깊어지고 풍요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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