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 언어와 사적 언어, 그리고 리터러시라는 '폭력'
1. 과거의 일을 기억하는 것은 단순한 정보 인출(retrieval)이 아니라 현재 시점에서 사건을 재조합(recollection)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은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잘 포장해서 냉장고에 넣었다가 시간이 지난 후 꺼내는 일이 아니다.
2. 여기에 언어의 매개라는 변수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릴 적 기억을 얼마 지나지 않아 기술하는 것과 몇 년 후 기술하는 것, 나아가 수십 년 후 기술하는 것은 어휘와 문법, 내용구조 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3. 구어로만 진술했던 기억과 정성껏 글로 담아내 본 기억도 다른 강도와 점성, 빛깔을 갖게 된다. 다중언어구사자의 경우라면 실제로 경험에 동원되었던 언어와 이를 기록한 언어 사이의 복잡한 관계가 영향을 미칠 것이다.
4. 당연히 사진으로 남은 기억과 오디오로 남은 기억, 비디오로 남은 기억은 다르게 각인된다. 향기나 온도, 압력이나 혈압과 체온 변화 등 언어로 구체화하기 힘든, 다시 말해 사회적으로 언어화되는 비율이 낮은 요소가 기억의 핵심을 이룰 때에는 시각요소 또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5. 이와 같이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어떤 기억은 희미해져 언어의 그물로 포획할 수 없게 되어버리지만 반복적으로 언어화된 기억은 때로 감정과 관계와 디테일을 더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실제 감각경험과 언어로 코드화된 경험 사이의 경계를 구획짓기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6. 해당 경험의 언어화에 동원된 형태소, 어휘, 은유, 문법 등은 오로지 그 경험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특정 경험과 특정 언어 간의 연합은 다른 경험들과 다른 언어들 간의 연합과 복잡한 네트워크로 연결된다.
7. 중요한 것은 그 언어 중 많은 부분이 사회문화적이고 정치적인 담론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경험을 언어화할 때에는 언제나 공적 언어와 사적 언어의 교섭과 상호침투가 발생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은 개인적이고 인지적이기도 하지만 사회적이고 담화적이기도 하다.
8. '순수한 나만의 언어' 따위는 없다. 동시에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언어'도 없다. 당신의 언어는 '우리'의 언어이지만 당신의 몸을 관통한 말이다. '우리'의 언어는 당신의 언어와 거의 같지만, 당신의 생애에는 닿을 수 없는 말이다.
9. 삶과 말을 잇는 일을 리터러시라고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다른 삶의 궤적과 몸맘의 다양성을 받아 안아야 한다. 이것이 없다면 리터러시는 합법적 폭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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