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 혹은 표현과 내압의 변증적 엮임
'빠르고 효율적인 글쓰기'를 약속하는 생성형 AI는 기실 글쓰기의 본령을 배반합니다. 글을 쓰는 이유야 맥락과 목적, 주제와 청자 등에 따라 달라지지만, 글쓰기는 단지 의사소통의 수단으로만 기능하지 않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 쓰기와 사고는 서로 생각을 주고 받으며 변증적 변환 과정을 거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필자는 쓰기를 통해 사고를 성찰하고, 검증하고, 변화시키고, 때로는 과감히 무너뜨립니다. 결국 글을 쓰기 시작할 때와는 다른 생각의 지평에 다다르게 됩니다. 정서적이며 사회적인 변화가 수반되기도 합니다.
글쓰기는 단지 생각의 표현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끈질기게 생각과 씨름하고, 다른 이들의 생각을 헤아림과 동시에, 때로 끝까지 자신을 몰아 부치는 작업에 가깝습니다.
결국 '빠르고 효율적인 글쓰기'는 복잡다단하며 역동적인 내면의 사고를 실질적으로 소거함으로써 소통의 생태계마저 빈약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메시지의 신속한 교환으로 삶의 가장 중요한 미션을 수행했다고 믿는 착각이 마음의 디폴트가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이러한 위험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빨리 써서 뭐 하게요? 그렇게 쓰는 과정에서 당신의 생각과 마음은 어떻게 변했나요?'
"글을 단지 표현(ex-pression; 밖으로 밀어내기)으로 생각하는 것의 한계는 명확합니다. 글쓰기가 그저 생각이 두뇌 밖으로 탈출하는 과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글이 되는 순간 우리는 글을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글은 우리를 노려보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글이 사고과정에 개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저는 '내압(in-pression)'이라고 부릅니다. 외부에서 내면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글쓰기는 이 두 과정 즉 ex-pression과 in-pression이 끊임없이 교섭하는 과정입니다. 끄집어 내는 일임과 동시에 끄집어 낸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 일. 이 두 과정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엮여 돌아가는 것입니다.
생각을 정리하고 쓰는 게 아닙니다. 단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쓰는 것만도 아닙니다. 생각을 내어놓고, 검토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쓰는 것입니다. 손끝에서 나오는 텍스트와 머리 속 사고과정이 끊임없이 교섭하고 상호작용하는 과정, 보이지 않는 생각의 흐름이 보이는 텍스트가 되고 이것이 다시 사고의 재료가 되는 과정, 그 전부가 쓰기입니다. 이런 면에서 쓰기는 잡히는 것과 잡히지 않는 것을 엮어내는 신비한 도구이기도 합니다."
#생성형ai와삶을위한리터러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