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아라 그리고 싸워라
1.
어느 따뜻한 봄날 아기 오리 여섯 마리가 알을 깨고 태어났습니다. 먼저 태어난 다섯 마리 오리는 모두 다 자그마하고 보송보송했는데 마지막에 태어난 커다란 새끼 오리는 어딘가 생김새가 조금 달랐습니다. 다른 새끼 오리들의 3배나 되는 몸집에 색도 거무튀튀했습니다. 그러나 크기가 크건 작건 색이 어떻든 엄마 오리에게는 모두 소중한 새끼들이었습니다. 개구리가 청량하게 울고 연못가에 물풀들이 탐스럽게 부풀어가는 봄날이었습니다.
엄마 오리는 새끼들을 위해 열심히 벌레를 잡아 먹이고, 둥지 안을 치우느라 하루하루가 바빴습니다. 새끼들이 배불리 먹고 잠시 낮잠을 자면 그제야 엄마 오리는 늦은 첫 끼니를 허겁지겁 때웠습니다. 어느 날 엄마 오리는 둥지 정리를 하다 오래된 책 속에서 낡은 사진 한 장을 발견합니다. 엄마가 되기 전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던 자신과 그 옆의 옛 친구...
엄마라고 불리기 전 오리는 꿈 많은 소녀였습니다. 하늘을 누비며 세계를 여행하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것. 그리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싸우는 것. 이 모든 것이 오리와 친구의 꿈이었습니다. 오리는 친구를 떠올립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새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새였던 친구, 그러나 친구의 외모보다는 언제 어디서나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던 정의롭고 치열했던 그녀의 삶의 태도가 더욱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친구 생각에 오리는 찔끔 눈물이 납니다.
2.
“엄마, 우리 아빠는 어디에 있어요?”
셋째 오리는 오늘도 오지 않는 아빠의 행방을 물어봅니다.
“으이그, 야 우리한테 원래 아빠는 없다고 몇 번을 말해?”
“아냐, 옆집 할머니가 그랬어. 세상에 아빠 없이 태어나는 애들은 없다고.”
“셋째야. 그럼 너희들도 아빠가 있었지. 있었고말고. 하지만 지금은 아주 먼 곳으로 아빠는 떠났어.
언젠가 너희들이 다 자라고 나면 어딘가에서 만날 수 있을거야.”
형제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막내는 슬금슬금 자리를 피합니다.
그런 막내를 따라 넷째 오리가 조용히 따라 갑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야. 아무것도”
“뭔데, 말해봐.”
“네가 보기에도 내가 좀 다르게 생겼지? 엄마는 아니라고 해도 물에 비춰 보기만 해도 봐봐.
너랑 내가 얼마나 다른지.”
“그게 왜? 어차피 세상에 똑같은 오리는 없어. 첫째 오빠 발 봤어? 물갈퀴가 얼마나 이상하게 생겼는데. 둘째 언니 엉덩이 깃은 또 어떻고. 어차피 우리 형제들 여섯, 다 달라. 얼굴도 털도, 조금 더 다르다고 크게 이상한건가?”
“있지, 너만 알고 있어. 나는 오리가 아니야.”
3.
우당탕탕. 쨍그랑!!!
새끼들을 위해 따로 만들어 준 아지트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납니다.
형제들끼리 싸움이라도 난 건지 아지트 안은 온통 엉망이고 첫째와 막내 꼴이 말이 아닙니다.
“너네 이게 지금 무슨 짓이야?”
“엄마, 우리가 왜 오리도 아닌 남이랑 같이 살아야 돼?”
“너 그게 무슨 소리야?”
“엄마, 우리도 눈이 있고, 듣는 귀가 있어. 쟤 막내가 정말 우리랑 같은 오리야?
정말 우리 형제야? 엄마가 낳은 자식 맞아?”
철썩, 엄마는 장남의 뺨을 세차게 후려치고 막내를 데리고 밖으로 나옵니다.
“너 형이랑 왜 싸웠어?”
“엄마, 저 다 알고 있어요. 제가 오리가 아니고, 엄마 친자식도 아닌걸.”
“......”
“꿈에 저를 낳아준 엄마가 계속 찾아와요. 아주아주 커다랗고 아름다운 하얀 샌데
슬프게 저를 보면서 엄마가 울어요. 무슨 말을 할 것 같은데 그 말을 듣기 전에 꿈에서 매번 깨요.
그 꿈 때문에 어렴풋이 알게 됐어요. ”
“막내야. 네가 오리든 아니든 너는 엄마 아들이야. 그건 변하지 않아. 하지만 네가 알게 되었으니 진실을
말해 주는 게 맞겠지.”
“....”
“너는........백조야! 꿈에서 봤다는 그 커다란 새, 네 엄마 맞아. 그리고 내 친구기도 하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고 사랑했던 내 친구. 너는 그 친구의 아들이야.”
“백조요?”
“응. 백조. 나와 네 엄마는 아주 오랫동안 같은 꿈을 가지고 함께 싸워 간 동료이자 동지였어.
네 엄마는 내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새였어. 새들의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
새들이 더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 마지막까지 싸웠단다.”
“엄마는..... 전사였군요...”
“그래. 네 엄마가 언젠가 너에게 줄 수 있는 날이 오면 전해주라고 남긴 메모가 있어.
이제 줄 때가 된 것 같아.”
4.
사랑하는 내 아이야. 네 날개는 하늘을 날기 위해 있다는 걸 잊지 말거라.
날아라. 거기가 어디든, 내가 같이 있을거야.
지지 말고 싸워라. 꼭 이기지 못하더라도 싸워라!
막내는 엄마 오리가 꼭꼭 간직해둔 메모를 읽고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엄마의 품이 그립고 또 그리웠습니다.
엄마가 꾸었다는 꿈이 너무도 커서 이 연못이 작게만 느껴집니다.
‘그래, 나도 이제 떠날 때가 된 것 같아!’
막내는 둥지로 돌아가 잠든 엄마와 형제들의 얼굴을 보고는 눈으로 작별인사를 합니다.
스르르 나가는데 엄마 오리가 부르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립니다.
“막내야. 우리 아들, 사랑한다. 언제나 잘 챙겨먹고 건강해야 돼. 힘들면 어느 때고 돌아와”
“엄마. 사랑해요. 그리고 감사합니다.”
5.
막내는 달빛 고요히 내려앉은 연못으로 나왔습니다. 조심스럽게 발을 움직여 헤엄쳐갑니다.
물풀이 우거진 연못의 정 가운데를 지나 달빛이 비추는 길을 따라 계속 나아갑니다.
어느덧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넓은 강가에 다다릅니다. 고요히 자신의 모습을 강물에 비춰 봅니다.
꿈에서 본 엄마의 모습과 똑같은 새하얗고 우아한 새가 거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새는 천천히 날개를 펼칩니다.
달빛 부서지는 밤하늘에 아름다운 백조 한 마리가 훨훨 날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