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시대에 무슨 전통이랄 게 있겠습니까.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거지요. 전통보다는 매번 새로워지는 시대에, 내 한 몸뚱이 맞춰 나가기도 쉽지 않은 때 아닙니까. 요즘 저희 외할아버지도 스마트폰을 배웁니다. 그래서 가끔 전화로 제게 이것저것 묻곤 하세요. 너는 무슨 메모 어플을 쓰냐. 쿠팡 써봤는데 좋더라. 넌 어디 거 쓰냐. 와이파이가 됐다 안됐다 하는데 공유기 문제냐. 그러면 저는 네, 전 네이버 쇼핑 써요. 할아버지. 메모도요. 전 그냥 네이버로 다 통일했어요. 공유기는 새로 사시는 게 좋겠어요. 합니다. 사실 외할아버지가 그런 쪽으로 저보다 더 잘 아십니다. 제가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어플을 깔고 비교해보면서 이것저것 물으시는데 당혹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사실 전 뭐가 좋은지 잘 모르거든요. 관심도 없고.
그렇게 세련된 외할아버지한테 물려받은 물건이 있습니다. 제가 매일 하고 다니는 금반지. 사람들은 이 반지를 보며 모두 얼마 짜리냐, 진짜 금이냐 물어보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전 차오르는 화를 감추느라 바쁩니다. 이게 24k든, 18k든, 뭐가 중요합니까? 지금 이게 수십만 원 짜리든, 몇만 원 짜리든 뭐가 중요합니까? 외할아버지가 젊었을 적 하고 다녔던 금반지인데. 이 반지를 끼고 다니면 외할아버지의 젊은 시절이 그려져서 좋습니다. 사실 사진으로도 본 적 없고, 그냥 제 마음대로 하는 상상이지만, 그런 마음을 갖게 하는 것 자체로 소중함이 느껴져서 좋습니다. 액세서리의 값어치는 단순 가격이 아니라 준 사람의 마음이, 그리고 지닌 사람의 이모저모가 담겨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약간 빛이 바래고 흠집도 많이 난 이 금반지가 다른 번쩍번쩍 빛나는 금반지들보다 좋습니다. 아무리 비싼 금반지와 바꾸자고 하여도 바꾸기 싫습니다.
또 제가 아끼는 물건이 있다면, 어머니가 준 샤프가 있네요. 1990년 독일이 통일되기 전, 서독에서 만든 물건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신기하지만 이걸 갖고 있으면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옛 모습이 생각나는 것 같아 좋습니다. 그녀의 젊은 시절, 아마 이 샤프를 가졌을 즈음엔 이걸 저에게 주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녀의 아버지인 저의 외할아버지도요.
이런 걸 보면 참 신기해요. 가족이란 게 뭐길래. 자신의 과거마저 전해주느냔 말이죠. 그리고 그걸 별거 아니라는 듯이, 조그만 물건으로 툭 내어주는 것을 보면 더욱더 신기합니다. 그리고 이걸 건네받은 사람이, 그 또는 그녀를 생각하게 된다면. 그것이 유산이고 전통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전통이란 게 별 것 있겠습니까. 어쩌면 그들의 수십 년, 아니 그 위로 수천 년을 물려받은 저 자신이 그런 전통의 정수 아니겠습니까. 지금으로서 저는 그런 전통의 가장 마지막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이러한 전통을 전하는 마지막 사람이 될지, 아니면 새로운 전통을 전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르고, 슬플 뿐입니다.
그들에게 받은 만큼 전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 일이 이렇게 어려운 것인 줄 몰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