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가격리편 #4] 이동의 자유
자가격리 5일 차. 불도 안 끄고 잠들어서 새벽에 깼다. 뭐 하다가 잠들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어젯밤에 생각지도 못하게 메일 한 통을 받고 울컥했던 기억만 난다.
와이파이가 느리다 보니 대용량 다운로드를 못해서 격리 끝나고 꼭 들어보겠다고 연락드렸더니 ‘매주 보낼게’라고. 하하. 안 보내주셔도 된다구욧! (유튜브 저화질 오프라인 다운로드가 더 빨라요.)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는 건 참 감사한 일이다.
다시 잠을 청하려는데 잠이 안 와서 글을 쓰다가 그대로 아침을 맞았다. 아침 먹고 자야지 싶어서 7시 반 넘어 노크 소리가 들리자마자 얼른 식사를 가져왔다.
언제나와 같은 또우지앙(豆浆, 두유), 계란, 그리고 만두. 심지어 며칠 전 정말 맛있게 먹어서 다시 나오길 기다린 야채버섯 만두다. 오른쪽 만두는 약밥 같은 느낌. 그런데 음식이 잘 안 먹힌다. 야채만두도 속만 먹고 말았고, 약밥 만두는 두 입 정도 먹다가 내려놨다. 어제 저녁부터 입맛이 없다.
어제 점심이 진짜 역대급으로 맛있었는데, 저녁부터 왠지 모르게 물리기 시작했다. 먹는 둥 마는 둥 하던 게 오늘 아침까지 이어진 거다.
결국 도시락을 정리하고 사과 하나를 씻어왔다. 사과도 반 정도 먹다가 내려놨다. 잠을 잘 못 자서 그런 건가?
10시 즈음되니 언제나처럼 노크 소리가 들린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请稍等).”
후다닥 마스크를 끼고 문을 연다.
“36.5도(36.5度).”
저 멀리서 체온을 잰 직원은 숫자 하나를 남기고 자리를 뜬다.
이번 격리 기간 동안 가장 많이 쓴 표현 하나를 꼽으라면 무조건 ‘잠시 기다려주세요.’ 请稍等, 请稍候, 稍等一下 등 다양한 변주를 주면서 쓰고 있다. 마스터하겠네, 마스터하겠어.
책상 위에는 사과 반 쪽이 놓여있다. 그냥 버리기에는 금쪽같은 사과다. 결국 나머지도 먹었다.
11시 반. 점심 도시락을 열었는데, 숨이 턱 막힌다.
매번 모든 반찬이 다 기름에 푹 젖어 있어서 며칠 먹으니까 물려버렸다. 장기 여행하면서 한국 음식이 그리웠던 적이 없는데 이번에는 음식 선택권이 없어서 그런가?
가장 기름기가 적어 보이는 양념 닭고기를 집었다. 간이 세고 달다. 아... 오늘은 이대로 안 되겠는데? 오늘이 며칠 째더라? 5일 차지? 그럼 1/3 된 거니까 비상식품 까먹어도 되겠다.
캐리어에서 김을 꺼냈다. 압축김이다. 존재조차 몰랐는데 지인분 덕에 그 위대한 존재를 알게 되었다.
가로로 샥샥 접고
세로로 한 번 접어서
봉투 입구를 가위로 자르면 끄읕. 그리고 남은 김은 고무줄로 봉인. 이 김을 먹으려고 가위랑 고무줄을 일부러 챙겨 왔다.
자, 이제 잘 잘렸겠지??
흠, 아직 잘 안 잘린 녀석도 있지만 대충 먹으면 돼지.
점심 클리어-
한숨 자고 일어나서 TV를 보는데 역할극 중 젊은 친구 한 명이 이렇게 말한다.
“사장님, 상의 드릴 일이 있어요. 저는 언제 정규직으로 전환되나요?”
老板,我有事情跟您商量一下。我什么时候转正么?
정규직 전환을 转正(zhuǎn zhèng)이라고 표현한다는 걸 하나 배웠지만, 중국도 한국처럼 비정규직, 정규직 문제가 있나 싶어서 살짝 씁쓸. 아직 중국 노동 시장을 잘 몰라서 뭐라 코멘트할 건 없지만. 뭔가 복작복작 노래도 하고 게임도 하길래 계속 틀어놨다.
아무래도 기분 전환이 필요하다 싶어 기내식 박스의 비상식량을 털어먹기로 했다. 그런데 소보로빵이 유통기한이 지났네? 유통기한을 保质期(bǎozhìqī)라고 한다는 건 하나 건졌다.
박스 안을 살펴보고 있는데 TV에서 웨이야라는 이름이 계속 들린다. 내가 아는 그 웨이야??
진짜 웨이야(薇娅)다! 리자치(李佳琦 Austin)와 함께 알리바바 라이브 커머스 플랫폼인 타오바오 즈보(淘宝直播) 진행자로 무척 유명한 왕홍(网红 인플루언서). 직업적으로 어려운 일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중국판 블랙프라이데이인 광군제 기간에 3일 동안 1시간 반밖에 못 잤다고. 웨이야를 이렇게 티비에서 우연히 보고. 중국 현지가 좋긴 좋다?
아무튼 오늘은 뭔가 달달한 걸 먹어줘야 할거 같아 초콜릿을 먹기로 했다. 초콜릿만 먹으면 이 소중한 시간이 너무 금방 끝날 테니 차 한 잔과 함께 최대한 음미하기로 했다.
물을 끓이려고 휴대용 전기포트로 눈길을 돌렸는데,
5일 만에 먼지가 이렇게 쌓이나? 안돼에에에.... 이런 거 눈에 들어오면 안 된다 말이야. 난 청소하기 싫다구.
원래 이렇게 먼지가 잘 쌓이나...? 방 안에서 뛰는 것도 아닌데. 어쩔 수 없이 보이는 곳만 닦았다.
마침 3시가 넘어 체온 측정도 마쳤고, 이제 차 마실 준비를 해볼까?
딱히 자가격리 준비를 안 하던 나지만 출국 며칠 전에 우연히 자가격리 후기를 보고 급하게 주문했다. (사실 청소도구들도 다 출국 전 날에 샀다.) 호텔 전기포트의 위생은 믿을 수 없다니 부피가 적은 이 녀석이 제격이다. 캠핑을 안 하니 이런 제품이 있는지도 이번에 알았다. 그럼 물을 올려두고 포장지에 적힌 중국어부터 읽어볼까?
상품명부터 어떻게 읽는지 모르니까 네이버의 힘을 빌리자.
흠, 榨菜는 쓰촨 성 식물이고, 泡(pào)는 물에 담그다는 뜻이니 찻잎째로 물에 담그면 된다는 건가?
净含量(jìnghánliàng)은 실질 중량이란 뜻이고, 성분표의 钠(nà)는 나트륨이구나. 깨끗하다(干净)의 净을 이런 식으로도 쓰네. 그럼 이제 뜯어볼까?
트득. 아니 근데 이게 무슨 냄새야.
그제서야 사전의 두 번째 의미를 읽어보았다. ‘ㅇㅇ해서 절인 식품’ 아... 1번만 읽었네. 당연히 차라고 생각해서 무조건 차에 맞추어 해석했던 거다. 너무 차 비주얼이라 뇌의 판단이 손의 감촉조차 이겨버린 거다. 이 허탈감이란.
호텔 방 안에 티백이 있긴 한데 청소상태로 보건대 이 친구는 이 방에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을 것 같다.
일단 19년 6월 생산에 유통기한이 18개월이니 먹을 수 있긴 하다. 유통 기한이 거의 다 되었지만. 그래도 티백 박스의 먼지를 보면 안 먹고 싶다.
나중에 정 마시고 싶으면 마시겠지만 일단 지금은 탈 나면 안 되니까 깨끗하게 패쓰- 초콜릿만 낼름 먹었다.
그때, 갑자기 직원한테서 연락이 왔다.
위챗페이로 숙박비랑 식비를 지불하라는 공지사항이다. 숙박비 3,108위안(52만 원), 식비 815위안(13.7만 원). 총합 66만 원이니 하루에 5만 원도 안 하는 저렴한 가격. 담당 직원이 바뀐 터라 다시 설명했다.
“안녕하세요, 지금 은행 계좌가 없어서 위챗페이 인증받을 수가 없어요. 격리 해제 이후에 현금으로 내도 될까요?
您好,我现在没有银行账号,无法获得微信支付认证。可不可以隔离解除后以现金支付?
“가능해요. 마지막 날 내면 됩니다.”
可以的。最后一天付就可以了。
오케이, 해결되었으니 문자나 뜯어볼까. 이분도 ‘哦(o)’라는 어기 조사를 문장 끝에 쓰네. 친구도 문장 끝에는 쓰던데. 뉘앙스 찾아봐야겠다. 여기서 어기 조사 了(le)는 왜 쓰는 거지? 얘도 날 잡아서 파야겠네? 캡처(截图) 이 단어는 진짜 많이 쓰는데 맨날 성조를 잊어버린다. 아예 메모해놔야지. 截图(jiétú) 스크린 캡처.
당은 섭취했으니 몸이라도 움직여야겠다 싶어서 스쿼트를 했다. 하나 둘 하나 둘. 피가 도니까 기분이 좀 낫다. 창 밖을 내다보는데 오른편에 개천이 있다. 우와, 이걸 왜 지금까지 몰랐지? 나 물이랑 나무 엄청 좋아하는데.
밖에 걷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동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느끼게 된다. 일주일씩 집에만 있어본 경험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내 자의로 선택한 것과 타의로 발이 묶여있는 건 정말 천지차이다. 그래, 오늘 인심 썼다. 저녁 맛없으면 라면이나 끓여먹자.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며 어느 지역에 집을 구하면 좋을지 잠깐 찾아봤다. 아직까지 집을 적극적으로 찾을 생각이 안 드는 건 ‘뭔가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히기 싫어서일까.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이 기간의 느낌을 헤치기 싫어서일까.
5시 반 넘어서 도착한 저녁은 나쁘지 않았다. 야채가 기름에 푹 젖지 않아서 라면까지 먹을 생각은 안 들더라.
그래도 아직 많이는 못 먹겠다.
10일을 더 있어야 하니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어떻게 변화를 주지? 어떤 변화를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