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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7시간전

버거운 것들(2)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기란 참 버겁다. 올 겨울은 서고동저에 라니냐 현상까지 겹쳐 엄동설한이 닥칠 거라는 예고에다 여름에 비해 엿가락 늘어나듯 이발주기까지 길어지니 문전성시를 바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에 도둑놈 심보인 줄은 잘 안다. 하지만 발길 뚝 끊긴 손님을 기다리다 입에서 단내 나기가 근자에는 유독 잦으니 정신 건강에 기스날까 저으기 염려스럽다. 

   정여울이라는 문학평론가가 새책을 소개하는 글 중 한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기다리는 쪽’과 ‘기다림을 당하는 쪽’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많은 사람이 ‘기다리는 쪽’보다는 누군가 나를 기다려주길 바랄 것이다. 기다림은 권력을 발생시킨다. 기다리는 쪽은 패배하기 십상이다. 기다리게 만드는 쪽이 관계의 열쇠를 쥐고 있다.(<기다림이 사라진 시대 기다림의 가치>, 신동아, 2016.03.25에서)


   깎새가 초조한 건 당연하다. 커트하러 손님이 오는 거지 커트하러 손님더러 오라고는 못하니까. 문학평론가는 또 이렇게도 얘기했다. 


   상대방에게 권력을 휘두르고 싶어 하는 많은 사람은 상대를 기다리게 한다. 연락을 기다리며 줄다리기를 하고, 약속 시간에 일부러 늦어 상대를 노심초사하게 한다. 록스타 믹 재거는 이 같은 ‘기다림의 심리전’을 자신의 콘서트에 적용해 공연이 시작되기도 전에 관객을 초주검으로 만들었다. 믹 재거가 이끈 롤링스톤스 공연에서는 한 시간 넘게 관객을 기다리게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는 관객이 환상적인 공연을 기다리다 못해 거의 빈사 상태에 이를 때까지, 태연자약하게 트레일러 속에서 카나페를 먹으며 마리화나를 피우고 샴페인을 마셨다고 한다.

그렇게 관객을 ‘광적인 기다림’의 황홀경과 극도의 스트레스 상태로 밀어 넣은 후에야 롤링스톤스는 계시처럼 나타나 기적처럼 공연을 마치고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크리스토퍼 앤더슨은 ‘믹 재거의 진실’에서 이렇게 말한다. “기다리게 하는 그의 기술은 일류였다. 언제까지 질질 끌면 관객의 기대가 최고조에 달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연주가 시작되기 전부터 관중이 황홀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같은 글에서 인용)


   깎새가 기다림을 버거워하는 건 그 짓 자체가 너무나도 군던지러워서이다. 깎새가 오매불망하는 손님이 관객을 황홀 상태에 빠지게 하는 롤링스톤스같은 광적인 존재라서? 그럴 리가! 차라리 정서적으로 지배하거나 예술적 엑스터시에 빠지게 만드는 존재라면 기다림을 추앙으로 둔갑시켜서라도 아깝지나 않지. 언제 올지 모르고 와도 때 맞춰 오지 않는 불규칙한 방문 패턴 때문에 대중없는 매상, 몇 푼 안 되는 알량한 매상을 나누고 쪼갠 뒤에 남은 더 몇 푼 안 되는 이문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 밥벌이의 애환, 그마저도 손님 발길이 끊길라치면 쪼그라들 게 역력할 형편에 좌불안석하는 꼬락서니. 한 마디로 말해서 매상이 안 올라 약이 오르는 천박하기 짝이 없는 소갈머리란 게지.

   살면서 기다릴 줄만 알았지 기다림을 당해 본 적이 별로 없는 깎새는 기다리는 건 딱 질색이다. 미련없이 떠나면서 끝까지 사람을 골리려고 작정을 했는지 기다리지 말라는 종결어미를 남긴 적이 없어서 깎새는 기다리고 기다리다 또 기다리기 일쑤였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하염없이 기다리다간 지레 말라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들어서야 겨우 기다리기를 멈춘 게 부지기수였다. 새드 엔딩일 줄 뻔히 알면서도 바보처럼 빌어먹을 집착을 집착한 게 억울해서라도 더 이상 기다리는 짓을 안 했으면 하는데도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아마 영영 깎새는 오지 않을 손님을 기다리고 또 기다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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