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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lobalCityRnD Jul 21. 2022

로버트 모세 vs 제인 제이콥스

오늘날 현대적인 뉴욕을 만든 도시계획가를 꼽으라면 단연 "로버트 모세"(Robert Mose)를 꼽을 수 있다. 뉴욕 도시계획의 최고 권위자 로버트 모세는 1955년 "그리니치 빌리지"(Greenich Village)를 관통하는 고속도로를 제안했을 때 성질이 급한 특별한 주민을 만났다. 그 주민의 이름은 바로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여사였다. 그 만남은 뉴욕에서 향후 10여 년간 지속될 긴 투쟁과 뉴욕 도시계획이 극적인 전환점을 이루는 긴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로버트 모세가 제안한 로어 맨해튼을 관통하는 고속도로 계획. 이 계획은 빛을 보지 못하고 최종적으로 폐기되었다>

 

1961년 "제인 제이콥스"는 ‘위대한 미국 도시의 죽음과 삶’(The Death and Life of Great American Cities)이라는 신간을 출판했는데 이는 전설적인 뉴욕의 도시계획가 "로버트 모세"의 도시계획 철학을 위협하는 도전장이었다. 

 

이 책을 통해 "제인 제이콥스"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는 "로버트 모세"에게 주민과 지역 여론을 조직해 "로어 맨해튼"의 전통 주거지를 관통하는 고속도로 건설을 멈추게 하겠다는 투쟁의지를 알렸다. "제인 제이콥스"의 이 책은 "로버트 모세"의 도시개발 철학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서였다. 

"로버트 모세"의 철학은 ‘복잡한 대도시는 기존의 날고, 오래된 물리적 형상들을 대대적으로 파괴하면서 20세 기적 비전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은 반면에, "제인 제이콥스"는 ‘도시의 미래 운명은 기존 주민 생태환경을 여하히 보전하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는 서로 상반된 신념이 충돌한 것이었다. "제인 제이콥스"와 "로버트 모세"의 충돌은 도시계획사 최초의 도시계획 논쟁으로 기록된다. 둘 사이의 긴장과 충돌은 어쩌면 불가피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로버트 모세"는 이해관계가 난마 같이 얽히고, 섥힌 뉴욕시의 공공 당국이라는 조직 속에서 도시를 바라본 반면, "제인 제이콥스"는 커뮤니티 유기체 주의 세계관과 분산된 어버니즘이라는 낭만적인 철학으로 도시를 바라보았다. 결국 누가 최후의 승자였을까? 

 

 

 

                     <제인 제이콥스. 로버트 모세의 도시개발 철학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했다>

 

막후 실력자

 

당시 "로버트 모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군주에 비견할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그는 최전성기에는 뉴욕시 공원위원회 위원장, 주 공원위원회 국장, ‘트리 바로우’ 공사(Triborough Bridge and Tunnel Authority) 사장 등 12개 공사의 책임자에 임명되었다. 

 

전기 작가 "로버트 카로"(Robert Caro)는 "로버트 모세"의 전기 ‘파워 브로커’(The Power Broker)에서 “모세는 은행, 노동조합, 계약자, 채권 발행 보험회사, 소매점포, 부동산 거래자와 같은 막후에 숨어 있는 이해 관계자의 힘을 통합해 인프라 시설 프로젝트 추진 재원을 조성하는데 천재성을 발휘했다”고 적고있다. 

 

"로버트 모세"의 초기 건설 프로젝트는 대부분 롱 아일랜드에 한정돼 있었으나, 점차적으로 도시 중심부를 향해 불도저 식으로 밀고 들어가, 궁극적으로는 ‘그리니치 빌리지’의 중심인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 그의 20세기적 비전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로버트 모세"는 '워싱턴 스퀘어 파크'는 쾌적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 중앙을 관통하는 4차선 도로가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그리니치 빌리지의 중심부에 있는 워싱턴 스퀘어 파크>


로버트 모세와 제인 제이콥스의 대결

 

월간지 건축포럼(Architectural Forum)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던 ‘빌리지’(Village)의 주민 "제인 제이콥스"는 1955년 4차선 도로가 공원 중앙을 관통해 맨해튼 5번가로 확장된다는 내용과 함께 “워싱턴 스퀘어 파크를 구하자”(to Save Washington Square Park)라는 유인물을 받았다. 마을을 관통하는 도시고속도로 건설계획을 접한 주민들은 비상사태임을 즉각 알아차렸다. 

 

"제인 제이콥스"는 바로 시장에게 “도시가 주민의 적주성을 높이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오히려 주민을 도시에서 쫓아내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실망했다”라고 항의서한을 보내는 한편,  지역 주민을 조직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에 대해 "로버트 모세"는 “이 계획을 반대하는 사람은 한 줌의 아줌마들뿐”이라며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모세와 제이콥스의 싸움 경과

 

"제인 제이콥스"는 "로버트 모세"와 단 한번 청문회장에서 조우했을 뿐이다. 그때 상황을 그녀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 나는 그를 단 한번, 워싱턴 스퀘어를 관통하는 로어 맨해튼 고속도로를 위한 청문회장에서 보았다. 로버트 모세가 잠깐 몇 마디 했지만 누구도 그의 발언을 귀 기울여 듣지 못했다. 우리 주민들은 아무도 발언하지 못했다. 그들은 항상 공식적인 순서로 먼저 발언하도록 배려되었고 자기들이 먼저 발언을 한 다음에는 상대방의 의견을 듣지 않고 가버렸다. 그들은 주민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으며, 오만 방자했다. "로버트 모세"는 이 프로젝트에 반대하는 사람은 한 줌의 아줌마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다”라고 소리치고는 쿵쿵 발소리를 내며 퇴장해 버린적도 있다…”


제인 제이콥스는 그녀의 저서에서 도시계획을 지배하는 과학적 합리주의를 공격하면서 건물의 용도와 역사성, 도시의 유기적 구조의 중요성을 격찬했다. 그리고 “왜? 도시가 오랜 시간에 걸쳐 복잡하게 조직화된 실체임을 인정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며 여론 주도층을 설득해 나갔다. 



<많은 예술가와 작가들이 살았던 그리니치 빌리지 거리 풍경>

 

하지만 "제인 제이콥스"의 노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뉴욕시의 주택 및 재개발국은 '워싱턴 스퀘어 파크'와 '그리니치 빌리지'를 불량지역으로 분류하는 연구에 착수하며, 대규모 재개발사업을 가능하도록 했다. "로버트 모세"의 동료들이 연구 책임자로 과제를 수행하면서, "로버트 모세"의 영향력이 계속 미쳤다. "로버트 모세"의 교활한 시도에 대해 "제인 제이콥스"는 즉시 ”빌리지를 구하자”(Save the West Village)라는 주민조직을 결성해서 맞대응했다. 하지만 로버트 모세도 일반시민이 이해 못 하는 전문지식을 나열하고 어용 단체를 조직하며 프로젝트를 추진해 나갔다. 

 

"제인 제이콥스"도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2개의 전선에서 싸웠다. 근린 주거지가 사실상 슬럼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고 불량지역 지정을 반박하기 위해 근린 주거지 조사를 자체적으로 수행해 반대논리를 제시했다. 또한 법에 규정된 청문회 개최가 이뤄지지 않자, "제인 제이콥스"는 청문회를 열라는 주법원의 명령을 받아냈다. 


이에 "로버트 모세"는 청문회 절차를 요식행위로 만들기 위해 청문회 안내 소식을 짧게 공지해 주민동원에 의한 반대를 회피하려는 얄팍한 전략을 구사했다. 그러나 "로버트 모세"

에게 일격의 치명타를 가하는 사건이 다가왔다. 재개발지역을 책임지는 부동산 회사, 재개발을 겉으로만 지지하는 사이비 주민조직과 시청 직원들 간의 재개발 금품수수 스캔들이 터진 것이다. 마침내 시민의 불만은 최고조에 이르며 ‘불량지역 지정 그리고 재개발에 대한 시의 계획 자체를 폐기하라’는 "제인 제이콥스"의 주장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때를 맞춰 "제인 제이콥스"는 주거지를 파괴하는 프로젝트를 멈추기 위한 다양한 형태의 지역 주민 연대를 꾸려 집회와 반대 청문회를 개최하고, 자동차 매연에 의한 환경오염 피해를 풍자하는 연극을 하는 등 강·온 전략을 동시에 구사했다. 그녀는 시청 예산국 회의에 여러 차례 출석해서 “고속도로 건설은 괴물 같으며, 소용없는 바보 같은 짓”이라고 혹평하는 진술을 계속 이어 나갔다. 


결국 1968년 "제인 제이콥스"는 ‘내란 선동 및 범죄’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새로운 뉴욕 시장 ‘존 린즈데이’(John Lindsday)는 "로버트 모세"의 고속도로 건설계획 폐기를 선언했다. 훗날 제인 제이콥스는 뉴욕을 떠나 캐나다 토론토로 가기로 결정하고 1968년 뉴욕을 떠났지만 그녀는 패배자가 아닌 승리자였다. 


로버트 모세의 합동 재개발 vs 제인 제이콥스의 도시재생

 

"제인 제이콥스"는 ‘미국 도시의 생과 사’라는 불멸의 저서와 "로버트 모세"와의 논쟁으로 인해 도시연구에서 반드시 연구해야 하는 도시계획 사상가 중 한 명이 되었다. 하지만, "제인 제이콥스"의 근린 주거지 관점에도 문제는 있었다. 그녀가 주장했던 걷고 싶고 다양성이 보장되면서 새것과 낡은 것이 혼합된 근린 주거지는 흔한 것은 아니다. 그 수가 많지 않아 일반 시민들 모두가 그런 동네에 산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누군가는 동네 근처 어딘가에 있는 야채 트럭까지 걸어가서 신선채소를 구입해야 할 것이다. 이때 "로버트 모세"의 교량과 고속도로가 없었다면,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아침에 신선한 채소를 구입하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제인 제이콥스가 좋아했던 맨해튼 웨스트 빌리지 거리 코너>

 

서울의 주거지 개발은 불도저 시장 "김현옥"의 와우 아파트에서 시작해서 합동 재개발과 재건축, "이명박" 시장의 뉴타운을 거쳐 "박원순" 시장의 도시재생 사업에 이르고 있다. 2009년에는 대규모 면적에 걸쳐 막대한 자본을 투자한 메가 프로젝트(Mega Project)를 추진하던 "오세훈" 시장의 서울은 용산참사라는 개발지상주의 철학이 가져오는 비극을 경험했다. 

 

 

 

 

 <서울에서 발생한 용산참사. 개발지상주의 철학이 가져온 비극이었다>

 

2009년 용산 참사는 주민 우선이 배제되고 부동산 개발을 통한 이윤 극대화라는 황금만능주의가 가져온 비극이었다. 우리는 ‘르 코르뷔지에’ 스타일의 모더니즘 도시만을 건설해 온 것은 아닐까? 주민의 생존과 오랫동안 켜켜이 쌓여온 물리적 구조가 보존되는 유기적 도시를 지나치게 쉽게 포기해버린 것은 아닐까? 한국의 도시재생 사업은 지금 어떤 위기를 맞고 있는가? 뉴욕의 역사에 아로새겨진 불도저식 "로버트 모세"의 개발 철학과 이에 맞선 주민 생태보전과 근린 주거지 철학이라는 "제인 제이콥스"의 충돌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가? 

 

 

 

<제인 제이콥스가 좋아했던 웨스트 빌리지 ‘아빙돈 광장’. 광장이 거실이고, 서재이며, 동네의 중심 역할을 한다>

 

도시개발이 메가화 되는 21세기에 "로버트 모세"의 모더니즘 도시철학을 피해 갈 수 없으며, "제인 제이콥스"의 블록 단위의 유기적 도시재생도 외면할 수 없다. 양자를 극적으로 결합해 한국 도시에 적합한 뉴 어버니즘을 찾아내는 것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서민층이 거주하는 재래 주거 지역 모습. 도시 재생지구로 지정되었다>

 

"로버트 모세"의 도시개발 철학은 "제인 제이콥스"의 주민 생태 보전 주의 철학과는 애당초 달랐다. "로버트 모세"가 추진하는 하향식 개발방식과 "제인 제이콥스"의 유기적 도시주의 개념의 대립은 긴장을 불러일으켰지만 그들은 단 한차례도 진지한 논쟁을 갖지 않았다. 도시계획사의 아쉬운 한 페이지가 아닐까 한다. 

 

 

 

<재건축 후 서울 어느 아파트의 모습>

 

도시 개혁가들이 등장해서 권력을 잡고, 도시를 패션화 시키면 새로운 도시 개혁가가 등장해 도시를 재 패션화 시킨다. 그러면 기존의 도시 개혁가는 소리 소문 없이 추락하게 된다. 

시계의 추가 좌우로 흔들리는 것처럼 "로버트 모세"의 자동차 문화 도시와 "제인 제이콥스"의 주민이 걸을 수 있는 도시 그 사이 어딘가에 파라다이스는 있을 것이다. 도시의 추가 멈춰야 하는 지점은 과연 어디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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