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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비 Jan 16. 2022

나는 십 년 늙기로 했다

#01 아파트 키드 판교 직장인이 집 짓기를 결정하기까지



집의 기억


경상북도 청도군의 할머니 댁은 올해로 사용승인 91년 차가 되는 고택이다. 어린 시절 그곳에서 불을 때는 데에 재미를 붙였다. 팔각 성냥으로 붙인 불이 볏짚을 만나 타오르면, 오래된 주방 한편에 쌓인 장작을 하나씩 집어넣었다. 버스 화물칸에 가방을 쌓듯 아궁이 속에 장작을 차곡차곡 쌓아 놓으면 어른들은 에이, 그러면 불이 안 타지. 하며 부지깽이로 장작을 이리저리 헤집어 놓았다. 나무가 어슷하게 쌓여 있어야 공기가 통해 불이 산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의 불장난으로 뜨뜻해진 아랫목에서는 어른들이 모포를 깔고 고스톱을 쳤다. 밤이 깊어 들개인지 뭔지 모를 짐승 울음소리가 들릴 때쯤이면 장작은 바스러져 불타는 돌처럼 시뻘겋게 빛났다. 어머니가 자, 여 있다. 하며 호일에 싼 고구마 바구니를 건네면, 나는 다시 부지깽이로 아궁이 속을 휘저어 잠들어가는 불 속에 고구마를 파묻었다.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다녀온 후면, 으레 할머니 댁 마당에서는 고기를 구워 먹었다. 어머니가 큼지막한 고기 덩이를 썰고 있으면, 아버지는 창고 한 구석에서 작은 화로와 숯을 꺼내 불을 피우기 시작한다. 화로에 불을 붙일 때에는 부채질을 급히 해서는 안 된다. 선풍기가 아니라 실링 팬이 도는 듯한 속도로 천천히 바람을 불어넣어 주어야 숯이 잘 탄다. 마당의 화로구이는 명절의 끝을 알리는 우리 가족의 의식과 같은 일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아파트로 돌아와 다시 일상을 살았다.



아파트 키드의 생애


집에서 독립하기 전까지, 잠시의 예외─학교 기숙사, 혹은 자취생 시절─를 제외하면 삶의 대부분을 아파트에서 보냈다. 처음 18평짜리 복도식 아파트에 입주했던 일곱 살부터, 취직해서 집을 떠난 스물일곱 살의 신축 84제곱미터 아파트까지 20년 간 여러 번의 이사를 거쳤지만 그 동선도 대부분 아파트로 구성된 1기 신도시인 일산, 산본, 평촌이었다.


이런 '아파트 키드'인 나에게 아파트는 거주 양식의 표준이었다. 다음 집도 '당연히' 아파트로 가는 것이고, 놀러 가는 친구 집도 아파트였고(와! 너네 집은 27층까지 있어?) 동네도 비슷비슷한 높이의 아파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매해 신고점을 경신하는 부동산 뉴스를 볼 때마다 "신혼부부들이 돈이 어디 있다고 꼭 아파트를 고집하냐"는 공감각적 댓글이 반사적으로 따라오는데─댓글에서 혀 차는 소리와 얼큰한 술냄새가 느껴지니 아무튼 공감각적인 텍스트라 우겨본다─시대가 그렇다. 2020년대에 결혼을 하는 세대라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아파트에서만 살아왔을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파트에서 생활하는 걸 전제로 삶을 계획할 수밖에. 신혼부부에게 헝그리 정신이 부족하다 질타하는 어르신들을 다시 아궁이에 불 때서 구들 덥히는 집으로 보내드리면 행복하실까? 적어도 아궁이에 불 때는 솜씨는 내가 더 나을 것 같긴 하다.


물론 아파트에서의 삶이 '당연히'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취업 준비를 하던 학부의 마지막 1년과, 취직 후 결혼 전까지는 다가구 주택의 원룸에서 살았다. 심지어 결혼을 하고도 한동안은 아내의 복층 원룸 오피스텔에서 지냈다. (이 얼마나 헝그리 정신으로 똘똘 뭉친 부부인가) 처음으로 전세 대출을 받아 신축 아파트에 입주한 날 밤에, 새삼 아파트란 얼마나 쾌적한 공간인지, 이 얼마나 건축적으로나 생활양식으로서나 고도화된 개념인지를 생각하느라 잠들지 못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아파트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집을, 즉 아파트를 사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즈음에 <시티즈 스카이라인>을 다시 플레이하기 시작했다. 주거와 도시에 대해 구체적인 관심이 생긴 시절.


본격적인 부동산 시장의 참여자가 되어보니 아파트를 '닭장'이라는 대량 양산형 주거 시설로 바라보는 건 지나치게 피상적인 시각이었다. 2020 인구주택총조사 기준 대한민국 주택의 63%를 차지하는 아파트는 한국인 생활양식의 중추이면서, 교통과 교육, 상업, 정치까지 한국 사회의 모든 영역을 논할 때 근간이 되는 전제다.


고밀도 주거 시설은 다수의 인구를 응축시키고, 교통 시설과 상권의 형성을 촉진한다. 접근이 용이한 지역에 차곡차곡 인프라가 갖춰지며 생활하기 편한 동네가 된다. 집을 일찍 나가 늦게 돌아오는 한국인들에게 관리사무소의 존재, 유지보수가 간편한 규격화된 구조는 비용과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장점이 된다. 세대수가 커질수록 지역 현안에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용이해진다. 신문기자인 대학 동기와 "대단지 아파트 민원이야말로 한국식 풀뿌리 민주주의 형태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은 적도 있다.


그 모든 걸 떠나 도심과 특정 지역에 집중된 일자리, 그리고 이를 둘러싼 한정된 가용 토지라는 한국의 상황에서 아파트를 포기한다는 것은 개인에게 굉장히 어려운 선택이 된다. 그런지라 나는 인구 추이가 가파른 하향세를 보이고 있다 해도, 한동안은 아파트 가격이 급격히 하락하기 어렵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결국 '통근 30분 이내' 거리의 '2010년대' 준공된 '브랜드' 있는, '전용 84㎡' 아파트를 샀다.



혼란의 시대 속에서


첫 '내 집'을 계약한 건, 중국 우한에서 발원한 바이러스가 막 국내에도 상륙했다는 뉴스가 들려온 시점이었다. 사태가 심상치 않자 회사는 우선 출근을 중단시키고 상황을 지켜보겠다고 공지했다. 이 기간에 나와 아내는 어렵게 매물로 나온 집을 찾아볼 수 있었고, 우리가 그 집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공교롭게 그 집의 주인 부부도 재택근무 중인 판교 직장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중개원도 "이 분들이 평일에는 댁에 안 계셔서 보여드리기가 어려웠는데…"라고 한 마디 덧붙였다.


연신 부동산 폭등 기사가 지면을 뒤덮다가 잠시 찾아온 소강기에 우리는 괜찮은─그러나 단지 내 신고가인─가격에 매매 계약을 체결했고, 몇 달 뒤 입주했다. 시스템 에어컨도 펑펑 틀어보고, 리클라이너 소파를 사고 아내가 15년 정도 써 왔던 43인치 TV도 75인치로 교체했다. (최신 스마트폰보다 75인치 TV가 싼 세상이 올 줄이야) 하지만 모두가 경험한 바와 같이 아파트 바깥의 세상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회사의 근무지침은 계속해서 바뀌었다. 팬데믹 초창기 전사 재택근무를 진행했다가 외부 연결 폭주로 사내망이 뻗어버리거나, 정밀한 작업을 요하는 3D 모델러나 애니메이터들이 VPN 딜레이에 불만을 터뜨리는 일은 예사였다. 다시 출근 지침이 내려오고 1주일도 안 되어 사내에 감염자가 발생해 다시 모든 직원을 퇴근시키거나, 인근 식당 사장이 감염 후 확진 판정을 받기 전까지 영업을 지속해 해당 식당에서 식사를 했던 직원 수십 명이 PCR 검사를 받으러 가는 등 매일이 혼란의 연속이었다.


2021년이 찾아오고부터는 상황이 조금 진정되는 것처럼 보였다. 재택근무 비중이 주 2회, 주 1회로 점점 줄어들고 서서히 팬데믹 이전의 근무 체계를 회복하는 듯했다. 6월에 같은 동네에 사는 선배 팀원과 집 근처 술집에 가서 사장님에게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다음 달이면 인원 제한 해제라는데, 저희 팀 사람들 한 번 다 데리고 올게요!
그러나 그것이 말로만 듣던 "폭풍전야" 였을 줄은


하지만 다시 한번 대유행이 찾아오고 회사는 전일 재택근무 지침을 공지했다. 결국 지금도 우리 팀원들은 그 집의 육회와 낙지탕탕이를 먹어보지 못했지만, 더운 여름에 밖을 돌아다니지 않고 집에서 에어컨을 틀고 근무하니 몸은 한결 편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소중한 내 집이 신경을 거스르는 일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8월 관리비 고지서에 적혀 있던 40만 원 대의 전기료보다 더.



흔들리는 고요


20~21년 영끌 열풍에 힘입어 내가 살던 아파트도 신고가 매매가 이어졌다. 새로 전입하는 가구 다수는 입주 전 인테리어를 진행했다. 하루는 20층 전입 세대가 엘리베이터에 인테리어 공사 안내문을 붙여둔 걸 보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공사 첫날 아침 8시 굉음에 깨고야 말았다. 내 집은 11층인데 드릴 진동은 마치 옆 방에서 들리듯 생동감이 넘쳤다. 결국 급히 평화로운 판교로 출근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도 공사 안내문이 엘리베이터에 붙으면 철거 소음이 심한 첫날은 꼭 집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우리 부부가 늘 고요하게 생활해서일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날 '귀트임'이라는 것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20년 넘게 아파트에서 생활해 본 경험으로, 이 귀트임이라는 것은 정말 예고 없이 발현하는 증상이다. 언젠가부터 위층의 소음이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했는데, 첫 시작은 화장실 소음이었다. 관리사무소를 통해 윗집이 시도 때도 없이 변기 뚜껑을 쾅 떨어뜨리니 주의를 요청한다고 말을 전했다. 다행히 그날 이후로 윗집에서 변기 뚜껑을 쾅쾅 거리며 닫는 일은 없었다. 그 이후에는 오후 9시면 가구를 바닥에 끄는 소리가 길게 여러 번 들리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아내가 인터폰을 들었고, 그 이후에 가구를 끄는 소리는 확연히 줄었다. 


적어도 윗집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일이 나에게 더 큰 스트레스를 주는 계기가 될 줄은 몰랐다. 내 신경은 잔뜩 예민해져서 항상 청력검사를 받는 수준의 긴장 상태를 유지했다. 그리고 이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을 내가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침 7시 40분이 되면 윗집 안방에서는 출근을 서두르는 발소리가 들린다. 옆집은 딸이 셋인데 외국인 시터를 두 명 고용하고 있었다. 안방 욕실 배관을 타고 시터가 아이들에게 윽박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한국어는 아니고, 중국어도 아닌 다른 외국어라는 정도는 알 수 있을 정도의 소리. 아마도 아랫집이나, 아랫집의 옆집에는 주인이 없을 때 소형견이 짖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서로 열심히 벽이든 천장이든 두드리며 무언의 항의를 보내고 있었다. 아침에 출근해 밤늦게 퇴근할 때에는 모르고 지나치던 생활의 민낯이었다. 그리고 나는 악의 없는 이웃들의 생활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 차라리 싸울 일이라면 싸우고 말 것인데.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나는 아내와 1주택 비과세 요건을 충족하게 되는 2022년 중에 다시 이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네이버 부동산에서 '탑층' 필터를 걸고 매물 동향과 시세를 체크했다. 다행히 각자 담당하는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풀려 가고 있었고, 성과급이 괜찮게 나온다면 '좀 더 상급지'의 아파트로 이동하는 부가 효과까지 거둘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30여 개 아파트의 거주 여건 평가와 실거래가 추적. 동네 아파트 아무거나 찍어도 평형별 실거래가를 기계처럼 읊던 시절.



끝없을 게임의 끝


주말마다 아내와 함께 미리미리 임장 투어를 다녔다. 판교 통근 40분 이내의 동네는 안 가본 곳이 없는 것 같다. 그 범위 밖에서도 동탄 신도시를 1박 2일로 둘러보기도 했고, 용인 경전철(에버라인)을 타고 동쪽 끝까지 간 적도 있었다. 어린 나이에, 그것도 집 사기 어렵다는 시기에 당당하게 '내 집'을 쟁취한 성공한 아파트 키드였지만 다음 스텝을 생각하니 급격히 혼란스러워졌다.


그 고민의 내용과 과정을 푸는 것만으로도 지금까지 쓴 글보다 더 긴 글을 써야 할 것이다. 결론만 정리하면 우리에겐 두 가지 선택지만이 남았다. 1) 비슷한 입지의 신축 아파트로 가느냐, 2) 회사와 더 가까운 구축 아파트로 가느냐. 


나름 부동산에 대해 공부를 해서 머리가 굵어진 나는 당연히 2) 번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직접 봤던 집 중 꽤 마음에 드는, 정남향의 2002년 준공 아파트가 있어서 어느 정도 결심도 섰다. 그런데 아내와 함께 열심히 미래 시뮬레이션을 시작해보니 또 다양한 고민들이 줄줄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인지.


2) 번을 선택하면 이제 집 값이 '억'에서 자릿수를 한 번 더 올라가야 했다. 지금 사는 집을 시세에 처분하는 전제로 가용 LTV, 금리 변동 시뮬레이션을 몇 번 돌려보니 놀랍게도 매수에 도전할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현재 적용되는 DSR 여부까지는 계산해보지 않았지만, 심지어 변동금리 6%까지는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이쯤 되면 매수 자체가 여생을 판돈으로 거는 배팅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만약에' 하는 순간에 나는 이 리스크를 통제할 수 있을까?


모든 상황이 잘 풀린다 해도, '주거의 기준'과 '그 집의 가격'은 끝나지 않을 레이스를 계속할 것이라는 생각에 다다랐다. 돈을 모아 2년에 한 번씩 차곡차곡 상급지로의 계단을 오른다 해도, 그 끝이 판교나 강남이 된다고 해도 내 거주 환경에 100% 만족하는 때는 오지 않을 것이다. 공동주택이라는 아파트의 근본적인 특징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다. 층간소음이나 관리사무소의 방송이나, 주차장이나 엘리베이터 같은 공용 공간을 두고 발생하는 문제들은 결국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바깥에 있었다. 결국 내 결정의 끝은 새로운 의문이었다. 이 게임의 판돈 끝에 0을 하나 더 써넣는 게 최선의 선택인가?


이윽고 마법의 그 말이 나오고야 말았다. "그 돈이면 씨…"



미래를 먼저 맞이하려 해


그렇다. 희망 매수금액에 0을 더 써넣을 정도면, 집을 하나 만들 돈이 될 수도 있었다. (과연 최신 스마트폰보다 75인치 TV가 더 저렴한 시대답다) 물론 이것이 최선의 대안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파트를 무기로 한 무한한 군비경쟁에서 낙오되는 것은 아닐까? 온전히 내 책임 하에 내 집 전체를 관리할 수 있을까? 그게 더 나은 생활이 될까? '어느 아파트를 살까'를 고민할 때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의문과 리스크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가장 가까운 파트너와, 가장 절친한 동료와, 나보다 돈 계산이 빠른 사람과 상의했다. (그렇다, 아내다) 우리 부부의 생활 방식, 추구하는 가치, 피하고 싶은 것, 편안함을 느끼는 상태에 대해 다시 한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우리 땅에 우리 집을 지어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 : 라인이나 쿠팡이 그렇듯, 장기적으로 전면 재택근무를 허용하는 회사들이 늘어날 것으로 보였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더 길어질 것이고, 최상의 컨디션으로 일할 수 있는 홈 오피스를 구축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차 : 이제 슬슬 차량을 구매할 시기가 되었다. 자동차 제조사들은 10년 후에는 전기차만 생산하겠다고 움직이는데, 그 시대를 지금의 아파트 인프라가 감당할 수 있을까? 주차난을 현재 진행형으로 겪고 있는 구축 아파트는 더더욱 어떻게 될지 의문이 간다.

집 : 집에서 더 많은 것들을 하고 싶다. 트레드밀과 운동 기구도 놓고 싶고, 작은 텃밭에 허브나 파라도 키워서 먹고 싶고, 가끔은 커피 한 잔 들고 마당에서 멍 때리거나 바베큐도 해 보고 싶다. 아내는 집에서 세차도 해보고 싶다고 했다. (왜…?)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라는 얘기를 했다. 집에서 최상의 데스크 셋업을 갖추고 일하고, 점심 먹고 잠시 운동도 할 수 있고, 비 오는 날이면 처마 아래에서 커피를 마시고, 전기차 충전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는 생활을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지 않을까. 그것이 어쩌면 우리에게 찾아올 수 있는 미래의 한 가지 가능성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그 미래가 오기 전에 먼저 선점하고 싶었다. 이것조차 내가 100% 만족할 수 있는 선택은 아니겠지만, 더 나은 방향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전혀 다른 방향의 배팅을 선택하기로 했다. 집값에 0을 하나 더 쓸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닌, 내가 생각하는 미래가 올 지 오지 않을 지에 걸기로 했다. 미래를 건 홀짝 게임에서 질 수도 있다. 그래도 알땅은 남겠지.


우리는 네이버 부동산 페이지를 열었다. 그리고 탭을 옮겼다. '아파트·오피스텔' 에서 '상가·업무·공장·토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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