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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아니스트조현영 Mar 27. 2022

폭약이 폭죽처럼 터지고 ‘볼레로’ 선율이 흐른다

영화 ‘밀정’과 라벨의 ‘볼레로’

내 편도 네 편도 아닌


영화 <밀정, The Age of Shadows>은 원작인 김동진 작가의 <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을 모티브로 김지운 감독의 각색이 돋보인 작품이다. 실제 있었던 황옥 경부 사건과 약산 김원봉 선생, 김상옥 열사의 삶까지 알고 보면 더 가슴이 저리는 영화로 1920년대 말이 시대적 배경이다. 영어 제목이 ‘Spy’가 아닌 ‘The Age of Shadows’인 것도 상당히 매력적이다. ‘어둠의 시대’, ‘그림자의 시대’라는 제목은 적인지 동지인지 모르는 두 주인공의 관계를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고, 일본의 강제점령이라는 어둠의 시대를 조명하는 것도 같다.

조선인이지만 일본경찰 노릇을 하는 이정출(송강호)과 조국의 독립을 염원한 의열단의 리더 김우진(공유)의 쫓고 쫓기는 이야기가 주된 서사다. 더불어 두 사람이 서로 정체와 의도를 알면서도 형제처럼 가까워지는 감정의 변화 역시 보는 재미를 더한다. 서로 밀정을 찾아내기 위해 기차를 뒤지는 장면, 이정출이 기차에서 뛰어내리며 독백하는 장면 등 기억나는 장면이 많지만 뭐니 뭐니 해도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백미다. 교도소에서 먼저 풀려난 이정출은 김우진이 부탁했던 대로 일본 간부들이 파티를 하는 곳에 잠복해 들어가 폭탄을 터뜨리며 그들을 죽인다. 한 명 한 명 죽이는 장면에서 함께 흘렀던 음악은 보는 내내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었다. 영화는 탄탄한 스토리와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 그리고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감독의 연출로 흥행에 성공했다. 이 흥행에는 음악의 역할도 빠질 수 없다. 누군가는 영화를 보고 어떤 장면을 기억하고, 누군가는 어떤 대사를 읊조리며, 누군가는 어느 멜로디를 마음에 품는다. 내 경우엔 멜로디가 영화를 더욱 기억나게 만들었다. 영화 속 라벨의 <볼레로>는 극적인 엔딩을 만들어낸 최고의 음악이었다. 시종일관 동일하게 연주되며 긴장감을 고조시킨 작은 북의 주제와 여러 목관악기가 오묘하게 어우러져 흘렀던 그 음악을 잊을 수 없다.


묘하게 빨려 들어가는 짧지만 강렬한 모티브 


1912년 피아노 앞에 앉은 모리스 라벨


<볼레로>는 라벨이 1928(53세)년에 작곡한 그의 최고명작이다.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1875~1937)은 생상스, 포레, 드뷔시와 함께 프랑스 음악의 계보를 잇는 작곡가다. 그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지역인 바스크 지방의 시부르(Ciboure)에서 태어났는데, 시부르는 피레네 산맥 근처의 작은 마을이다. 우리는 보통 프랑스라고 하면 파리를 떠올리지만 라벨은 오히려 스페인과 가까운 곳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파리로 이사를 하긴 했지만, 사랑하는 어머니의 고향 시부르는 라벨에게 또 하나의 고향이었다. 그의 음악이 전통적인 프랑스 풍이기보다 다분히 이국적인 데는 이런 이유도 있다. 그는 62세의 일생 동안 결혼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만 매진했다. 참으로 멋진 인생이다.

라벨은 볼레로가 작곡되기 1년 전인 1927년에 일상의 공간인 파리에서 벗어나 북미 여행을 시작한다. 여행에서 돌아온 라벨은 무용가 이다 루빈스타인(Ida Rubinstein)의 요청으로 이 곡을 작곡한다. 그는 클래식 작곡자이지만 대중을 위한 곡에도 관심이 많았다. 손가락 하나로 연주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주제를 생각해 낸 그는, ”이 주제를 전개시키지 않고 할 수 있는 데까지 오케스트라를 늘려가며 수없이 반복시켜 볼 겁니다.”라고 말하며 <판당고>라는 제목으로 곡을 작곡한다. 이것이 후에 <볼레로>로 제목이 바뀌고, 1928년 루빈스타인 발레단의 공연으로 세상에 첫 선을 보인다.

<볼레로>는 술집의 탁자 위에서 무용수가 홀로 스텝을 밟으며 춤을 추다가, 격하게 고조되는 리듬과 춤의 역동성에 동화되어 손님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무용수와 다 같이 춤을 춘다는 내용이다. 원래는 발레를 위한 곡이었지만, 지금은 오케스트라 기악곡으로 더 많이 연주되는데, 곡을 듣다 보면 ‘관현악의 대가’라는 라벨의 별명이 참 적확하다 느껴진다. 

전체 340마디로 구성된 이 곡은 주제가 아주 단순하고 짧다. 단순한 듯하면서도 독특한 음색을 내는데, 같은 멜로디를 매번 다른 악기들이 연주하면서 다채로운 음색을 선물하니 듣는 재미가 보통이 아니다. 처음 곡이 시작하면 아주 조용한 소리로 작은 북이 연주되고, 그 기본 반주에 맞춰 플루트가 은근슬쩍 주제를 들려준다. 그 주제는 끊이지 않고 목관악기인 클라리넷, 바순, 오보에 등으로 이어지고, 금관의 트럼펫, 색소폰 등 다른 악기들로 변화하면서 점점 소리가 커진다. 시종일관 박자나 속도도 변하지 않고 악기의 음량만 변한다. 작곡가 라벨 스스로도 ‘관현악 합주 부분의 크레셴도(Cresendo, 점점 커짐)’가 이 음악의 유일한 변화라고 말했다. 작은 북의 주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169번이나 반복되는데(실제로 악보를 보며 세어보는 것도 큰 재미다), 커지는 볼륨과 함께 심장이 쫄깃해지는 이상한 긴장이 느껴진다. 한 주제가 지속적으로 나오는 상태에서 다른 주제가 위에 얹어서 동시에 연주되는 오묘한 방식. 두 개의 주제가 전체 340마디의 곡 안에서 계속 쫓고 쫓기는 모습이 밀정의 두 주인공을 연상시킨다.

<볼레로>의 인기는 그칠 줄 몰랐고 급기야 1934년에는 영화사 파라마운트가 <볼레로>라는 같은 제목의 영화를 만들기까지 한다. 춤을 추기 위한 음악에서 영화 음악까지. 학계에선 외면당했던 라벨이었을지 몰라도 대중에겐 누구보다 더 큰 사랑을 받은 라벨이었다. 


라벨이 볼레로를 작곡한 해는 1928년이다. 이 멋진 음악이 춤곡으로 작곡됐을 때 지구 반대편 조선 땅에서는 슬픔의 기운만 가득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서양의 음악이 동시대 배경의 동양 영화에 이토록 멋진 엔딩을 선물해 주리라곤 영화를 보기 전까지 미처 몰랐다. 영화 <밀정>에서 볼레로는 진정으로 기쁨과 슬픔의 음악이었다. 




<추천음반>

영화와 함께 다시 한 번 음악을 감상하고 싶다면 1962년 지휘자 샤를 뮌슈(1891~1968)가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음반을 추천한다. 뮌슈는 독일계 음악가 집안 태생으로, 당시 독일 영토였던 스트라스부르에서 태어났다. 파리뿐만 아니라 독일 베를린에서 공부했고, 미국의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오랫동안 지휘했던 그의 이력은 스페인계 프랑스인인 라벨의 이국성이 묻어난다. 빠른 템포와 남성적인 매력이 느껴지는 음반으로, 색채의 마술사라고 불리던 라벨을 흠뻑 느낄 수 있다.     


https://youtu.be/6FgFV4VpLx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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