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쓸 만한 간호사 Feb 16. 2022

보호자에게 받은 비단주머니

진급이 누락되었다. 주변에서도 모두 의아해 하는 반응이었다.

'열심히 환자를 돌보고, 대외적인 활동도 많이 했었는데.' 스스로가 제일 납득하기 어려웠다.

승진해서 더 받을 수 있던 월급이나 ‘선임’같은 직책 따위가 아니라, 병원에서 최소한의 인정도 받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배신감이 들었다. 승진 명단을 볼 때마다 모두가 미워졌다. 일하기가 싫어졌다. 당장에라도 퇴사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나니 왠지 억울해서 자주 속이 메스꺼웠다. 이곳이 싫다. 일하기 싫다는 생각은 급속도로 사람을 침몰시킨다. 더는 환자를 보기도 싫었고, 쉬운 일도 힘겹게 느껴졌다.


당연히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무척 차가워졌다. 못되게 굴었다기보다는 그냥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환자를 돌보는 일이 ‘그냥 사무를 보는 일’처럼 느껴졌다. 아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에는 마음이 무겁던 CPR이나 사망 정리도 그저 과정이 조금 복잡한 일이었을 뿐이다.

더는 일이 끝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술을 마시거나, 다른 취미를 찾아다니며 체력을 썼다. 우리 일이 이렇게 쉬운 거였나. 나는 간호사였던 내 모습을 잊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달 즈음 지났을 무렵, 환자 한 분이 사망하셨다. 동료들과 정리를 하고, 나갔더니 뜬금없이 보호자가 비단으로 된 보자기를 내민다. 열어보니 안에는 한복이 있었다.


“죄송하지만 혹시, 우리 엄마 이거 입혀주실 수 있나요?”

처음 받는 부탁에 무표정한 얼굴로 조금 머뭇거렸다.

“저희 엄마가 가장 아끼시는 옷이에요. 제 결혼식 때도, 또 손주 돌잔치에도 입고, 또 팔순 잔치 때도 입었던 옷인데, 마지막 가시는 길에도 입으시고 싶어 하실 것 같아서요.. 부탁드려요.”

보호자는 별안간 보자기를 내 손에 쥐여주고 손을 포갠 채 눈물을 흘렸다. 별안간 나도 눈물이 나왔다.


할머니가 살아있던 마지막 몇 시간 동안 할머니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게 생각나서.

이미 상태가 너무 안 좋았으니까. 수면제가 들어가고 있으니까. 어휴. 내 근무 중에 돌아가시겠네. 하고 생각하고 말았던 것이다. 마치 그냥 잠시 미뤄놓아도 되는 서류작업인 것 마냥.


아. 사람이었지. 할머니. 살아있었지. 그냥 전산에 띄워진 이름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이렇게 소중한 가족이었지.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감정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꼭 그러겠다고, 사죄하는 마음으로 한복을 받아 할머니에게 입혀드렸다. 조심스레 옷을 입혀 드리고 나니, 더 죄책감이 들었다. 만약 마지막으로 본 얼굴이 나였다면, 나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을까. 나는 간호사도, 사람도 아닌 모습으로 비췄을까.

할머니.사람이었는데. 해결해야 할 일거리가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은, 사람을 돌보는 일인데.


할머니는 고운 한복을 입고 영안실로 내려갔다. 고개를 들어 다시 얼굴을 보니 무척 고운 분이셨다. 할머니가 한복을 입고 나오자, 보호자는 내게 감사하다고 했다. 나는 과분한 감사를 손에 들고 그 자리에 한참을 서서 반성했다. 그래서 그날은 아무 일도 손에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고백하건대 아직도 가끔 이런 순간들은 온다. 여러 이유로 일하기 싫을 때. 그냥 심드렁해지는 날, 누워있는 아픈 사람들이 일거리처럼 느껴질 때. 그럴 때마다 예외 없이 떠올린다. 보따리를 쥐여주던 따뜻한 손, 그 보자기 안에 들어있는 감정들. 감사하다는 말. 이제 한참 지난 이야기지만 그 보자기에 담겨있던 것들은 아직 마음 한편 어딘가에 남아, 나는 무감각해질 때마다 그 보자기를 주섬주섬 펼쳐 필요한 만큼 몇 번이고 꺼낸다. 전해주려고.


내가 돌보는, 사람들에게.

작가의 이전글 구독자가 백명이 넘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