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이래로 처음 연속 5일 휴가 냈다
이제 벌써 3년 차 직장인이 되어간다. 회사에서 말하는 성과 같은 건 없지만, 돌이켜보면 스스로는 열심히 했다고 자부한다. 나는 과정을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니까^^ (이렇게라도 버텨야지) 잘한 게 없다고 휴가도 못 가면 섭섭하지 않겠나. 지난 수개월 동안 수고한 나에게 보상도 할 겸 미국 여행을 다녀왔다. 최대한 길게 다녀오기 위해서 올해 여름휴가도 반납하고 숨참고 기다렸다.
이번 여행은 아빠와 동생이랑 갔다는 점에서 조금 특별했다. 저번에도 동생이랑은 여행을 해봤기 때문에 스타일은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빠와 함께한다는 점에서는 사실 여행보다 효도에 가까운 일이기도 했다. 아빠는 외국에서 통역해 줄 사람이 필요했고, 나는 그랜드 캐년을 같이 갈 동행자가 필요했고, 동생은 경비를 지원해 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셋의 니즈가 딱 맞았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가족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연차를 7일이나 썼지만, 미국의 땅덩어리는 워낙 거대한지라 일정이 정말 빠듯했다. 10월 초는 자연경관을 보기 좋은 날씨라는 생각이 들어서 서부에 여행을 선택했다. 자유여행이긴 했지만, 촉박한 일정 때문에 그룹 투어 2개를 끊었는데, 이로 인해 조금 피곤하긴 했다. 2개 투어로 인해 우리는 매일 아침 7시 이전에 일어나서 나갈 채비를 했다. 여유가 없는 일정에도 불구하고 아빠와 동생은 시차 적응에 대성공해서 꽤나 잘 돌아다녔다. 난 너무 피곤했지만 스스로 무리하게 짠 일정이기 때문에 조용히 비타민을 털어 넣으며 쪽잠으로 버텼다.
미국의 첫인상은 의외로 '친절'이었다. 호주 교환학생 시절 수많은 인종차별을 겪어봤던 내 경험을 기반으로 약간의 선입견이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미국은 개방적이고 친절했다. 물론 LA, Las Vegas 두 대도시 위주로 관광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지나가는 아시안에게 이유 없이 욕하던 지난 경험과는 달랐다.
미국에는 여러 국립공원이 있는데, 여행 2일 차에 투어로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다녀왔다. 개인적으로 자연관경은 감동적이었는데 차라리 가족끼리 하이킹을 하는 게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동생은 요세미티 티셔츠를 입고 다니면서도 지리산이랑 다를게 뭐냐며 중얼거렸다. 누구에겐 감동이고 누구에겐 고작 지리산이었지만, 그래도 난생처음 보는 수목들과 전 세계 클라이머가 사랑하는 엘캐피탄 암벽도 구경할 수 있어서 좋았다. 물론 난 클라이밍에 딱히 흥미를 못 느끼지만 말이다.
5일 차에 갔던 그랜드 캐년은 미국을 다녀온 지 두 달이 지난 이 시점에도 웅장함과 황홀함이 기억에 남는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거대한 협곡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데 도저히 사진으로는 담기지가 않는다. 누군가 일상에 재밌는 일이 없다는 사람이 있다면 추천해주고 싶은 곳이다. 나 자신이 물리적으로 한 없이 작게 느껴지면서 눈앞에 펼쳐진 것만 봐도 재밌는 곳이다. 미국은 정말 복 받은 국가라는 생각이 들어 내심 부럽기도 했다. 거의 마약 한 기분과 다름이 없는 나머지, 기념품샵에서 결국 모노폴리 National Parks Edition을 인터넷보다 비싼 가격으로 사버렸다. 보드게임 안에 이곳의 공기가 담겨있을 거라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그랜드 캐년에서 LA로 돌아가는 데는 무려 8시간이 걸렸다. 거리로는 약 800km인데, 서울-부산 왕복 거리 정도 된다. 이동하느라 이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다니 놀라웠고, 운전 중에 주변 모습이 도시, 농장, 대초원, 사막 등 끊임없이 바뀌는 창밖을 보며 또 한 번 미국의 큰 땅덩이가 부러웠다. 그래도 돌아가는 긴 여정 중에 잠시나마 행복했는데 바로 인생 파이집을 만났기 때문이다. 가게에 들어갔는데 Homemade Pie라고 적힌 메뉴판에 파이 종류가 수십 가지는 되었다. 그중 바나나 크림이 들어간 걸 시켰는데 부드럽고 달콤하고 기절하게 맛있었어서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중에 직접 운전해서 그랜드 캐년과 그 음식점에 꼭 다시 가고 싶다.
미국에서 돌아와서 2달이 지나니 여행 가서 힘들었던 점도 분명 있었지만 모두 미화되고 추억만 남았다. 이번처럼 효도 여행 비슷한 거 말고, 언젠가는 진짜 온전히 아무 생각 없이 즐기는 여행을 2-3주씩 가고 싶다. 신혼여행이 되려나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