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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리Rhee Feb 20. 2024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고

군.주.론. 여러 해에 걸쳐 이탈리아를 지켜 내고 싶었던 마키아벨리의 입장에서 여러 군주들을 겪고 관찰한 결과를 유형 별로 정리하여, 소상히 정리해 놓은 모습은 고전으로 자리 잡힐 만큼 여러 해에 걸쳐 읽힐 수 밖에 없었을 것 같다. 


읽다가 몇 가지 마음에 와 닿는 귀절을 남기어 본다. 


1. 관대함과 인색함


나는 매우 관대하고 싶다. 왜냐하면, 항상 월급쟁이 아빠 때문에 콩나물 값 100원도 깎아야 하는 엄마의 인색함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통 크고 특히나 돈 앞에서 관대한 엄마가 되어야지 하고 마음을 먹곤 했었다. 


군주는 관대하다는 평판을 얻지 않도록 오히려 인색하다는 평판에 개의치 않아야 한다. 관대하다는 평판을 얻으려면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써야 하며, 나아가 백성들 자산까지도 무거운 세금으로 거둬 들여 할 처지에 놓이기 때문이다. 되려 인색하여 백성에게 특별세 등을 부과할 필요 없이 재정이 탄탄하다면 되려 관대하다는 평판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한다. 


나도 향후 나의 자산을 관대함과 아이들의 순간적인 환심을 사기 위해 펑펑 낭비해버리는 일은 없을 것으로 다짐해본다. 아이들에게 불 필요한 옷 가지나, 과대한 수준의 용돈을 준다 거나 등의 일을 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해본다. 그래서 훗날에 내가 노후 마련이 되어있어서, 아이들에게 손 벌릴 일이 없어야 하지 않겠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2. 인자함과 잔인함 


지나친 자비로움으로 혼란을 방치해서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약탈당하게 하는 군주보다, 소수의 몇 명을 시범적으로 가혹하게 처벌해서 질서를 잡는 군주가 더 자비롭다. 


나의 친정 엄마랑 대비(?) 되게 나는 인자한 엄마가 되리라 다짐하며 아이들을 키우게 됐다. 워킹 맘인 나는 낮 시간 아이들과 함께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저녁 시간에는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허용하는 엄마가 되고자 했다. 가장 늦게 유치원 방과 후 반에서 픽업되는 아이들이 가여워, 나의 고픈 배를 부여 잡고 해가 저물도록 놀이터에서 놀게 했다. 꼭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수퍼에 들려서 과자 사탕을 양손에 들려주었다. 집에 도착해서는 나는 이미 기진맥진해 있어서 이때부터 혈압이 오르고 배는 고프고, 관대한 엄마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고성방가 하는 엄마로 돌변하여 아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느라 바빠지곤 했다. 


절제된 엄격함 - 군주는 신중함과 자비로움이 적절히 안배된 태도로 행동해야 한다. 그러면 지나친 자신감으로 경솔하게 처신하지 않고, 지나친 의심으로 주위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나는 아이들을 놀이터에서 놀리는 시간과 과자와 사탕의 허용치를 나의 체력과 아이들 건강을 염두에 두고 행동 했어야 했다. 기준을 먼저 말해주고 조금씩 허용치를 늘려가는 방향으로 삼았다면 관대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텐대 말이다.



3. 경멸과 미움을 피하는 방법


군주가 경멸을 받는 경우는 변덕이 심하고 경박하며 여성적이고 우유부단하다고 여겨지는 경우이다. 군주는 위엄, 용맹함, 진지함, 강건함을 과시해야 하고, 백성들의 사적인 분쟁에 대해 자신이 내린 결정을 번복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나는 여기서 망했다. 이미 나는 변덕이 심하고 우유부단하기 이를데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결정은 번복하기 위해 하는 것 같다. 우리 큰애와의 공부 및 레슨 계획에 있어서 항상 그러한데, 아이가 영어 학원으로 힘들어 할 때이다. “엄마만 믿어! 엄마가 다 공부 봐 줄게!” 해 놓고는, 엄마라는 사람이 오늘은 피곤해서, 오늘은 졸리니까, 오늘은 금요일 저녁이니까 살짝 쉬어 가고. 이러기를 반복하다가 내 입에서 “엄마가 어떻게 네 영어를 책임지겠냐?” 라는 소리까지 나오게 된다. 아이들이 이런 엄마를 보면서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겠는가?


4. 군주의 측근 관료들


측근들이 유능하고 충성스럽다면 사람들은 군주도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측근들이 뛰어날 것이 없고 불충하다면 사람들은 군주를 낮게 평가한다. 그 군주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가 바로 그들을 선임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내가 늙어서 한 75세쯤 되고, 우리 아이들이 40세 중 후반쯤 되었을 때, 그렇게 한 자리에 모여서 담소를 나눈다고 상상을 해본다. 주위에서 우리를 바라보며 참 화목하고 아름다운 가정이라고 바라봐 주었으면 좋겠다.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서로가 바라는 것 없이 도움을 주고픈 마음만 그렇게 있을 수 있는, 함께 여서 아름다운 그런 가족이고 싶다. (그런데 내가 75세 된 나의 상상 속 가족 울타리에 남편은 왜 포함이 안 되어있지? 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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