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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세경 Jun 03. 2023

단풍과 시 그리고 할머니

20년 11월에 발행했던 글을 퇴고하여 재발행하는 글입니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나의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라고 시인 로스케는 말했다. 무릎이 아파 화장실에 갈 때 안간힘을 써야 하는 것도, 장날에 혼자 힘으로는 시장에 가지 못하는 것도, 손자에게 밥 한 끼 해주지 못하는 것도, 그래서 미안해하는 것도, 모두 할머니의 잘못이 아니다. 단지 90년의 세월을 보낸 흔적일 뿐 절대로 그녀의 잘못은 아니다. 어렸을 때 할머니의 손에서 자란 나는 어느새 30대가 되었고 할머니는 90대를 바라보고 있다. 그냥 시간이, 꽤나 많이, 흘렀을 뿐이다.


'여보셔?... 워이!'


할머니가 전화를 받을 때 하시는 말이다. '여보세요' 하며 전화를 받았다가 전화한 사람이 나라는 걸 알게 되면 '워이!'라고 하신다. 반가워서(라고 믿는다) 내뱉는 의성어인데 거기에 담긴 강한 엑센트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존재 자체로 사랑을 받는 느낌이랄까, 그녀의 환대에 감사하다. 온전히 예뻐만 해주는 할머니와 그 마음을 좋아하는 나. 가까울수록 서운할 일도 많아지는 게 사람사이인데 할머니와 나는 서로 안 좋은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다. 완벽에 가까운 관계, 때로는 그런 것도 있다.


할머니와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 가장 큰 이유는 할머니 옆에서는 그냥 어린 손자로만 남는 것 같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면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남은 어떤 ‘악다구니’가 사라지는 것 같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세상의 입체감을 이해하는 일인데 거기에는 어린아이의 순수성과는 거리가 있는 현실의 독기가 서려있다. 시험을 잘 보기 위해 커닝했던 기억, 나보다 잘난 친구에 대한 질투, 필름이 끊긴 후의 지독한 숙취, 이유를 모르는 이별통보, 새벽 세시의 외로움, 면접 탈락의 허탈함, 초라한 통잔잔고, 너무한 집값, 세상에는 화목하지 않은 가정이 더 많다는 것, 인간의 어리석음, 평화를 위한 전쟁, 자유에서 오는 불안, 너무 사랑하다 보면 너무 미워지는 마음, 등등 어른이 되어가며 알게 되는 세상의 면면은 그다지 아름답지만은 않다. 고통은 인간을 성장시키기도 하지만 비겁하게 만들기도 한다,라고 누군가는 말했고 나 역시 어른이 되어 성숙해진 면도 있지만 그만큼 때 묻은 면도 많다.


하지만 할머니 앞에서는 가장 순수했던 나로 돌아가는 것 같다. 쨍한 햇볕에 말린 새하얀 이불처럼 깨끗하고 뽀송한 그런 사람이 되는 것 같다. 살아가는 철학도 필요 없고 사람을 대하는 처세도 필요 없는 아이, 살아가는 불안도 모르고 세상사는 외로움도 모르는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 할머니는 그저 내 끼니를 걱정해 주고 나를 착하다고만 하신다. 가끔은 나보고 츤재(천재)라고도 하신다. 할머니는 나에게 5월 어느 산의 물 맑은 계곡 같은 분이다.


할머니가 이제는 제대로 걷지를 못하신다. 햇살 좋은 가을날 수목원에 가서도 산책을 하지 못한다. 원래도 무릎이 아프셨지만 올해 들어 부쩍 더 나빠지셨다. 연초에 몸살을 크게 앓으신 후로는 회복을 제대로 못하신 것이다. 어느 날은 나에게


"니 증조할머니가 88세 때 돌아가셨어..."


라고 하셨다. 뒷말은 하지 않았지만 지금 88세 이신 당신이 이제는 떠나야 할 때가 아닌가,라고 느끼신 것 같다. 표정은 어두웠고 가끔은 초점 잃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기도 하셨다. 아직도 뉴스를 보며 트럼프보다는 바이든이 낫다고, 그 양반 얼굴이 더 점잖다고 하실 만큼 머리는 총명하신데 몸이 그걸 못 따라가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말은 항상 괜찮다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세경이 장가가는 건 봐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지난 토요일은 오랜만에 할머니와 둘이서 시간을 보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는 건 오랜만이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데 월세를 내어 준 윗집 아저씨 얘기를 하셨다. 할머니 집 2층의 세입자에 대한 이야긴데 원래는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25만 원을 받기로 했다. 근데 세입자의 큰 아들이 사업을 한다고 세입자의 보증금을 들고 떠났다고 했다. 그래서 아저씨는 보증금을 입금하지 못했고 미안한 마음에 이자를 계산해 30만 원씩 월세를 냈다. 근데 할머니는 사정이 딱하다며 그냥 25만 원만 내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했다. 아저씨는 죄송하다며 사양했지만 할머니는 그냥 그렇게 하라고 하셨고 그게 고마웠던 아저씨는 어느 날 할머니에게 포도를 한 박스를 사다 주셨다. 할머니는 그냥 받기만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 5만 원을 봉투에 넣어 아저씨에게 드렸다. 먼저 돌아가신 부인의 납골당에 꽃이라도 사가라고, 그러라고 주신 돈이었다.


할머니의 얘기를 듣는데 여러 생각이 들었다. 살다 보니 앞에서는 달콤한 말을 하면서도 뒤에서는 자기 잇속만 챙기는 사람을 여럿 봐왔던 나였다. 그런 걸 보며 나는 그런 것에 당하지 않겠다고, 내 것은 내가 지키겠다고 다짐하던 나였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못하는 습관이 생겼다. 저 사람이 하는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포장하는 말인지 아닌지, 속내는 무엇인지 자꾸 생각하게 된다. 그게 정말 큰 사기나 나를 일부로 위해하는 일이 아니어도 단지 자기가 조금 편하려고, 일하는 책임을 나에게 넘기려고 그런 처세를 부리는 사람도 많다. 사소한 일도 상대방이 그런 의도를 가졌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나쁘다. 그래서 자꾸 사람들의 말을 곱씹게 된다. 진짜 원하는 게 뭘까, 진짜 바라는 게 뭘까, 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사실은 나를 위한 일이지만 당신을 위해서 그러는 거라고, 당신을 위해서는 이렇게 하는 게 맞지 않겠냐고 설득할 때도 있다. 그런 태도는 점점 더 자연스러워지고 그런 기술은 점점 더 교묘해진다. 나 또한 자기 밥그릇만 챙기게 된다는 말이다. 늘 그런 식으로 만 행동하는 건 아니고 진심으로 사람을 대할 때도 있지만 살다 보니 작은 것 하나하나 자꾸 내 밥그릇에 더 예민해진다.


그래서인지 최근에 읽은 <연탄길>,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그런 감동적인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책에서 말하는 동화 같은 이야기는 세상에 없다고, 단지 사람들을 교화하려고 만들어 놓은 교과서 같은 책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사회, 사회의 어두운 면은 왜 감추고 따뜻하고 행복한 일만 책에 담아 놓았을까, 좀 더 솔직한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냐고 생각하던 나였다. 어쩌면 그런 이야기만 하는 것도 음식을 편식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말이다.


근데 웬걸 <연탄길>처럼 극적인 이야기는 아니어도 그 비슷한 이야기가 내 옆에 있었다. 그것도 나와 가장 가까운, 나를 키워준 할머니가 주인공인 이야기였다. 세입자에게 부인의 납골당에 꽃이라도 사가라며 5만 원의 용돈을 주는 사람이 나의 할머니였다. 담담하게 그런 얘기를 하는 할머니를 보며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손해를 보더라도 누군가에게 진실한 연민을 베풀 수 있는 게 멋있어 보였다. 손해 보지 않기 위해 누군가를 의심하는 것이 팍팍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똑똑함이라고 여겼는데 어쩌면 그게 정말 중요한 자질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그런 것 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 수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언젠가 노인정의 어떤 할머니가 우리 할머니에게 자기 손자를 자랑했다. 대기업에 다니는 손자가 차를 사서 할머니를 찾아왔다고, 그런 자랑을 할머니에게 했다. 그걸 듣고 할머니는 나에게 그 회사가 좋은 회사냐고 물었다. 아마 부러워서 그랬던 것 같은데 그 모습이 귀엽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 자랑을 이겨버릴 '손자의 자랑거리'를 만들어 주지 못해 미안하기도 했다. 그런 인간적인 모습도 있는 할머니였지만 그와 별개로 햇살 밝은 가을날 소파에 앉아 들려준 윗집 아저씨에 대한 연민은 정말로 멋있었다.


그날은 시처럼 아름다운 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에 빨간 단풍이 떨어져 바람에 휘날리는 날이었다. 그런 날씨에도 잘 걷지 못하는 할머니가 안쓰러웠고 나에게 밥을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는 게 마음 아프기도 했다. 밥을 못해주는 건 절대로 할머니의 잘못이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시는 게 미안했다. 시간이 지나 할머니와 이별할 때가 되면 그때는 정말 어른이 되는 걸까. 어린 날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진짜 어른이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묵직하다.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부터 나는 할머니와의 이별을 두려워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다. 할머니가 조금 더 건강하게, 조금 더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가족 곁에서 조금 더 오래, 머무르셨으면 좋겠다. 그러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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