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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ma Yong May 28. 2019

세월의 간극을 뚫고 나온 지난 시대의 영웅 <돈키호테>

30년의 기다림 끝에 만난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레전설'로만 남을 뻔한 영화


영화감독 '테리 길리엄'의 프로젝트는 1989년에 시작되었다. 소설 돈키호테를 자신의 색깔로 변주한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는 30년 가까이 만들어지지 못했던 작품이다. 1998년에야 조니 뎁을 주연으로 제작을 시작한 영화는 그동안 천재지변과 투자 사기, 주연 배우의 사망 등 여러 이유로 매번 엎어졌다. 긴 세월 동안 제작의 불씨가 다시 타올랐다가 사그라들었고 그만큼 많은 배우가 캐스팅되었다가 하차했다. 영화를 만드는 험난한 과정을 따로 엮은 다큐멘터리 <로스트 인 라만차>까지 나올 정도다. 영화팬들 사이서에도 테리 길리엄이 끝내 작품을 완성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긴 세월 표류하던 영화는 마침내 '아담 드라이버'와 '조나단 프라이스' 주연의 영화로 완성되었다.


감독 테리 길리엄과 배우들



미치광이 돈키호테와 비열한 산초


잘 나가는 광고 감독인 주인공 '토비'는 스페인에서 돈키호테를 소재로 광고를 제작 중이다. 프로덕션이 난항을 겪는 상황 속에서 우연히 자신이 졸업작품으로 만든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의 DVD를 보고 젊은 시절의 열정을 추억한다. 토비의 작품은 전문 배우가 아닌 실제 스페인 시골 마을의 주민들을 캐스팅해 만든 영화. 그는 영화를 촬영했던 마을을 다시 방문하고 돈키호테를 연기한 구두수선공 '하비에르'와 재회한다. 하비에르는 자신의 배역에 심취한 나머지 촬영이 끝난 십 년 뒤에도 자신이 진짜 돈키호테라고 믿고 있다. 미치광이 기사 돈키호테가 되어버린 하비에르는 토비를 자신을 구하러 온 하인 '산초'로 오해하고, 토비는 강제로 기이한 모험을 떠나게 된다.  


토비 역을 맡은 아담 드라이버는 한국 관객들에겐 새로운 <스타워즈> 시리즈의 '카일로 렌' 역으로 얼굴을 알린 배우다. 여러 굵직한 작품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 그가 연기한 토비는 자기만 아는 속물이다. <알라딘>의 떠벌이 앵무새 이아고처럼 쉴 새 없이 갖은 불평을 쏟아내며, 벌어지는 사건과 사고 속에서 책임을 회피하기 바쁘다. 비열하고 치졸한 토비/산초의 캐릭터는 돈키호테와 대비를 이룬다. 돈키호테/하비에르를 움직이는 동기는 세속의 욕심이 아닌 (뇌까지) 순수한 기사도 정신이다. 하비에르가 상상하는 자신의 모습은 환상 속의 기사이지만 주위 사람들에겐 그저 환장할 노인네다. 




지난 시대의 이야기를 추억하다


테리 길리엄의 시선은 늘 스크린 안의 세상을 과장하여 담았다.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에서 그가 선택한 구도와 화각은 정제되지 않은 원석과 같이 불완전해 보이지만 역동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영화의 사운드 디자인도 시끌벅적하며 마치 괴력으로 관객을 압도하려는 듯한 인상을 준다.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이야기에 어울리는 연출이다. 얼핏 보면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쏟아져 나온 판타지 어드벤처 영화를 다시 보는 것만 같다. 


돈키호테의 모험은 떠나간 시대를 향한 추억이자 오마쥬다. 세르반테스의 원작은 기사라는 존재가 이미 사라진 시대를 다룬다. 원작 소설은 당시 유행하던 기사도 문학의 클리셰를 모아 풍자한 소설이지만 주인공 돈키호테의 캐릭터만큼은 진정으로 기사도를 찬양하는 인물이었다. 테리 길리엄은 자신이 새로 변주한 이야기 안에서 과거의 모험담과 그 형식을 추억한다. 왁자지껄한 모험이나 활극은 오늘날 영화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장르다. 선악의 단순 대결과 힘세고 정의로운 영웅은 자취를 감췄다. 현대 영화는 복잡한 서사와 인물 구도, 반전을 기본 요소처럼 여긴다. 속고 속이는 두뇌싸움과 피를 흘리는 복수, 대의보다 개인의 생존을 위한 대결이 더 눈에 띈다. 선역이 꼭 순수한 정의를 위해 움직이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악역의 횡포가 나름대로의 도덕과 정의에 기반한 경우가 많다. 영웅은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지 고뇌하며, 자그마한 떠밀림에도 쉽게 타락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선은 선이고 악은 악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사악한 영주, 착취당하는 백성, 위기에 빠진 공주와 사나운 괴물, 용감한 기사와 하인의 모험. 신화와 전설 속 뚜렷한 선악 구분은 이토록 단순한 서사를 가지지만 그만큼 누가 옳고 그른지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돈키호테의 정신세계가 머물러 있는 소설 속 기사의 시대와 달리, 현대는 여러 종류의 갈등과 정의가 뒤엉켜있는 시대이다. 토비는 자신이 겪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게 되고, 이제는 사라졌다고 믿어온 전설 속 이야기의 한 복판에 서게 된다. 

 



돈키호테는 미치광이일까 


그저 기사의 이야기와 멋진 모험에 대한 열망만이 돈키호테를 미치광이로 만들었을까. 돈키호테/하비에르가 받드는 기사도는 땅에 떨어진 정의와 도덕을 바로 잡을 나침반이다. 그의 행동은 사람들의 놀림과 지탄을 받을 만큼 우스꽝스럽지만, 이는 모두 순수한 정의감에서 나온다. 돈키호테는 풍차만한 거인의 위협과 악랄한 마법사의 저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칼을 부여잡는 용감하고 선량한 인물이다.


영화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들 중에서 자그마한 도덕심이라도 간직한 이는 찾기 힘들다. 제대로 정신이 박힌 현실주의자라 자찬하는 이들은 돈과 권력, 폭력에 쉽게 굴복한다. 21세기 돈키호테와 산초가 떠도는 스페인의 황야는 악이 너무나도 쉽게 이기는 곳이다. 선한 이가 패하고 악인이 승리하는 세상에 침묵을 지킨 채 살아간다면, 결국 광인의 삶보다 나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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