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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움 Aug 08. 2023

이 땅의 특수교사가 되어

* 배경 출처,  책「괜찮아, 선생님이 기다릴께」(저자 김영란, 출판사 사계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폭우가 조금씩 사그라지는 것 같습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좋을까요. 

하얀 백지를 마주하고 있는 지금도 저는 망설여지기만 합니다.


특수아동 교사 폭행 사건으로 부터 시작해,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하신 서이초 선생님 사건을 거쳐 특수아동 학부모 갑질사건으로 점철된 주호민 사태까지.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이제는 교권침해라는 본질을 벗어나 보이기도 합니다.

교권 보호와 정당한 교권의 행사에 대한 발전적인 논의보다 

'금쪽이'로 불리는 아이들과 통합교육을 받는 장애학생, 장애아동 부모에 대한 날 선 비난이 더 잘 보이는 건 왜일까요. 

특히 주호민 '개인'의 사례가 '장애아동 부모 일반'의 예로 대치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저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현 사태에 대한 저의 생각을 말하자면, 

특수교사의 노고에 대한 급작스러운 사회적 관심과

장애아동을 양육하고 있는 부모를 향한 편견 섞인 감정의 배설이 전혀 달갑지가 않습니다. 

주호민 씨 부부의 선을 넘은 행태를 이해하고 옹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쩌다 이 땅에 태어난 장애아이와 

그들의 인생 전부를 감당하고 있는 가족,

특수교사의 이름으로 살고 있는 저와 같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부모의 이야기


첫째 현이가 세 살이 되어 처음 어린이집을 등록하던 날입니다.

그때 저는 아이의 손을 굳게 잡고 터질 듯 울렁이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어린이집의 문을 두드렸어요. 

원장님과 주임 선생님이 밝은 표정으로 저희 모자를 반겨주셨지요. 

솔직히 고백하건대, 저는 두 분 선생님의 얼굴을 마주하며 이들이 뉴스에 나오는 어린이집 아동 학대범이 아니길 간곡히 빌고 있었습니다. 

그리곤 '우리 아이에게 함부로 했다가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는 저를 발견하고야 말았죠.  

의심은 아이가 밝고 씩씩하게 어린이집 생활을 하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걷을 수 있었어요. 


현이 출산 직전, 저는 두 분의 학부모님으로부터 상당한 오해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억하심정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임산부를 앞에 두고도 거침없이 쏟아내던 폭언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음해하고 비방하던 모습에 적잖은 상처를 받고 출산휴가를 들어갔어요. 

의연한 척했지만 정신적 내상이 꽤 심했는지, 어린아이를 양육하는 정신없는 시기에도 악몽에 시달리고 자다가 벌떡 일어나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 현이가 어린이집을 등록하던 날, 저는 어렴풋이 깨달았습니다. 

그날 학부모님의 이해하지 못할 분노와 절규에 가까운 날 선 폭언의 실체를요.


저는 감히 장애아이를 키우는 부모님의 심정을 이해한다고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머지않아 성장을 멈출지 모를, 혹은 더 이상 크지 않는 아이를 평생 키워야 하는 이의 심정을요. 

장애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특히 발달장애아를 키운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아이의 키가 커지고 인물이 나는 것이 반가우면서도 반갑지 않고,

발달 상의 아주 작은 성장이 크게 기쁘다가도, 약간의 퇴행이라도 보이면 그보다 깊이 좌절하며

새로운 부적응적 행동이 발견되거나 자극의 과잉으로 돌발 행동을 보이기라도 하면

아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전전긍긍하게 되는 모든 순간들이 함께하게 된다는 것이요. 

자기 의사표현을 충분히 하지 못하는 아이의 손을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맡긴다는 건

조심스러움과 불안을 넘어선 공포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장애아이의 부모라는 이름의 무게는 무겁습니다. 

사회에서 쌓아온 나의 경력과 지위, 평판, 경제력과는 무관하게

끊임없이 설명하고 사과하고 당황하고 수습하는 삶을

당연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을 겁니다. 


강하게 마음먹어도 

몇 번씩 무너지고

불안에 잠식되고

분노에 잡아먹히기도 합니다. 


장애아이의 부모이기 이전에,

그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교사의 이야기



특수교육에 몸 담는다는 것은 여러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선생님에게 언제든 마음을 열 준비가 되어있는 정 많은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한 날들과 

똥 방귀 같은 유치하고 어설픈 개그에도 배꼽이 빠질 듯이 웃어주는 순수함이 고마운 날들.

치사하게 간식 하나로 요리조리 유인하며 하기 싫은 공부나 운동을 시켜도 따라와 주는 게 예쁜 날과

성질이라도 날라치면 하늘 같은 선생님(반어법입니다.)의 머리채를 쥐고 흔들고, 꼬집고 물어뜯어 괘씸한 날들이 함께 한다는 것.


열심히 한 가지를 가르쳤더니, 방학이 지나면 모조리 리셋돼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상황과

선생님과 친구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행동도 불사하는 아이들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


나의 본래 성격과 무관하더라도 때론 엄하고 무섭게, 크고 과장되게 말하고 행동하며

사건의 심각성을 조금이라도 이해시키기 위해선 다른 사람의 시선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루 말할 수 없는 봉변을 당할 때도 있고

내 몸이 찢어져 피가 나는 상황에서도 아이를 진정시키는 일이 우선일 때가 있으며,

눈앞에서 사라지기라도 하면 혹시나 당황해서 울고 있진 않을까, 

지나치게 흥분해서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거나 사고라도 생기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모든 일을 제쳐두고 뛰쳐나갈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더딘 성장과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아이들에게 실망하고 지치지 않기 위해

교사 스스로를 다독이고 마음을 잡아야 할 일이 많다는 것.


특수교사로 산다는 건 이런 일입니다. 




주호민, 그리고 끝나지 않은 이야기


아이의 새로운 부적응적 행동의 원인을 찾기 위해 녹음기를 가방에 넣어 보냈다는 주호민 씨의 인터뷰를 보며 마음이 참 복잡했습니다. 

우선 교사로서 아이의 부모님으로부터 정당한 교육 활동에 대한 동의 없는 녹취를 당했을 선생님의 상처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전달하지 않는 아이를 둔 부모의 답답함이 모두 이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문제 상황을 원만히 해결할 수 있었음에도 기어이 교사를 고발하고 직위해제에 이르게 한 주호민 씨 부부의 선택에 대한 부분입니다. 

학부모가 교사를 아동학대로 고발하고 재판장에 세우는 의도는 너무나 명확하기에 저는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게 그 보다 뼈아픈 것을 주호민 씨를 비난하는 댓글들이었습니다. 

이토록 날 선 반응이라니요. 

하나하나가 비수처럼 내리 꽂히는 기분이었습니다.

이 기사를 부모님들도 읽고 계시겠지요?

댓글을 함께 읽고 계실 많은 부모님들이 걱정됐습니다.

 

저는 특수교사의 노고와 희생정신, 신념에 대한 고귀한 환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부모님과 대척점에 서서 교권을 보호해 달라 소리치고 싶지도 않습니다. 

장애아이를 키우는 데 있어 부모와 교사는 한 팀이지, 결코 적대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여느 부모님들과 다르지 않게, 아이를 바르고 반듯하게 키우기 위해 애쓰시는 장애아 부모님들이 참 많습니다. 

아이를 위해, 특수교육과 공동체를 위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노력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때론 안쓰럽고, 때론 위대하며, 때론 존경스럽기까지 한 다수의 선량한 부모님들이 

이번 일로 많은 상처를 받게 될까 두렵습니다. 

사회 통합과 편견 없는 사회를 꿈꾸며 다져온 시간들이 무자비한 혐오 앞에 또다시 무너져 내릴까 하는 걱정도 되었습니다. 


주호민 사태는 그저 '개인'의 사태로 일단락되면 좋겠습니다. 

주 씨의 행동은 '특수'부모여서가 아닌 여느 '별난 부모'의 한 행태일 뿐입니다.

그리고 경솔한 행동의 결과는 고스란히 그의 몫입니다. 

 

이번 사태를 조금 먼 시선으로,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길 당부드립니다. 


세상에 장애를 갖고 태어나고 싶은 사람은 없고,

장애아이를 낳길 희망하는 부모도 없습니다.

이는 넉넉치 못한 가정에서 태어나 남들과는 다른 고충을 겪거나,

불의의 사고로 인해 원치 않는 후유증을 얻게 되길 희망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행동을 조절하지 못하는 금쪽이와,

자극을 감당하지 못하는 장애아이.

이들은 모두 격리시킬 대상이 아니라 같은 공기를 마시고 같이 살아가야 할 대상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쉽고 간단해 보이는 '사회적 격리' 요구가 아니라

'포용력은 높이고, 사회적 압력은 낮추는 방안'의 모색과

보완책을 마련하기 위한 논의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올까요?

오래된 질문을 다시 끄집어 내 봅니다. 



 표지책「괜찮아, 선생님이 기다릴께」(저자 김영란, 출판사 사계절)

https://www.youtube.com/watch?v=QUzeGJvpG6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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