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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진 May 13. 2022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영화계의 큰 별 강수연 배우님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부산국제영화제를 준비하면서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라는 말을 한 걸로 유명한데, 이 말은 영화 베테랑에 사용되면서 전 국민이 아는 문장이 되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샀다. 내 기억에는 문장 앞에 "시발"도 있었던 것 같은데, 어쨌든. 최근에 대기업 외주 작업에 대한 제안을 여러 개 받았는데, 모두 엎어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싶을 정도로 모두 그렇게 되었다. 물론 엎어진 이유도 각양각색인데, 그간 이런 일도 크게 안 겪고 편히 작업했구나 싶다. 콕 집어서 수수진과 작업하고 싶은 브랜드를 만났던 건 정말 큰 행운이었다. 뭘 그려도 칭찬받았던 시절이 그립다. 불과 그게 몇 주 전이라는 사실이 나를 더욱 서글프게 하긴 하지만 말이다.



애초에 기획했던 프로젝트 자체가 없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런 건 그 누구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만, 보통의 경우는 비슷한 분위기의 작업을 하는 작가들을 여럿 컨택해 작업비를 가장 낮게 부른 사람이 선택되고, 나머지는 탈락의 고배를 마시게 된다. 여러 작가에게 단체로 보낸 메일을 받은 적도 있었다. 뭐 시장 구조가 다 그런 거니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지혜로운 대처일지도 모르겠다. 대놓고 말해서 그렇지 않은 분야가 어디에 있겠나. 이 세상에 창작자는 많고, 그림도 누구나 그릴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작가들은 입찰 경쟁에 스스로 들어간 적도, 그럴 의사도 없다는 거다.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스타일로 작업을 하는 개인이 의도치 않게 입찰에 들어가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우리는 클라이언트에게 상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정말이지 불편하다. 쇼핑의 주체가 아니라 쇼핑의 대상이 되는 경험. 하지만 이런 말을 대놓고 할 수 없는 이유는, 이런 말을 하면 일이 끊길 수도 있으니까. 두려우니까. 동시에 그림 작가라는 사람들은 워낙 일하기 까다로운 종류라는 인식이 이미 시장에 내재되어 있기에 더욱 몸을 사리게 된다. 마감에 허덕이며 겨우겨우 원고를 그려내는 그림 작가의 이미지, 그 누구의 탓도 하고 싶지 않지만, 시장에는 이미 그런 이미지가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원래도 까다로운 사람들로 평판이 났는데, 더 까다롭게 굴면 당연히 일이 끊길 것 같아서 최대한 직장인 마인드로 클라이언트를 대하고 있다. 완전히 시장 논리에 적응한 사람으로서 그림도 노동으로 치환해 모든 프로젝트에 임한다. 단 한 번도 마감을 어긴 적이 없다. 삶의 우선순위를 마감 날짜를 지키는 데 두고, 가족들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서운해하지 말라고. 가족보다도 나에게는 '마감'이 우선이라고. 직장 생활할 때 팀장님의 비위를 맞췄던 것처럼, 점심 식사는 뭘로 하시겠어요?의 태도로 노동에 임하는 것이 나의 프로페셔널함이고, 실은 그래서 꾸준히 일이 들어오는 것 같다.


근데 이렇게 일 잘하는 일러스트레이터 수수진도 무언의 입찰 경쟁에서는 결코 벗어날 수가 없다. 클라이언트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나가리 되는 거지. 뭐. 모든 게 클라이언트의 의사에 달려있다. '물건'에게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다. 시장에서 잘 팔리는 물건이 되려면, 질도 괜찮고, 가격도 적당해야 한다. 그 물건이 된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우리 가족들은 나를 위로한다. 전적으로 맞는 말이다. 물건이라는 말은 다소 극단적인 표현이고, 어쨌든 대기업의 러브콜을 받는 작가가 몇 명이나 되겠나. 그리고 나 같은 경우, 아주 짧은 시간에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매우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조금 더 본질적인 질문을 해보자. 나는 왜 창작을 하게 되었나? 나는 이 질문을 모든 창작자에게 하고 싶다. "왜 창작하세요?"


나는 대기업의 하청을 받고자 창작을 시작한 게 아니다. 단 한 번도 그럴 생각으로 창작을 대한 적이 없다. 대기업의 일을 하고 싶었다면 대기업에 입사했을 거다. 아니, 그래서 애플코리아, 라인 플러스를 거쳤고, 그들을 위해 충성된 종으로 일했다. 창작의 영역까지 그들의 것으로 만들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시작도 안 했을 거다. 그렇지만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등장한다. 그럼 돈은 어떻게 벌 거야? 가끔 있는 강의와 개인사업자 규모의 작업으로는 생활을 유지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창작자가 먹고살려면, 특히 나처럼 그 누구의 경제적 지원도 없이 스스로를 먹이고 입혀야 하는 형편이라면, 응당 대기업의 작업을 맡고 싶다. 게다가 누구나 아는 브랜드와의 협업은 작가에게도 득이 되는 일이다. 그렇다. 이건 밥줄이다.


나는 자본가를 욕보일 생각도 없고, 자본주의가 완전히 엉망이라고 말할 생각도 없다. 무려 나는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하는 주식도 하는 걸? 신자유주의는 완전하지 않지만, 인류가 이륙한, 현존하는 시스템 중 그나마 훌륭한 시장 형태라고 생각한다. 조선 시대에 태어났다면 나는 누군가의 노비로 훨씬 더 고된 삶을 살았을 거다. 2022년 현재는 적어도 나의 사회적 지위가 '노비'가 아닌 '개인'이니 좋은 일이다. 하지만 내가 믿는 건, 인류가 계속해서 진보를 이뤄왔다면, 지금 이 시스템에 만족하고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뭔가 께름칙하다고, 기분이 나쁘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하며, 클라이언트로 대변되는 대기업에 소속된 개인으로서, 클라이언트의 파트너사에 소속된 개인으로서, 그 누구도 조직을 대변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사회적 구조 안에서는 결국 우리 모두는 서로가 없으면 소외된 개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걸 마음속 깊이 깨달아야한다.



내가 감히 모든 창작자를 대변할 수는 없다. 그리고 개중의 많은 창작자는 나의 의견에 공감하지 못할 걸 잘 알고 있다. 자기가 잘 하면 되지 왜 징징대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거다. 하지만 적어도 나의 징징거림의 화살은 연약한 개인을 향하지 않는다. 나의 화살은 늘 개인을 억압하는 사회 구조를 향한다. 나는 이럴 때마다 프랑스 혁명을 생각하고 8월 15일 광복의 영광을 떠올린다. 깨어있는 개인이 모여 이뤄낸 쾌거를 기억한다. 개인에게는 아무 힘도 능력도 없으며, 대중은 늘 멍청하다는 메시지를 향해 나의 활시위를 당긴다.


(영화인인)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정치적인 이유로 부산국제영화제의 예산이 반 토막 났을 때 많은 영화인 앞에서 강수연 배우님이 했던 말이다. 그녀는 적은 예산으로 더 멋지게 영화제를 이끌었다. 그렇다.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나에게는 여전히 색연필과 종이가 있고, 여러 질감의 브러시가 저장된 아이패드가 있으며 키보드가 부서져라 글을 쓸 수 있는 분노라는 원동력이 있다. 이것들이 내가 가진 가오다. 나는 이 가오를 가지고 앞으로는 무언의 경쟁에 개인을 집어넣는 일에는 결코 내 이름을 올리지 않을 것이다. 글을 쓰다 보니 오히려 일이 끊길 일은 없을 것 같다. 되려 이 메시지에 공감하는 여러 개인과의 연대를 통해 더 좋은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긴다. 시발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그렇지 않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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