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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아 Jul 26. 2022

새로운 시작 | 호주 1

호주로 떠나는 날이다. 호주는 내 고향 서울과도, 내가 살았던 그 어떤 도시와도 다른 낯선 곳이다. 서울의 2022년 7월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덥고 습했다. 그에 반해 캔버라의 7월은 패딩과 히터가 필수라고 한다.


떠나기 전은 언제나 설렌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함께 살아가고 여행하는 상상을 해본다. 내 상상 속 호주의 나는 영화 월플라워의 찰리다. 혼자 있던 내게 멋진 옛날 음악을 사랑하는 친구가 말을 걸어온다. 그 친구의 이상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친구들을 만나게 된 나는 전에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경험을 하며 사랑받고 받아들여짐을 느낀다.


곧 다시 현실로 돌아온 나는 한 동안 보지 못할 사랑하는 가족들과 소중한 친구들에게 인사를 한다. 대충 싸 두었던 캐리어에 짐을 꾹꾹 눌러담고, 항공사 체크인과 출국절차까지 밟고 나면 어느새 비행기 안이다. 가난한 대학생인 나는 최근 치솟은 유류세가 아니더라도 직항은 타지 못하기에 싱가포르의 창이공항에서 경유를 해야 한다. 하지만 하루가 꼬박 걸리는 경유 비행이 주는 낭만이 존재한다.


창이공항으로 가는 첫 번째 항공편이 출발하고 나서야 나는 미리 다운받아 둔 노래나 넷플릭스 쇼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행스럽게도 스무살 즈음 즐겨 듣던 슈게이징 플레이리스트가 다운받아져 있다. The Breeders의 <Off You>는 내 불안했던 스무 살 인생의 배경음악이다. 스무 살의 내가 영화의 주인공이라면 첫 등장 신에서 비 오는 날 버스를 타고 운전기사님 바로 뒤의 일인 좌석에 앉아 투박한 유선 소니 헤드폰을 끼고, 그 헤드폰 안에서는 이 노래가 나와야 했다. 비행기 안에서 삼 년 만에 다시 듣는 이 노래의 가사는 새롭게 다가온다. 멜랑콜리한 기타 리프 위로 가수가 편안한 목소리로 부른다.


I land to sail

Island sail

Yeah we're movin'

Yeah we're movin'


"I land to sail," 떠나기 위해 도착한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내 인생은 항상 떠나기 위해 도착해오는 삶의 반복이었다. 나는 항상 도착함과 동시에 곧 있을 이별을 함께 준비한다.


<여행의 이유>라는 책에서 김영하 작가는 새로운 곳으로의 이주가 주는 안정감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 안의 프로그램은 어서 이 편안한 집을 떠나 그 고생을 다시 겪으라고 부추기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어디로든 떠나게 되고, 그 여정에서 내가 최초로 맛보게 되는 달콤한 순간은 바로 예약된 호텔의 문을 들어설 때이다. 벨멘이 가방을 받아주고 리셉션의 직원은 내 이름을 알고 있다. '나는 다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제 한동안은 안전하다.' 평생토록 나는 이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 1) 낯선 곳에 도착한다. 두렵다. 2) 그런데 받아들여진다. 3) 다행이다. 크게 안도한다. 4) 그러나 곧 또 다른 어딘가로 떠난다.”


스무 살의 내가 유학길에 오르고 싶었던 것에 대한 명분은 넓은 세상과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기 위함이었지만, 속마음은 그저 당시의 삶이 외롭고 충분히 행복하지 못하다고 느끼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도 이주를 여러번 경험해 본 나는 새로운 곳에서의 생활도 똑같을 것이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아야 했지만, 이번에도 내 안에 내장된 프로그램은 나를 이성 대신 이끌었고, 나는 또 다시 비행기 안이다.


호주에서의 삶 역시 때때로 외롭고 언제나 충분히 행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과 처음 떨어져 지내는 기숙사 고등학교에서의 삶에서 그랬고, 처음으로 혼자 떠난 외국생활이었던 홍콩대학교에서의 삶에서 그랬듯이, 언젠가 서서히 받아들여지고 때때로 행복해하며 캔버라를 사랑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반 년이 지나 이 곳을 떠날 때 쯤 완벽히 받아들여지고 충분히 행복하지 못하더라도, 나는 또 새로운 시작에 설렐 테고, 그 때 쯤이면 캔버라에서의 기억은 내 마음 한 켠에 소중한 기억으로 자리할 것이다. 바라건대 반 년 뒤에 호주를 떠나기 전에 여기서 사귄 좋은 친구들과 로드트립을 떠나고 싶다.


로드트립에 대한 행복한 상상만큼 좋은 위로가 되는 것은 내가 이 세상 어디에 있든 언제나 나를 응원해 주는 부모님이 있고 때때로 나를 떠올리며 안부를 물어주는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경유 다섯 시간에 이르러 이를 잊고 슬픔에 빠질 때 즈음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다. 엄마는 매일 새로운 시를 하나씩 필사하시는데, 오늘은 시 대신 내가 방에서 자주 듣던 노래를 필사했다며 사진을 보내오셨다. 우효의 청춘이라는 노래다. 노래 말미에는 엄마의 짧은 일기가 있다.


2022.7.10 (일)

수아가 2학기 교환학생하러 호주 멜버른으로 떠났다.

울 딸이 즐겨듣던 노래들을 듣는다.

가사가 참 좋다. 그녀의 청춘을 응원한다.


창이공항 탑승구역의 사람 가득한 스타벅스에서 엄마의 글을 보고 나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나는 성인이고 부모님과 따로 산 지 벌써 햇수로 칠 년 차지만, 아직도 부모님의 응원이 필요한 가 보다. 나를 믿어주는 엄마에 대한 고마움과 한국과 홍콩에 두고 온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과 새로운 시작에 대한 두려움이 한 데 섞여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몇 년 만에 이렇게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펑펑 울었는 지 모르겠다. 눈물과 함께 내가 느꼈던 감정의 범람도 조금은 썰물로 씻겨내려간다.


비행기에서 자다 깨다 옆 자리 사람과 대화하다 보니 멜번이다. 공항에서 나가는 길을 찾기 위해 심카드부터 산다. 유럽에서 사용해 본 Vodafone이 이 곳에도 있다. 새로운 곳에서의 뜻밖의 익숙함에 반가운 마음이 든다. 공항에서 나가는 문을 연다. 찬 바람이 코 끝이 찡하다. 정신을 확 깨게 만드는 7월의 찬 바람은 내가 호주로 잘 도착했다는 확인이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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