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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망 Aug 17. 2023

잘못 쓰인 이름

세상과 낯가리기


  모든 건 이름으로부터 시작된 것 같기도 하다. 이름을 잘못 쓰면서, 정체성에 관한 실수를 해버렸다. 기억도 잘 안 나는 대과거에, 아이디와 여권 이름을 잘 못 써버리는 바람에.



  네이버 아이디 생성부터가 문제였다. 이전에 버디버디에선 ‘딸기’와 내 이름을 합쳐 한글 아이디를 써왔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이제 네이버 아이디를 만들 차례였다. 초록색 나라, 그곳의 규칙은 이름을 알파벳으로 만드는 거였다. 엄마는 ‘갈고리 (Galgori)’라는 아이디를 추천해 주었다. “너는 지나가기만 하면 거기 있던 물건들을 다 쓰러뜨리잖니 호호.”


… 글쎄, 아무도 그걸 선점하지 않을 거란 점에서 훌륭한 아이디였을 수도.



  나는 한글을 알파벳으로 음차한 것 말고 영어 단어를 쓰고 싶었다. 애꾸눈 후크선장 같은 ‘갈고리’ 말고, 상큼하고 예쁜 어감을. 마침 방 안에 굴러다니던 만화책 <안녕 자두야>가 눈에 띄었다. 자두를 영어로 하면 어떨까?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단번에 갈겨쓰고 가입하기를 눌렀다. 그런데 그만 plum을 plom으로 잘못 써버렸고, 고칠 틈도 없이 네이버 시스템을 통과해 버렸다. 한동안은 스펠링을 틀렸다는 것조차 몰랐다. 짧은 영어 실력을 믿고 사전도 안 찾아보고 대충 만들었던 것이다.



  plom이 어디에도 없는 순수 창작물이란 걸 알아버린 순간, 탄식과 동시에 놀라웠다. 오히려 좋은 거 아닐까? 오타 난 단어는 누구도 쓸 생각을 못 하니까. 나만 아는 단어가 세상에 있으니까. ‘플럼’이 아닌 ‘플롬’. 자두가 아닌 ‘자도’나 ‘자둔’ 정도. 나는 쿠팡, 메가박스, 다음 등의 모든 서비스에도 중복 알림 없이 한 번에 가입할 수 있다. 신나고 자유롭게. 지금도 plom은 내 고유한 이름이 되었다.






  또 하나는 여권 이름의 철자를 이상하게 쓴 것이다. 모든 한국인들은 민정의 ‘정’ 자를jeong 으로 표기하지만, 나는 jeoung 라는 쓸데없이 길고 비효율적인 표기법을 써버렸다. 도대체 ‘u’를 거기에 왜 넣었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지어오우엉-’ 처럼 읽어야 한다. 미성년자였던 나를 대신해 가족들이 좀 봐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원망하기엔 다들 영어 실력이 짧았다. 다른 한국인들은 ‘정’자를 어떻게 쓰는지 레퍼런스를 알아봤어야 하는데, 또 대충 만들어 버린 거다. 영어 이름이 장난이냔 말이다.



  여권을 볼 때마다 약간의 한심함과 자괴감이 몰려온다. 외국인들은 내 이름을 더듬거리며 읽는다. “저...져우엉?” 하고 비슷하게 발음해 주는 걸로 봐서 아예 틀린 건 아니지만, 어쨌든 쓸 때마다 비효율적인 표기법이라고 느낀다. 가끔은 알파벳으로 표기하기 힘든 이름을 가진 어떤 낯선 나라의 국민이 된 기분이다. 그런데도 영어 이름을 고치지 않는 건, 여권을 고치기도 까다롭고 모든 국내 해외 사이트들의 정보를 다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어떨 땐, 오타 난 이름들 때문에 더 세상에 안 섞이는 느낌인건가 싶기도 하다. 낯선 이방인의 느낌이 잘못 쓰인 정체성에서 나오는 기분. ‘민정’이라는 실제 이름은 평범하지만, 아주 특이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낯선 기분을 더 자주 느끼게 될까? 세상에서 튀어나온 채 불응하는 이름들. 그것에 묘한 정이 들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굳이 고치지도 않고 새로운 정체성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나아가서 실수에도 그리 민감하지 않은 성향이 되었다. 이름조차 실수했는데 뭐가 대수랴. 그렇다고 일을 대충 하진 않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에 대해선 오래 자책하진 않는다. 그러니까, 어떤 부분에서는 대충 살자. 오타 난 이름을 바꾸지도 않고 그냥 갖고 사는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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