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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망 Oct 10. 2023

남편의 거울 하이 파이브

세상과 낯가리기




       ‘전세 사기 피해자’가 내가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가끔은 나와 가장 멀다고 생각하던 일이 현실이 되고 만다. 아직도 실감이 안 나는 와중에  차라리 실감 안 나는 게 낫지 생각도 든다. 나와 같은 사람들의 사연이 뉴스와 유튜브에 떠들썩하게 비출 때마다 찬물 샤워를 하고 말지만.


  피해 사실을 알게 된 건 4개월 전. 만기 전에 전세 계약 종료를 알리기 위해 임대인에게 통화를 걸었다. 핸드폰 너머로 ‘없는 전화 번호입니다’ 음성이 들려오는 순간, 소리가 멀어지며 폰화면에 맞댄 귀가 시려왔다. 아, 전화번호를 바꿨구나 깨닫자, 공포가 밀려왔다. 이건 곧 ‘아, 임대인이 튀었구나’다. 



  그 후로 9개월을 지옥 속에 살고 있다. 말로 할 수도 글로 쓸 수도 없는 일들이 가득 펼쳐졌다. 보증보험 연장, 내용증명, 법원 공시송달 등 온갖 법적 절차의 전문가가 되었다. 그 과정들에선 피해자가 모든 걸 정성껏 증명해 내야 했다. 수십가지 서류를 제출하고 전 임대인과 부동산을 상대로 싸우고 보증보험 지점들을 오가며 ‘모르겠다. 그때 가봐야 안다.’ 는 말만 반복해 듣는 나날들. 내가 아는 정보란 92로 시작하는 임대인의 주민등록번호와 등본 주소, 압류 걸린 내역뿐이다. 그에게 당한 피해자는 최소 2~300세대. 모든 게 불확실한 이 상황에서 확실한 건 두 가지다. 나같이 불리한 케이스는 2억 2천을 날릴 가능성도 있다는 것, 1년 가까이 끌어야 돈을 받을 수 있을지 여부를 알 수 있다는 것.



  2억이란 규모의 상실은 세상의 발판을 잃는 것 같았다. 0이 여러 개 붙은 숫자가 무섭게 날 짓눌렀다. 평생 모은 돈이 사라진다니, 자본주의 세상에서 죽음만큼 무서운 일이었다. 평상시처럼 일을 하고 직장 동료와 대화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고, 안 무서운 사람이 없었다. 혼자 침대에 누워 하염없이 우는 시간이 필요했다. 우울증에 걸린 채 힘없이 걷다가 발목까지 다치는 등의 악재가 계속됐다. “어쩌겠어.. 돈보다 네가 더 중요한건데 잊어보자.”라고 남들이 말해줘도 기운은 안 났다. 나는 자꾸만 넘어졌고 더 넘어지기가 두려워져서 걸음을 멈췄다.



  남편은 그 와중에 별 타격이 없어 보였다. 발판이 없는 절벽 끝에서 징검다리를 이어붙여 태연히 뛰어넘는 사람 같았다. ‘뭐지? 너무 괴로워서 미쳐버린 건가? 현실 부정하는 건가?’ 의심할 정도로, 이상할 정도로 그는 잔잔한 호수처럼 멀쩡했다. 결혼 전에 살던 집을 사기 당한 아내의 대출금을 갚아야 하고, 직장도 그만둔 아내를 먹여 살려야 하는 상황에 침착할 수가 있다니.



  “네가 무너지니까 내가 중심을 잡아야지. 돈보다 우리 건강과 시간이 더 중요한 거야.”라고 여러 번 반복해 말해준 덕에 차츰 정신이 들었다. 나는 내 멘탈은 못 믿어도 남편의 멘탈은 믿을 수 있었으니까. 방향과 의미를 잃은 기분이 들 때마다 그의 말들을 수첩에 적어놓기 바빴다. 그걸 잠언집 혹은 시험 족보 대하듯이 자주 들여다보며 정신을 깨워나갔다.



  “네가 힘든 거에 숫자를 매겨서 하나씩 처리해봐. 부담부터 갖지 말고. 불안과 우울, 그런 감정은 붙들고 있지 말고 그냥 놔버려. 멀리서 거리 두고 바라보는 거야. 집주인한테 화병 날 필요도 없어. 어딜 가나 악인은 존재하고, 그걸 시스템으로 눌러야 하는데 우리 사회에서 그걸 못한 거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인 거야. 시스템과 윗선을 고치기 위해 투표를 잘해야 하는 거고.”


  “‘진인사대천명’이라고 불교 교리도 있잖아. 하는 데까지 해보고 그 이상 운의 영역은 우리가 터치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우리가 충분히 노력했다면 결과가 어떻든 받아들여야지 어쩌겠어. 그냥 나는 네가 하고 싶은 거 하도록 서포트 해줄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에서.”

                                                                          - 남편 어록, 수첩 중에서 –






  남편에게 또 추천받은 습관이 있다. 아침이면 거울에 대고 하이 파이브를 하는 거다. 그의 출근 전 모닝 루틴, 리추얼이다. 거울 속 자신과 눈, 손을 마주치며 “하이-파이브!” 라고 경쾌하게 외친다. 아침마다 죽상을 하고 있는 내게도 나 자신과의 거울 하이 파이브를 억지로 시킨다. “그냥 우리 둘이 하이 파이브 하면 되지 않나?” 나는 물었다. “그것도 좋고. 근데 내가 나한테 힘을 주는 것도 의미 있는 거야.” 그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진지한 말을 잘도 했다.



  경쾌하게 아침을 맞는 남편도 사실 미래가 두렵겠지. 매일 야근하는 퇴근길마다 어깨가 돌덩이 같다는 걸 안다. 그도 불안한 마음을 붙잡으려고, 우리 인생을 붙잡아 보려고 거울 속 ‘셀프 하이 파이브’를 한다는 것도. 그 손바닥은 무해하고 말갛다. 희미한 한 줌의 빛을 우리에게로 끌어오는 듯 하다. 그 손을 맞잡도록 내가 더 단단해지고 싶다. 그리고 다른 피해자들의 손까지 잡아주는 방법이 뭘까 같이 고민하고 싶다. 당장은 전세 사기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거울 하이 파이브’ 뿐이지만. 소리 내서 외쳐보면 세상 걱정이 잠깐 사라지는 듯하고, 언젠간 좋은 아침이 올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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