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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망 Oct 12. 2023

절주하는 마음

한잔만 할게요



  술 먹는 건 다리 꼬는 것과 같다. 절주하는 건 바른 자세를 유지하는 것과 같고. 뭔가 불안할 때 다리를 꼬면 편안해지고 기분이 나아진다. 몸과 허리에 힘을 줄 필요도 없고 어딘가 자신감 넘쳐 보이기도 한다. 마치 다리를 꼰 채로 태어난 사람처럼, 의식하지 않으면 어느새 그 자세로 돌아가 흔들거리고 있다. 반면 자세를 똑바로 하는 것엔 코어 힘이 든다. 호흡부터 발라져야 한다. 어딘지 경직되고 지루해 보인다. 자세를 바로 유지하는 게 몸에 좋다는 건 알지만 참 안된다. 당장의 편안함을 따르면 신체 건강이 어긋나게 되며, 중용의 미덕은 술 먹는 습관에 있다. 흐트러져도 금방 바른 자세로 돌아오는, 한 잔만 마시고 관두는 것... 그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 모두가 알지만 절제는 어려운 일이다. 담배, 당, 마약, 도박, 스마트폰 등 각종 도파민들, 특히 술에 관대한 한국 사회는 술 마시는 사람을 ‘정상’으로 여기는 문화를 부추긴다.  



  <당신도 느리게 나이들 수 있습니다>의 저자이자 노년 내과 전문의 정희원 교수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15~49세의 젊은 성인에게서 조기사망과 장애를 일으키는 원인의 1위가 술이라고 한다. 술은 조금만 복용해도 신경계 독성이 있다. 술 한 잔 정도만 음주할 수 있는 사람들은 보상회로가 중독물질에 무덤덤하거나 자제력이 높다고 볼 수 있다. 한번 마시기 시작하면 자제하지 못하거나 알코올의존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아예 금주하는 것이 좋다. 한편, 돈을 안정적으로 버는 직장인이나 상류층 중에도 알코올 중독이 상당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술은 계층, 돈에 상관없이 공평하게 위협적인 존재다. 




  나는 30살이 되어서야 ‘지속 가능한 절주 생활’을 익히게 되었다. 20대 중후반엔 그저 망나니였다. 사람들과 놀기 위해, 취하기 위해 맛도 모르면서 술을 마셨다. 불안하고 소심한 마음이 술의 힘을 업고 세졌다. 주위에선 내가 더 먹을수록 좋아하고 부추겼다. 연애할 때도 회식할 때도 그랬다. 소주 1병, 와인 반병 그 이상으로 마시다가 돈과 건강을 잃은 적이 많았다. (물론 명예도…) 과음을 반복하고 누군가와 멀어지기도 하고 일상을 망치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하지? 절주하는 습관을 들이고 나니 각종 술자리와 기념행사 등에서도 우아하게 살아남았다. 한두 잔만 마시니까 기분도 깔끔하고 모든 게 생생해졌다. 


  들이 붓거나 끊거나, 극과 극으로만 술을 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분명 나 같은 사람도 있을 거다. 굳이 술과 단절하지 않아도 맛을 즐긴 다음 일상으로 빨리 돌아오는 사람들. 내 건강과 정신, 목표한 일 등 챙길 거 다 챙기는 사람들. 마치 비건을 지향하지만 가끔 고기를 먹는 세미 비건인처럼. 알코홀릭과 논알코올 사이, 절주 지향인. 앞으로 적당히 맺고 끊는 습관을 들이고 싶은 분들. 애매모호하고 영리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썼다. 





  나는 알코올 중독자는 아니지만 음주 문제가 좀 있었다. 그러다 20대 후반쯤부터 서서히 안정적인 ‘절주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전과 요즘은 뭐가 다른지, 무슨 생각으로 절제를 해나가는지 솔직한 마음과 팁을 담았다. 알코올 농도가 80%에서 10%로 떨어져 가는 관찰 기록이기도 하다. 물론 0%가 될 마음은 아직 없다. 이 책이 전문 지식이나 해결책을 주지는 못한다. 절제를 모르던 우리를 이해해 보려는 시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이자 응원이 될 수는 있다. 한국 음주 문화의 반성을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다. 미묘한 술 강요에 느껴왔던 답답함도 함께 얘기하고 싶다. 사실 절주는 금주보다도 어려울 수 있다. 아예 안 먹는 것보다, 한 잔만 마시고 그만둘 수 있다면 뭘 해도 될 사람이다. 삶의 모든 면에는 절제하는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다. 




  실제 글을 쓰면서도 작은 실험을 했다. 몇 달 동안 술을 1주일에 한 번, 한두 잔씩만 마셨다. 결과는 어떨까? 몸과 마음이 선명해지고 가벼워졌다. 쓰는 동안 마음이 고요해지며 차를 우려낼 때처럼 불안과 불순물이 밑에 가라앉고 정갈한 평정심이 떠올랐다. 안 먹다 보니 술 욕구도 더 줄었고, 그렇게 좋아하던 단것도 덜 먹게 되었다. (글쎄 이젠 맛있는 조각 케이크 하나도 이틀에 걸쳐서 먹는다!) 조금씩 오래 아껴가며 먹는 버릇이 들었다. 돈과 시간의 가치도 더 느끼고 있고. 그래서 더 인생이 소중해진 느낌이 들었다. 여러분도 자기만의 ‘절주 노트’, ‘절제 노트’를 적어 보는 건 어떨까? 






  전에 친구들과 생일파티를 할 겸 와인바에 갔다. 여자 셋이 안주 1개를 나눠 먹고 있는데 별안간 직원분이 와서 감바스 안주를 내주었다. 서비스인 줄 알고 좋아하고 있었는데, 다른  테이블 손님들이 보낸 거란다. 네? 놀라며 옆 테이블을 돌아봤다. 분명히 취한 아저씨들이겠지. 정중히 거절해야겠다 생각하는데 우리 눈에 보인 건… 40대 초반의 여성 세 명이었다. 여유로운 미소로 자리에서 술잔을 들어 보이는 그녀들. 우리가 송구하다고 사양을 하자 부담 갖지 말라며 권했다. 


  우린 뜻밖의 호의에 거의 눈물이 그렁할 만큼 뭉클해졌다. 감동의 손뼉을 치며 답례로 치즈플래터를 시켜드렸다. 그녀들은 “애들이 왜 이런 걸 사!” 호들갑을 떨면서도 좋아했다. 20대 후반인 우리를 ‘애들’ 취급하는 것이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녀들은 그닥 취해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 그 언니들도 세 명이고 우리도 딱 세 명이다 보니 젊을 때의 자신들, 후배들을 보는 느낌으로 예뻐라 하신 것 같다. 심지어 술 말고 안주를 사준 게 포인트다. 술을 많이 먹기보다 배를 든든히 채우길 바라는 마음에서일 것이다. 그런 마음은 오래 기억된다. 우리도 꼭 저런 멋진 언니들이 되자고, 나중에 모르는 여성들에게 술 말고 안주를 사줄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하면서 한결 푸짐해진 식탁을 즐겼다. 





  우리는 절주하며 나아갈 것이다. 도파민 가득한 세계에서 조금은 거리를 두고 잔잔한 재미를 찾으러. 욕심을 점점 내려놓는 습관 속으로. 가끔 술잔 대신 찻잔을 부딪치면서, 낯선 사람도 서로 응원해 주는 느슨한 연대로. 어둠 말고 밝은 조명 밑에서 눈을 맞춘다. 조금 어색하지만 견뎌본다. 그러고 나면 한결 더 가까워진 것 같다. 해상도는 더 높아진다. 진짜 사람과 진짜 인생을 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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