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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망 Oct 17. 2023

절주 노트

한잔만 할게요


2023.08.26


절주 노트를 쓰기로 마음먹은 계기. 어제 결국 술을 마셨다. 회사 동기 모임이라 한강에서 마시다가 토를 했고… 그렇게 됐다. 그러니까, 오늘부터 절주하는 거다. 이제 만나면 술 게임은 하지 말자고 해야지. 노래를 틀고 제목을 맞추는 게임이라 못 맞추면 마시는 건데 내가 족족 져버렸다. 팝송엔 자신 있는데 한국 발라드는 잘 모른다. 술 게임은 참 안 하겠다고 자리를 뛰쳐나갈 수도 없고 강제로 술을 마셔야 하니 난감하다. 1월 1일 새로운 다이어리를 펼치고 거침없이 써 내려가듯이 새롭게 시작하자.  



2023.08.28


글이 정말 안 써진다. 술이라도 마시고 싶다. 취한 상태로 쓰면 더 잘 써질 텐데. 내게 필요한 게 딱 그런 것이다. 맨정신일 때의 나는 딱딱하고 여유가 부족하다. 누구와 같이 있으면, 아니 혼자여도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을 때가 있다. 뭔가 목구멍에 걸려있다. 경직된 채로 글을 쓰면 경직된 글이 나오니까 술 한 잔은 괜찮을지도 몰라. 그러면 손도 목구멍도 좀 풀어지고 유연해질 거다. 워드 파일 빈 페이지를 가자미 눈으로 노려보지 않고 미소 지으며 볼 수 있을지도. 예전 대학 졸업 논문을 쓸 때도 사실 한잔 걸치고 썼다. 회사 보고서도 소주 마시고 쓴 적이 있다. 어려운 기업 용어와 낯선 사람들 이름이 많았는데 오타도 안 내던걸? 일단 내일 다시 써보면 괜찮을 거야. 조급해 하지 말고 꾸준히 하다 보면. 무엇보다 이건 술 문제가 아닐지도 몰라. 



2023.09.06 


초가을, 무화과의 계절. 한국에는 과일에도 유행이 있다. SNS에 열풍을 타고 퍼지면 너도나도 팔고 사고 인증한다. 최근엔 가을마다 무화과 디저트를 먹는 게 유행이라 나도 질세라 합류했다. 서울 관악구에 있는 작은 카페에 가서 커피와 흑임자 케이크를 시켰다. 원목 테이블 위에 올려두니 가을의 감성을 흠뻑 빨아들인 듯하다. 물면 이빨 사이로 결결이 갈라지는 무화과를 흑임자와 디플로마 크림이 부드럽게 감싼다. 덜 단 디저트를 좋아한다는 건 뭔가 모순 같지만 이 케이크 앞에서는 그 여백에 취하게 된다. 풍미 진한 커피와의 조합도 환상적이다. 


몇 주 동안 술을 안 마셔서인지 미각도 생생하게 깨어나는 것 같다. 술의 맛을 잊게 만든다. 게다가 글쎄, 이 작고 맛난 걸 반만 먹고 반은 포장해 오는 미친 자제력을 부려봤지 뭔가. 절주 노트를 쓰고 있어선지 디저트까지 절제하게 된다. 나는 원래 마카롱을 3개, 케이크도 2조각 먹던 사람인데… 역시 글쓰기의 힘은 신묘하다! 



2023.09.15


잔잔한 음악을 들으면 절주하는 데 도움이 된다. <반지의 제왕> OST나 엔리오 모리꼬네의 곡들은 역시 옳다. 날씨가 좋아서 한강 공원 피크닉을 하면서 음악을 들었다. 술을 종이컵에 따르니 기분이 안 나서 한 잔만 먹고 말았다. 이렇게만 하자! 



2023.09.16


요즘 술 먹는 대신 자꾸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양심에 찔려서 저당 아이스크림으로 바꾸긴 했는데, 반 통을 다 퍼먹으면 무슨 소용일까. 배도 차가워지고 입이 달아지니까 단 게 더 땡기고 여러모로 별로다. 아이스크림은 왜 술을 안 먹어도 먹어도 끌리는지. 



2023.09.18


술을 끊으면 금단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던데 난 그 정도는 아니다. 감정 기복, 불안, 기억력 감퇴 등이 나중에 올 수도 있다. 그래도 지치지 않고 밀고 가는 게 중요하다. 많은 정신과에서 이런 말을 환자에게 한다고 한다. “계속 살고 싶은 마음이 안 들면, 그냥 오늘만 버티세요.” 



2023.09.22


오늘은 위험했다. 다 같이 축하하는 날을 조심하자. 기분이 좋아서 왁자지껄하는 분위기라 자제가 어려워서 4잔이나 마셨다. 이 정도가 딱 기분 좋고 알딸딸하긴 하다. 청첩장을 받고 예비 신부를 축복해 주다가 나중엔 대화 주제가 중구난방이 됐다. 선혜가 너는 왜 우리랑 있을 때만 안 마시는 거냐며 서운해했다. 응…? 너네랑만 안 먹는 거 아니야. 다른 데 가서도 안 먹어. 해명해도 안 믿어준다. 내가 어딜 가든 절주하는 모습을 더 보여줘야겠다. 



2023.09.23


친정 식구들과 모임을 했는데 맥주 한 입도 대지 않은 장한 날. 일식 코스 요리라 비싼 만큼 생생하게 느끼고 싶었다. 술도 안 마시다 보니 계속 안 먹게 된다. 절주 상태에 몸도 적응을 한건지 강렬하게 치미는 욕구가 많이 사라졌다. 아무 술로도 입을 축이지 않은 맨 상태에서 머금은 회와 요리들이 섬세했다. 따땃한 차와 함께 즐기는 밥과 디저트는 달큰하고 과일은 아삭했다. 취하지 않는 안온한 저녁이 저물어 갔다. 



2023.09.28


추석이라서 망했다. 어쩔 수 없다. 사촌 동생도 결혼을 하더니 술을 자꾸 갖고 온다. 어릴 때처럼 여전히 어른들은 전을 부치고 우리들은 놀고먹고 있으니 미안해진다. 어제는 남동생과 남편이 고기를 굽는 풍경을 보고 흐뭇했었고. 보름달 같은 명절이다. 저녁에는 제주도 작은엄마가 떠온 회에 위스키를 싸 먹었다. 



2023.09.30


남편과 해방촌 나들이를 갔다. 타코, 피자, 버거, 비건 푸드에 맥주나 와인 한잔하는 것이 기본이고 상식인 곳. 그곳에서 우리는 과감하게 술을 생략했다. 정직하게 ‘피.자.’만 먹었다. 질깃한 도우를 오물거리며 제로 콜라와 함께 한 조각씩 넘겼다. 그래, 우리는 힙하지 않다. 옷차림부터 그렇다. 해방촌을 어슬렁거리는 행인들은 유행하는 레트로풍 와이드 팬츠와 헐벗은 오프숄더 착장을 했고 몸 곳곳을 체인, 피어싱, 스모키 등으로 장식했다. 우리는 범생이처럼 맨투맨 티셔츠에 청바지가 전부다. 담배도 대마도 술도 안 하고 있다. 그들이 보기엔 우리가 촌스럽겠지만 해방촌 골목마다 스미는 노을의 여운, 남산타워가 보이는 야경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해방촌의 야경은 유독 아름다운 별 같다. 아마도 높은 건물이 없어서 낮게 깔린 불빛의 공평함. 루프탑 카페에서 캐모마일 티를 마시면서 저 골목 넘어 옥상 술 파티를 벌이는 사람들만큼 힙해지는 기분이고, 그런 것쯤은 상관이 없어진다. 



2023.10.02


선물 받은 와인병이 쌓여있다. 집에 이사 온 지 1년이 됐는데도 집들이 선물을 아직 소진 못 했다. 5병쯤 되는데 이걸 언제 소진하면 좋을까? 타이밍만 재고 있다. 한 병에 5만 원이 넘는 것도 있으니 특별한 날에 따야지… 마치 금괴를 모셔두고 사는 기분이다. 실용성 없이 모셔두고 보면서 흐뭇해하는 것. 그렇게 아끼다 하나를 따면 화수분 마냥 선물이 또 들어온다. 감사하고 분에 겹다. 평일 저녁엔 남편이 야근해서 나 혼자 식사를 하는데, 혼술을 하긴 싫다. 가끔 술 충동이 강하게 올라오면 배달 음식을 시키거나 차를 끓인다. 머리로는 차를 끓이지만 솔직한 심정은 배달 앱 주문 버튼을 누르기 직전이다. 다시 생각해 봐. 다시. 진정되면 물을 데워 차를 끓인다. 속을 데우고 향긋한 냄새를 인중에 가둔다. 배달 주문을 누르는 검지 손가락도 차에 흐물흐물 녹으면 좋겠다. 



2023.10.03


또 발목을 다쳤다. 언덕을 내려오다가 예전에 접질린 왼쪽 발목을 또 삐끗한 거다. 발목은 한 번 다치면 그 부위를 계속 다치게 된다. 붓기가 있길래 소염제를 처방받아서 이제 진짜로 금주해야 한다. 원래도 잘 안마셨으니 타격감은 없지만, 평소엔 별생각 없다가 ‘먹지 마’하면 더 먹고 싶은 요상한 심리. 



2023.10.13


오랜만의 음주. 연남동 어느 와인바의 팝업 행사에 참여했다. 각종 캔 안주와 진귀한 와인들을 나눠 먹는 자리였다. 한국엔 수입되지도 않는 서양배 와인과 시드르 사과 와인을 맛봤다. 그리 달지 않으면서 청량하고 상큼하고 포도 와인과 달리 씁쓸한 맛이 없었다. 토스카나에서 온 화이트와인과 호주산 레드와인도 넙죽 받아 마시면서 나는 수줍은 웃음을 덧붙였다. “조금만 따라주세요.” 결국 5잔이나 마셔버렸다. 다들 신나서 사 온 와인을 꺼내놨기 때문. 마지막엔 사장님이 업장 선반에 있는 술을 꺼냈다. “이건 제가 사는 거예요!” 하고 우린 환호했다. 이미 사놓으신 건데 본인이 또 산다고 하니 뭔가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손님들끼리 인스타그램 계정을 주고받았다. 마치 또 볼 사람들처럼. 나는 흥이 나면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그 자리에서 올려버린다. 평소 같으면 SNS에 게시물을 정제하며 올리기 때문에 하루에서 일주일은 묵히고 나서 올리든 버리든 할 것이다. 하지만 취하고는 정제 따위? 알 바가 아니어서 마구 사진을 올린다. 그래도 이성을 붙들고 2개 이상은 안 올렸다 휴. 이건 금주 노트가 아니고 절주 노트니까 괜찮다며 합리화를 해본다. 이런 날도 있는 거다. 정말 나 자신에게 관대하다.  



2023.10.14


예능엔 술 마시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특히 연애 예능이 심하다. 꼬일 대로 꼬인 관계가 술자리로 해소되기도 하고 더 폭발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술의 힘을 빌려야만 솔직한 속 얘기를 나눈다. 모든 인간이 똑같아서 웃긴다. 한국 예능이나 드라마에 유독 음주 장면이 많은 것 같기도 하다. 국민들 성격이 급하고 빠르게 발전해 온 탓이겠지. 스트레스 풀 요소가 많지 않고. 여러 각도에서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2023.10.16


왜 나는 하루 8시간씩 일하며 종일 바쁘게 사는데 한 달에 100만 원밖에 못 벌까? 희대의 미스터리네. 각오는 했지만 퇴사하니 먹고 살기 힘들다. 스트레스받아서 초콜릿을 먹었다. 이쯤 되면 주 노트가 아니라 절식 노트로 이름을 바꿔도 되겠다. 



2023.8월의 어느날로 마무리 


홍대 쪽에서 열린 주류 팝업 스토어를 갔다. 솔직히 오기를 부렸다. 그런 데 가서도 절주할 수 있다는 마음… 결국 행사에서 와인 2잔만 마시고 그쳤으니 좋은 시도였다. 그곳엔 맥주, 와인, 위스키, 사케, 청주 등 다양한 주종의 부스가 있었다. 혼자 부스를 돌며 설명을 들었다. 나는 혼자서도 잘 노는 유부녀다. 각 술의 스토리가 담긴 책자를 후루룩 훑으며 무용하고 재미난 공부를 했다. 활자를 읽으며 술을 홀짝이니 일품이었다.


적당히 알딸딸해진 상태에서 무료 재즈 공연이 시작됐다. 악기들이 마치 술의 종류 같았다. 피아노는 와인, 드럼은 맥주... 내 입과 귀에 이런 호사를 하다니, 돈도 안 내고 이걸 누려도 될지 감격스러웠다. 낭만적인 밤에 어울리는 뭉근한 음향과 섬세한 연주. 미소가 귀에 걸린 채 발을 까딱이며 감상했다. 재즈 음악은 귀에 티클거리는 느낌이다. 술의 기포가 터지듯이. 포근하고 로맨틱하게 공기 자체의 질감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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