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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망 Nov 08. 2023

두 노장이 던지는 물음 : 그대들은 어떻게 '볼'것인가

신작 영화 리뷰

   하야오 감독은 어릴 적 영감을 받았던 동명의 철학서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더 늦기 전, 적당한 시기에 꺼내 들었다. 영화로 현대 사회를 비판하고 질문을 던진다. 스콜세지 감독은 백인 조상의 과오를 비판하며 원주민 희생자들에게 바치는 ‘위령’의 영화 <플라워 킬링문>을 만들었다. 두 영화 모두 후대에 전하는 메시지와 삶에 대한 철학이 밀도 있게 들어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볼’ 것인가


  올 하반기 최고의 화제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그대들은 어떻게 볼 것인가’의 대토론장 같기도 하다. 처음에 난 하야오를 불신했다. 새 그림이 그려진 포스터 하나만 공개하는 마케팅 방식도 오히려 튀어 보이려는 것 같아서 우스워 보였다. 아무리 거장이라 해도 은퇴를 번복하다 보니 감을 잃지 않았을까? 과연 극과 극으로 갈리는 평가들 덕에 결국 직접 보고 판단하려고 영화관에 갔다.  


  스토리는 2차 세계 대전 시기, 시골로 이주해 온 소년 ‘마히토’의 성장기. 그는 사라진 새엄마를 찾기 위해 새로운 세계로 가지만, 그곳의 규칙은 설명되지 않는다. 난데없이 불타는 종이와 고인돌이 등장하고, 왜가리 속에서 사람이 튀어나오는 등 판타지 요소들이 나온다. 신선하다기보다 난해하다. 이어지는 낯선 장면 전환들 속에서 붙들 것은 전작의 향기가 나는 이미지들뿐이다. 그것들만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기본 골조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처럼 주인공이 우연히 다른 곳으로 모험을 떠나는 내용. 두 시공간이 문으로 연결된 설정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 고인돌 무덤과 바다를 달리는 장면은 <벼랑 위의 포뇨>, 숲속 정령 같은 귀여운 캐릭터 ‘와라와라’는 <모노노케 히메>와 닮은 식이다. 


  연상되는 영화들은 지브리 작품 말고도 더 있다. 미지의 세계에서 기괴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경험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유사하다. 주인공의 혼란스러운 무의식과 심리를 우화적으로 펼치는 <보이즈어프레이드>도 생각난다. 부모를 두려워하고 환상을 자꾸 본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렇게 기존 문화 레퍼런스들에서 배운 상징을 어렴풋한 해석 위에 덧붙여 본다. 이런 점이 이 영화의 미덕일 것이다. 각자에게 생각하는 재미를 주고, 사람들과 의견을 나눠보게 하는 점. (심지어 하야오 본인도 인터뷰에서 영화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밝힌 바 있다.)


  또 좋았던 부분은 주인공 ‘마히토’가 소녀 시절의 어머니를 만나는 설정이다. 같은 나이에 같은 걸 경험한 두 사람이 어떤 미래를 살아낼지 기대하게 하니까. 이번 주인공은 하야오의 자전적인 이야기인 만큼 전작들의 소년 소녀들에 비해 어두운 성격이다. 누가 말을 걸어도 대답도 잘 안 하고, 반 친구들과 싸운 후에 자기 머리를 돌로 쳐버려서 학교에 안 가버린다. 그의 어둠은 불처럼 밝은 소녀(어머니)를 만나며 희석된다. 왜가리와 협동하며 친구와 다정함의 가치를 알게 된다. 누구나 10대 시절은 혼란스럽고 낯선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이 시절에 만난 어른에게서 받은 질문들은 직접 세상에 부딪히며 배워간다. 세계와 인생을 바로 세우는 건 흔히 ‘건축’에 비유된다. 노장은 ‘악의’를 가진 세상에서 선한 세상을 잘 지어보라는 메시지를 후대에 남긴다. 극장을 나오는 머릿속엔 물음표가 남는다. 거장에게서 오래 준비한 질문을 받고 내 안의 건축물이 튼튼한지 한번 돌아보게 된다. 



  


<플라워 킬링문>, 죽이는 사랑


  무려 마틴 스콜세지와 로버트 드니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조합의 영화. 그보다도 원주민 출신 여배우 글래드스턴의 우아한 눈빛이 빛나는 영화. 다소 비상업적인 내용과 편집 탓에 파라마운트사가 투자에서 손을 떼고 애플이 마무리를 지었다는 비하인드까지 영화를 둘러싼 외피부터 흥미로웠다. 


  이는 1920년대 오클라호마에 살던 오세이지 족에 관한 실화를 가져온다. 오세이지족은 땅에서 석유가 나오는 바람에 벼락부자가 되지만, 백인들에 의해 목숨과 돈을 빼앗긴다. 이 부족뿐 아니라 모든 원주민들의 운명이다. 젊은 원주민 여성 ‘몰리’는 동네 자산가 ‘킹’의 조카 ‘어니스트’와 결혼한다. (어니스트도 <그대들은 어떻게 볼 것인가> 마히토처럼 시골로 이주해 온다.) 어니스트는 킹의 설득에 의해 몰리의 자산을 빼앗으려 결혼했고, 그녀에게 독을 조금씩 주사한다. 부부는 자식을 셋이나 낳아 기를 동안 서로 사랑하면서 배신하고, 또 의심한다. 주변에선 몰리의 자매들을 포함해 몇십 명의 부족민들이 죽어간다. 한참 후에야 마을에 수사단이 파견되며 그들이 후에 ‘FBI’의 전신이 된다. 스콜세지는 이를 3시간 20분 동안 진득하고 집요하게 파헤친다. 


  인상적인 건 몰리와 어니스트 부부의 숨 막히는 애정 관계다. 영화는 수사극인 동시에 로맨스의 색깔을 띤다. 영화를 보다 보면 우리가 어디까지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먹먹해진다. 어니스트가 몰리를 오직 돈과 수단만으로 본 것만은 아닌 듯하다. 그는 분명 애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아내와 대화하고 자주 껴안는다. 그가 몰리에게 화를 내는 장면은 그녀가 ‘당뇨 주사’를 거부했을 때다. 어니스트는 ‘킹’이 준 당뇨약을 몰리에게 주사하지만 그건 사실 독약이었다. 어니스트가 독인 걸 알고 주사를 한 건지, 몰리 또한 남편의 정체를 알고도 사랑으로 감싸준 건지 모호하게 나온다. 사실 어떻게 해석하든 상관도 없어진다. 어니스트의 죄악은 모든 걸 이해하는 듯한 몰리의 눈빛 앞에서 순수하게 보일 정도다.  


  인간은 너무나 다층적이라서 죽이려는 동시에 사랑할 수도 있다. 상대에게 독을 퍼뜨리면서 느끼는 연민과 사랑의 형태도 있다. (정상적인 사랑은 아니지만) 성욕, 애착, 동정만으로 사랑이라고 믿을 수도, 그래서 자신까지 속이게 될 수도 있다. 돈을 위해 사랑한다고 말하다 보니 진짜로 사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상대가 죽어가는 과정까지 사랑한다고 믿으며 상대의 모든 걸 빼앗는다. ‘돈과 아내, 둘 다 사랑한다’고 답하는 그의 눈빛엔 죄책감이나 망설임조차 없다. ‘킹’ 또한 마찬가지다. 수십 명의 원주민을 간접적으로 살해하는 이 악당은 정말로 자신이 원주민들의 친구이며 동료라고 믿고 있다. 원주민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선 단체를 만들고 열심히 그들을 돕기도 한다. 사랑과 살인이 한 끗차이로 벌어지는 지점을 그리는 점이 흥미롭다. 이 영화는 범죄의 정당성을 설득하진 않지만 사랑만은 설득해 낸다. 


 


 

   두 노장의 역사 비판


앞에서 본 두 영화는 80세 넘은 거장들의 작품이란 점에서 유사하다. 이 노장 감독들은 자신의 영화 인생을 반추하며 현재 사회와 지난 역사를 비판한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반성 부분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는 여주인공 히미의 ‘큰할아버지’가 나온다. 백발의 현자 이미지로 나오는 그는 하야오에게 영향을 많이준 동료이자 멘토 타카하타 이사오를 모티브로 했고, 하야오를 대변해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메시지를 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플라워킬링문>에는 보드빌[1] 장면이 있다. 이 모든 것이 실화임을 말해주는 장면이자, 영화가 액자형 구성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감독 자신도 등장한다. 영화다운 영화, 감정과 진실을 탐구하는 영화들이 사라져가는 현실을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백인인 자신들의 잘못을 조용히 읊는다. 성공한 백인 감독으로서 원주민을 학살한 조상의 과오를 뼈아프게 비판한다. 스콜세지는 이번 영화에 대해 “우리가 만든 이것이 오세이지 족들이 보고, 느끼고, 일종의 제물처럼 받을 수 있는 어떤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한 편의 영화다. 그렇지만 그들이 겪었던 모든 공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고, 이것을 통해 조금이나마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이 영화를 그들에게 바치고 싶다”고 밝혔다. 


  스콜세지가 적극적으로 비판 의식을 드러낸 반면, 하야오는 전쟁의 시대를 약간 뜬구름 잡는 듯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하야오의 영화에는 항상 피해자가 나오지 않는다.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적 한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배경은 1930년대 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이다. 실제로 그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군수공장을 운영했고, 나중에 하야오와 갈등을 빚었다고도 한다. 그 입장에선 자신의 출생이 부끄러웠을 거고 영화에도 이런 복잡한 심경이 살짝 드러난다. 그 점이 이 영화에 대해 비판을 덜 하게 만든다. 어쨌든 전범국 국민이자 시대의 수혜자였던 하야오가 자기연민을 보이는 것은 거북한 면이 있다. 그가 한발 물러나 있다는 인상과 거리감을 주기 때문이다. 대저택에서 호화롭게 사는 도련님 설정을 시대상과 떼어놓고 볼 수 없다. 군국주의를 은유하는 캐릭터인 ‘앵무새들’도 옛 일본군이 아닌 ‘나치’를 떠올리게 한다. 전작 <바람이 분다>에서도 과거 미화라는 비판을 받았듯, 그는 직접적인 반성을 피하고 반전의식도 희미하게만 넣는다. 하야오의 메시지 자체와 작품성에는 공감하지만, 피해자 쪽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건 아쉬운 점이다. 



 [1] 보드빌 : 버라이어티 쇼 형태의 연극 장르이며, 19세기말 미국에서 예능 촌극을 보여주며 발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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