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카이워커 May 29. 2023

광화문 테라로사 커피에서

좋아한다는 것은

생각이 많아지는 날에는 좋아하는 장소에 간다.

다행히도 그런 장소는 손에 꼽기 때문에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면 금방 찾을 수 있다.

내 인생의 절반을 보냈던 도봉구의 중랑천, 창포원, 방학동 맥도날드. 그리고 대학교 시절을 보낸 광화문이 그곳이다.


오늘도 그런 날이다.

생각이 많아지는 날. 고민이 깊어지는 날. 그런 날에는 작정하고 고민하는 것도 답이다. 그것도 좋아하는 장소에서.

이사 가기 전 동네를 갈까 했지만, 그곳에 가면 지난날의 추억만 되뇌일 것 같아서 광화문으로 왔다.

여기라고 추억에 빠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직선으로 뻗은 도로와 높이 솟은 현대식 빌딩, 반짝이는 건물들을 보면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와 미래에 대해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서울 역사박물관에서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나오는 사직동 골목.

근방 회사에서 알바를 하던 시절, 점심 먹으러 종종 오던 길이다.

여전히 평화롭고 한적하고 깨끗한 길. 오늘은 짝꿍 없이 혼자 왔지만 같이 왔으면 엄청 좋아했을 것 같다.


광화문 라면의 돈코츠 라멘

며칠 전에 짝꿍과 서울역에 갔을 때는 소유라멘을 먹었었는데, 둘 다 맑은 국물이 아닌 된장 라멘의 걸쭉한 맛이 당겼기 때문에 아쉬웠다. 오늘은 그때 못 먹었던 미소 베이스의 돈코츠 라멘을 시켰다. 정말 오랜만에 하는 혼밥이다. 나는 사실 혼자 하는 것에 익숙한, 혼자서도 아주 잘 먹고 잘 돌아다니는 인간인데, 짝꿍과 함께한 시간에 너무 익숙해져서 혼자서 주문하는 것이 조금 낯설었다. 어찌 보면 인생은 혼자라고 생각했을 때가 더 용감했던 것 같다.


보통 한번 갔던 장소는 까먹지 않는 편인데, 역시나 몇 년 만에 사직동에 왔어도 예전에 갔던 카페, 식당, 골목을 다 기억하고 있었다. 여기도 아르바이트했던 곳의 직원들과 점심 먹고 온 기억이 난다. 장소는 같은데 카페는 바뀐 것 같기도 하다. 반가운 미놀타 카메라. 한때는 저 카메라를 들고 세계 곳곳을 누비며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나를 꿈꿨었지.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아파트 어귀. 군데군데 보이는 대사관과 각종 미술관, 협회 건물. 요즘 우리는 어디에 첫 보금자리를 마련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이런 곳이라면 딱 좋을 것 같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숨겨진 한적한 동네라니. 조금만 나가면 광화문과 각종 문화시설, 대형 서점, 고급 레스토랑, 예쁜 카페가 즐비한 곳이라니.


대학교 때 수없이 지나다녔던 광화문 광장 거리. 그때도 그렇듯 나는 지금도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같이 오기로 한 광화문 테라로사 커피에 먼저 와버렸다.

매장은 넓고 사람들로 북적인다. 목재 테이블과 커피 향이 어우러진 왁자지껄한 느낌이 좋다.


문득 커피를 좋아한다면서 나는 왜 집에서 내려마시지는 않는 걸까 생각했다. 언젠간 그렇게 할 것인데.. 아직은 번거롭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기계를 사야 하고, 원두를 사서 갈면 드립백으로 내려야 하고, 또 설거지거리가 생기고.

그치만 좋아하면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것으로 인해 딸려오는 불편함, 어려움, 두려움도 모두 감내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즐거운 감정, 들뜬 마음 그 상태 하나만 보고 좋아하는 것은 진짜 좋아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을 위해 기꺼이 내 시간과 노력과 열정과 에너지를 쏟을 수 있느냐, 그로 인해 느껴지는 자기 만족감과 도취감, 더 깊게 빠져들고 싶은 도전정신이 생겨나야 ‘좋아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맛있는 커피를 마시러 찾아다닐 열정은 있지만, 원두를 공부하고 개중에서 취향인 원두를 찾아 손수 갈아 내려 마시고 — 그에 걸맞은 예쁜 커피잔도 필요하겠지, 남은 찌꺼기를 따로 말려서 모아놨다가 버리는 그 과정을 아직은 꾸준히 할 자신이 없다.


약간의 변경이라면 다음에 이사 갈 집에서는 그러고 싶다. 이건 핑계가 아니라 계획이다. 좋아하는 사람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만들어가는 것. 같이 찾아가는 것. 그 과정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의 짝꿍과 그런 귀찮고 어려운 일들을 기꺼이 감내하고 싶다. 누군가와 함께함으로서 오는 행복도 있겠지만 나와 다른 사람과 함께하기로 약속한 순간부터 오는 두려움, 불안, 슬픔까지도.


이미 만들어진 사람보다 같이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 이것도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감내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닐지, 함께 있을 때 자꾸 새로운 것을 더 함께하는 그림이 그려지고, 해보고 싶은 것이 생긴다면 충분히 좋아하고 있는 것이 아닐지 생각해 본다.

작가의 이전글 계획과 무계획 사이, 원주 여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