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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필립 Aug 22. 2021

아버지의 폭력과 나의 유년기

그리고 내 아이들

나의 유소년기는 아버지의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었다. 그 경험들은 내 성장 과정에 큰 영향을 주었다.


나는 정면에서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을 말하고 추구하는 대신 뒤에서 숨어서, 비겁한 방법으로 취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완전히 다른 인격 몇 가지를 개발해서 필요에 따라 교체했다. 집에서 고분 하게 말을 잘 듣던 아이는 학교에서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고, 이따금씩 터져 나온 사건들로 학교와 집이 연락이 되는 순간 부모님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그 상황들에서도 나는 아버지의 폭력과 그 두려움을 이겨내는 데 몸과 정신을 소모했을 뿐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나의 분리된 페르소나들이 서로 연결되지 않고 각각 존재할 수 있도록 더 철저하게 관리했다. 더 곁눈질을 하고, 분위기를 읽고, 눈치껏, 들키지 않고 감추는 데 노련해졌다. 어느 시점부터는 부모님도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모든 걸 알게 되는 건 부모님에게도 두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어디에서도 진실하지 않았다. 사실 그중에 어느 것도 진짜 나는 아니었다. 가끔 자유롭고 싶고, 있는 그대로 나를 학교에 데려가거나 집으로 데려오고 싶었다. 그럴 땐 울었다.




시간이 지나 나는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더 시간이 지나 나는 또 다른 부족한 아버지가 되었다.


내 아이들은 나를 가끔 흘낏 쳐다본다.

식사 중에 먹던 음식을 흘렸을 때,

장난감 가게에서 갖고 싶은 인형 앞을 맴돌 때,

자기들끼리 다투다 내 인기척을 느낄 때,

아이들은 흘낏 나를 쳐다본다.


그 이유를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화가 나면서도 너무나 슬프다.


내가 내 아이들만큼 어렸을 때 그랬다.

아버지가 싫어하는 무언가를 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들 때 곁눈으로 아버지를 보았다.

내가 그렇게 두려워하던 내 아버지는, 이제 나의 배역이 된 것 같았고 나는 지금 이것이 더 두렵다.


나의 아이들은 몇 가지의 자신을 만들고 있을까.

나의 아이들은 집에서 온전히 자기 다운 걸까.

나의 아이들도 이미 그렇게 이따금씩 울고 자신의 존재를 찾아 씨름하고 있을까.




잠시 집을 떠나 있는 아이들의 사진이 담긴 메시지를 받았다.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들의 사진을 보다가, 너무 예쁜 아이들의 사진을 보다가, 불현듯 내가 이 아이들에게 어떤 삶을 안겨주고 있는지 의심스러워 눈물이 맺혔다.


내가 아무리 나의 부족한 아버지를 닮길 거부하고 폭력을 반대하고 자상한 아버지가 되려 한대도 그 속에서도 내가 얼마든지 폭력적이었다는 걸 안다. 그런 건 굳이 손이나 발을 대는 폭력이 아니라도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아이들이,

집에서도 이렇게 마음껏 자신일 수 있길...


사진 속의 내 아이들에게 마음을 다해, 사랑과 존경과 지지를 보냈다.

그리고 기약할 수 없지만 내가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은 부족한 아버지가 되길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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