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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혜인 Sep 10. 2020

그래도 남은 게 있었다

10년간 품어왔던 꿈이 사라졌을 때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순간의 감정을 생생하게, 훗날 기억하고 싶은 감성으로 남기고 싶은 생각을 하면서도 오롯한 사실을 적지 못해서였던 것 같다. 최근 안 좋은 일을 겪었다. 그 일에 관해 쓰고 싶으면서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글이 모호해지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지금 쓰고 있는 이 형식의 글이 ‘사실을 기반으로 했다’라는 게 전제되는 글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랜만에 예전에 드라마 비평 스터디를 했던 합정역 카페에 갔다. 당시 눈빛을 반짝거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스터디원들과 너무나도 빡빡한 일상 속에서 토론을 준비해 갔던 내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스터디를 하지 않은 건 5년 만이다. 더는 무언가에 쫓기지 않는다. 지금 나를 감싸는 공기가 어떤 온기를 품었는지 느낄 여유도 있다. 일찌감치 일자리 구해서 일만 하고 살았다면 정말 편했겠다. 일하면 고되다고들 하지만, 실제로 일만 하는 삶은 오히려 참 편했다.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최근 있었던 몇몇 지인들의 결혼식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촌 언니의 결혼식과 어릴 때 알고 지냈던 언니의 결혼식이 연이어 있었다. 곧 중학교 때 친했던 친구의 결혼식도 있다. 이제 우리는 확실하게 결혼 적령기에 들어섰다.


 그 와중에 한 가지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결혼도 정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거구나. 아니, 적어도 남들에게 ‘나, 이 사람이랑 결혼한다.’라는 게 떳떳해 보일 때 할 수 있는 거구나.


 ‘분명 열심히 꿈을 향해 달려왔는데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 거지?’




 한때는 빨랐던 내 상황이, 어느 순간부터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그저 그런 상태로 전락해버렸다. 아무리 빨리 달리려고 해도 더는 빠르게 달릴 수 없었다. 꿈이, 꿈이 아니니, 꿈이란 이름 아래 멍으로 점철됐던 지난날들이 떠오른다. 플랜 B로 갈아타기엔, 그 길은 너무 낯선 길이다. 플랜 B를 플랜 A로 준비해온 사람들에 비해, 내가 걸어온 길은 너무 보잘것없다.


 한번 생각해보았다. 이게 내가 수능을 잘 못 쳤기 때문일까?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해온다고 했지만, 정말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에 비하면 난 그리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엄마에게 ‘공부가 재미없다, 진짜 내가 좋아하는 건 따로 있을지 모른다’라고 말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원래 공부가 그래, 공부 좋아서 하는 사람이 어딨어?”


 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니 공부 잘해야 한다는 조건이 전제되지 않은 일이 없다. 어떤 일을 하든 그 시작은 ‘시험’이었다. 아니 시험을 ‘잘’ 치는 것이었다.


 시험을 잘 치지 않으면 열악한 조건에서 유리천장 아닌 매 순간 (시멘트) 천장을 느끼는 노동 현장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알게 됐다. 어릴 때 늘 궁금했던, 공부를 ‘잘’ 해야 했던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혹은 내가 몸담고 싶은 일을, 좀 더 나은 환경에서 덜 제약받고, 덜 차별받으며 ‘시작’할 수 있기 위함이었다.




 한동안 SNS에 글을 쓰지 못했다. 글을 쓸 이유를 잃어버렸다. 꿈을 놓아버렸다. 왜 꿈을 놓아버렸는지는 잘 모르겠다. 갑작스럽게 내 마음에서 꿈이 사라졌다. 이전부터 조금씩 내려놓고 있었는데 그걸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일수도 있다. 어쨌든 내 마음이 예전 같지가 않다. 그리고 내게 맞지 않는 옷을 계속 고집하고 있었다는 생각도 든다. 처음 피디가 되고 싶었던 이유가 모호했던 것처럼 피디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예전만큼 강렬하지 않은 이유도 모호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내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졌다는 것이다.


 그 꿈이 사라진 지금 내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상상했던 것만큼 나락으로 떨어진 건 아닌데, 상상했던 것보다 세상이 깜깜하고 딱딱해졌다. 내 글을 읽고 ‘힘이 된다.’거나, ‘공감한다.’라고 했던 사람들의 말도 그저 인사치레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지 않는 동안, 매 순간이 가시방석 같았다. 한때 내 글을 좋아해 주었던 사람들이, 내가 글을 업로드하지 않아서 내 계정 팔로우를 지워버릴까 봐 두려웠다. 그렇게 내 글을 잊게 될까 봐. 그 와중에도 다음 글을 올리지 않아서 않아 계속 마지막 자리를 지키고 있던 글에는 몇 주에 걸쳐 계속 댓글이 달리고 있었다. 몇 달째 업로드를 안 하니까 그저 내 피드를 눈으로만 보던 분들까지 댓글을 달아준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니 잠잠해졌다.


 그러다 정말 오랜만에 새로운 댓글이 달렸다는 알림이 울렸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좋은 글 매일 읽고 싶어요.’




 참 신기하게도 그 말에 몸을 잔뜩 움츠리느라 느끼지 못했던 사람들의 진심이 와 닿는 것이었다.


 그동안 참 보고 싶었다. 그리고 너의 글이 참 그리웠다.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꿈이 사라졌다고 글을 쓰는 이유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글을 쓰는 이유는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이 말이 바로 그 이유다. 눈물이 났다.


 그래도 지난 몇 년 동안 잘못 산 게 아니었구나. 그래도 글은 이렇게 남아 있구나. 그 고통의 시간을 건너오며 조금 더 다양한 사람들과 공감을, 치유를 함께할 수 있게 되었구나. 거울 속에 비친 내 표정만 신경 썼던 내 시선을 돌려 남들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게 되었구나.


 꿈이 사라져도, 내게 글은 남았구나.

 내가 바랐던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게 남은 게 있구나.


 내가 그렇게 끝없는 깜깜한 터널을 지나 조금은 밝아진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면, 그 시간을 견뎌내느라 모르는 사이 잔뜩 찌푸려진 표정을 오늘처럼 알아봐 주는 이가 있다면, 지금까지 참 잘해왔다는 말을, 진심으로 건네는 너그러움을 스스로 품을 수 있다면, 조금은 더 살아있는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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