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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혜인 Sep 10. 2020

가장 위로를 받게될 때는

내가 나를 위로할 수 있다면


 머릿속이 깜깜하다. 무슨 말을 써야 할지 잘 모르겠다. 예전과 다르게 마음을 표현하는 게 점점 더 어려워졌다. 한없이 빠져드는 좌절감과 자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다시 펜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품어왔던 꿈을 완전히 놓아버리니까 엄청난 좌절감과 자책감이 엄습했다. 예전에 김 모 기자님이,


 “언론고시에 실패하면 엄청난 좌절감에 빠져들게 되므로 시작하는 한 최소한 성공해야 해. 그런데 잘 안 되어도 그게 평생 가는 건 아냐. 그래도 평균적으로 약 30대 중반까지는 가는 것 같더라.”


라고 했던 말생각났다.


 ‘실패’라는 건 뭘까. 내가 그동안 마음 쓰고, 시간 써서 노력해온 모든 것들을 다 정산하고, 다른 쪽으로 진로를 알아보는 이 상황이 ‘실패했다’라고 말하는 그 상황인 걸까?


 그래도 계속 피디가 되는 일에만 몰입하기에는 내 마음이 이제는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전에는 미처 몰랐던 나의 가치관을 알게 되면서 가고 싶은 회사가 한정적이었다는 게 일단 첫 번째 문제였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이 너무 확고하여 그것만 지원하고 준비했던 것이 두 번째 문제였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관을 일찍 깨닫지 못해서 다른 길은 아예 쳐다보지 않았다는 게 세 번째 문제였다.


 둥글둥글하게 살기 위해서는 목표하는 바도, 꿈꾸는 바도, 가치로 여기는 바도, 전부 둥글둥글한 게 좋은 것 같다. 나는 어쩌면 모든 게 너무 확고하고 뚜렷하여 성공의 단맛보다는 실패의 쓴맛을 더 느끼며 살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꿈을 놓아버린 뒤 한동안 사람들과 연락하지 않았다. 나에게 연락 오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대부분 안부를 묻거나 만나자는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너무 정신도 없고 마음의 여유도 없었던 그 시기에 모두에게 좋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차일피일 약속을 미루고, 변명했다.


 그런데 계속 그런 질문들을 받으니까 내가 심문받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나 잘 살고 있어, 무슨 일을 하고 있고, 이 일 잘하고 있어.”라고 증명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내 삶을 증명해내야 할 것만 같았다.  어차피 어떻게 지내는지 잠깐 듣고 오랜 시간 연락 없이 살 사람들에게 굳이 내가 현재의 내 고민을 말할 필요가 있을까? 잘 될 거라는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깨달은 것이 있다. 가장 위로가 되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나 스스로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그 일을 준비해나가고 있음을 스스로 느낄 때라는 것. 그러니 나를 조금 더 보듬어줘야겠다.


 따뜻한 감성보다는 조금 더 냉정한 이성을 마음에 품어야 한다. 지나간 일에 마음 쓰지 않도록, 조금만 더 담대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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