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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엉클테디 Aug 08. 2020

'나 홀로 집에'는 알고 보니 내 얘기더라.

해외에서 보내는 첫 크리스마스


새벽녘부터 비가 내렸던 걸까. 아침에 잠깐 깨서 날씨를 확인했더니 발코니에 빗물이 고여있었다. 해외에서 보내는 첫 크리스마스라 하얀 눈이 소복이 내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꿈꿔왔지만 비 오는 날 특유의 센치함이 더한 크리스마스도 나쁘지 않았다. 비가 와서 그런지 한기가 방안까지 전해졌다. 코가 시리고 발이 시렸다. (라디에이터를 최고치로 틀어놓았지만 한국의 보일러가 그리워졌다.)


처음으로 맞이하는 유럽의 크리스마스는 차분했다. 침대 바로 옆 창가 밖을 둘러봤다. 한산했다. 아침이라 그런 걸까. 트램만 부지런히 다녔다. 


비도 오는데 더 자자



한참을 그렇게 뒹굴다가 10시쯤이 돼서야 아침을 먹은 후 그래도 나름 크리스마스인데 집에만 있기엔 아까워서 외출 준비를 했다. 크리스마스만큼은 집돌이가 되는 걸 피하고 싶었다. 집에만 있으면 처량해 보일까 봐.


조촐하게 사과, 토마토, 빵, 요구르트

1층 아파트 현관문을 나와 어디를 갈까 잠시 고민했다. 이 동네에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은 어딜까 하던 찰나에 Rynek이 떠올랐다. 아마 그곳에 가면 큰 크리스마스 트리가 있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다.   


집에서 Rynek까지 걸어서 15분 정도. 트램을 타도 되지만 걷기로 했다. 어차피 남은 기간 동안 트램을 탈 일은 많으니까 집 주변에 뭐가 한 번 가면서 확인할 겸이랄까


그렇다. 우리 아파트엔 엘리베이터가 없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구글 지도는 필요 없었다. 위치 정도만 확인하고 발길 가는 대로 걸어갔다. 1년 전 3박 4일 정도 머물러서인지 거리가 낯설지가 않았다. 마치 동네 마실 나가듯 그렇게 편히 주위 풍경들을 살피면서 갔다.

 

집 앞 바로 있는 트램 정류장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계속해서 비가 내렸다. 거리엔 지나가는 트램 소리뿐 고요했다. 캐롤송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떠올랐다. 캐롤송 가사가 공감이 갔다. 크리스마스이브 밤뿐만 아니라 크리스마스 당일에도 동네는 고요했다.


거리에 차들도 몇 없더라.


하늘을 봤다. 점점 맑아지는 것 같았지만 잠시 또 흐려졌다. 유럽의 변덕스러운 날씨는 여전했다. Rynek에 도착하니 예상대로 큰 크리스마스가 있었지만 크리스마스 당일인지 크리스마스 마켓들도 열지 않았고 중간중간 보이는 놀이기구들도 운영을 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당일엔 모든 사람들이 쉬는 날처럼 보였다. 그나마 연 곳은 꽃집 정도랄까.


휑하다 휑해


비까지 와서 광장은 조금 을씨년스러웠다. 가끔 유럽 크리스마스 관련 글들을 읽어보면 크리스마스 땐 정말 아무것도 할 게 없다고 그러던데 맞는 말이라 인 것 같았다. 추측하건대 대부분 가족들과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성당에 가지 않을까 생각했다.


정작 크리스마스 당일엔 클로즈인게 나로써 의아했다. 



단지 광장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꽃집만 영업중


잠시 광장의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몇몇 익숙한 건물들이 보였다. 몇 년 전 바르샤바 버스터미널에서부터 우연히 만나 브로츠와프에서 짧은 시간 동행했던 한국분과 같이 갔던 맥도널드, 브로츠와프에서의 둘째 날 아침으로 맛있게 먹었던 브런치 카페, 안나와 처음 만난 날 갔던 피에로기 레스토랑


1년 전 겨울여행이 새록새록 떠오르면서 잠시 광장에서 추억에 젖었다. 그땐 몰랐다. 내가 다시 브로츠와프에 돌아오게 될 줄은. 주로 한 번 갔던 여행지는 잘 가지 않았던 나였기에 감회가 새롭다랄까.

 

전통 피에로기 맛집이라고 한다.


상점들마다 출입문 앞에 크리스마스 휴무일 안내문을 붙였다. 사실 한국 사람인 나에겐 조금은 의아했다. 크리스마스일수록 손님들이 거리로 나와 외식을 하거나 무언가를 살 텐데 그 기간 동안 휴무를 하게 되면 아깝게 기회를 놓친 건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나라 크리스마스엔 언제나 명동에 사람이 북적북적하는데 브로츠와프에서 나름 번화가라는 Rynek 조차 인적이 드물었다. 광장을 둘러봤으나 할 게 없었다. 카페조차 문을 열지 않은 상황.


음식점 출입문에 붙여진 휴무일

슬슬 점심 먹을 시간이 되자 오늘은 외식은 할 수 없을 듯하여 일단 집으로 가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운이 좋게 Żabka라는 편의점이 잠깐 오픈을 해서 매장 구경도 할 겸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담았는데 맥주는 늘 빠지지 않고 담았다.


워낙에 맥주를 좋아해서 매일 밤 1일 1병을 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한달살기 버킷리스트를 실천하기 위해 항상 마트를 갈 때마다 새로운 브랜드의 병맥주를 구입했다.


한달살기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매일매일 새로운 브랜드 맥주 마시기였기에.

 

 


그날그날 먹을 것들만 소량으로 샀다.



집에 돌아오는 길, 찬바람을 너무 많이 쐐서 뜨끈한 국물이 땡겼다. 겨울바람이 매섭긴 매서웠다. 차라리 눈이라도 오면 포근한 느낌이련만.


점심메뉴로는 팩으로 담긴 맛김치와 편의점 일본 라면 그리고 매쉬드 포테이토. 일본 라면 특성상 얼큰한 맛은 없지만 미소된장 특유의 깊고 진한 국물이라도 충분했다.


점심까지 먹고 나니 몸이 나른 나른했다. 딱히 할 거라곤 없어 보여 낮잠을 잤다. 추적추적 빗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트램 지나가는 소리. 낮잠을 자기에 최적의 환경이었다.


 

낮잠을 잔 게 오후 3시였는데 일어나 보니 저녁 6시쯤. 어쩌다 보니 일어나자마자 저녁 먹을 시간이 되자 주섬주섬 가볍게 먹을 것을 꺼내 조촐하게 저녁식사를 끝냈다.




처음 맞는 유럽에서의 크리스마스는 솔직히 말해서 심심했다. 동네가 한산하다 못해 고요하기까지 하던지. 밖에 나가도 할 게 없으니 자연스레 집콕을 했다.  한 거라곤 산책이 다였다. 지극히 평범한 크리스마스였다.


사실 어른이 되어서 크리스마스는 그저 종교적인 행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을뿐더러 한국에서도 가족들과 성당에 간 것 말고는 한 게 없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는 커플이 아닌 이상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 


더구나 이번엔 가족들과도 떨어져 홀로 맞이해서 약간의 고독함이 밀려왔다. 날씨 탓인지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홀로 보내는 타국에서의 크리스마스는 적당한 쓸쓸함과 적막감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시간이 흘러 타국에서 혼자 살았을 때 오는 고독한 감정마저도 지금 미리 연습하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12월 25일 그래도 나 홀로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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