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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화 Jan 28. 2023

마틴 마르지엘라, 아주 사적인 밤

Martin Margiela at LOTTE Museum of Art



29cm에서 진행하는 <아주 사적인 밤> 프로그램을 통해 마틴 마르지엘라 전시를 보고 왔다.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라는 패션 브랜드의 디자이너로만 알던 사람이라 딱히 대단한 관심이 있던 건 아니었는데. 그가 2008년에 패션계를 떠나 순수 예술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으니까. 그냥 지난번 같은 프로그램으로 샤갈전을 본 경험이 좋았던지라 친구들을 부추겨 같이 예약했다. 


금요일 밤 8시, 미술관 운영이 종료된 뒤 프라이빗하게 진행되는 프로그램. 요즘 인기 있는 전시는 늘 지나치게 북적여 사람 구경에 치이는 경우가 더 많으니, 일단 그런 방해 없이 관람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그냥 봤다면 의미도 모른 채 지나쳤을 것 같은 작품들을 도슨트 님의 해설과 함께 더 넓은 시야로 볼 수 있었던 것도 좋았고. 프로그램이 끝나고도 한 시간가량 텅 빈 전시관을 우리끼리 다시 한번 돌 수 있어서, 친구들과 편하게 감상을 나눌 수 있는 것도 특별했다. 무엇보다도 이름만 알던 아티스트의 세계를 일면이나마 엿볼 수 있어서 좋았지만. 




Beauty as a quality only becomes apparent at certain occasions, in other words it is a quality in which those occasions play an important role.
아름다움이라는 속성은 특정한 상황에서만 분명하게 드러난다. 즉, 그러한 상황은 아름다움이란 속성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직도 현대 미술은 난해하게 느껴질 때가 더 많다. 더 이상 아름다움을 다투는 영역이 아니니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받아들이기 쉽지 않고. 예술가가 담아낸 의미가 닿아오는 경우도 있지만 내가 제대로 읽고 있는지는 영 알 수 없는 문제다. 예술이란 게 늘 그래서 내 식대로 해석하면 된다고 하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던져진 질문을 제대로 읽고 대답하고 싶은 고지식함이 있어서. 


아무런 배경 지식 없이 맞닥뜨린 마르지엘라의 세계도 물음표로 가득했다. 당최 의미를 알 수 없이 던져진 자극들을 도슨트 님이 풍부한 설명으로 입체화시켜주어 그저 다행이었을 따름. 정작 작가 본인은 본인의 작품들이 말이나 글을 통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랐다지만 어쩔 수 없지. 잠깐 고개를 갸웃하고 있으면 곧 그 배경과 의미에 대한 설명이 레이어처럼 겹쳐져서 그제야 거기 쓰인 질문들이 보였다. 하여간, 그 경로야 어찌 되었든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어 고마웠다. 결국 현대 미술을 감상하면서 내가 찾는 건 그런 게 아니었을까. 내가 평소에 담고 있던 질문을 다른 각도로 다시금 던져주어 생각해 보게끔 하고, 여운을 갖게끔 하고, 혹은 내가 생각지도 못한 지점까지 나를 데려가주기를 원해서. 



전시장의 공간 디자인 전권을 마르지엘라 본인에게 넘겼다고 한다. 베일에 싸인 작가답게 본인이 등장하지 않고 대리인인 큐레이터를 통해서만 커뮤니케이션했다고 하지만, 입구에 설치된 자판기부터가 작가의 요청에 따라 제작한 거라고. 데오드란트가 그려진 박스를 펼치면 그 자체로 리플릿이 된다. 전시장 내부의 구조와 간단한 설명을 담은. 


라벨이 없는 데오드란트는 티켓에도 리플릿에도 쓰이고 작품으로도 등장한다. 본연의 모습과 체취를 감추고 사회 속으로 자신을 욱여넣는 현대인의 표상이라고. 한국의 문화와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어떤 번호를 눌러도 똑같은 상품이 나오는데도 제각각 다른 번호를 눌렀다. 난 24번. 왜 24번을 골랐어? 하기에 그냥, 하고 말았지만.

그거 하나 눌러서 뽑는 데도 10년 지기 친구들의 성격이 다 다르단 게 보여서 입구부터 깔깔 웃으며 입장. 




바야흐로 인플루언서의 시대. 앤디 워홀의 말처럼 누구든 15분 간은 유명인이 될 수 있는 시대. 퍼포먼스가 곁들여진 작품에서 위에 걸려 조명을 받는 잡지는 누군가에 의해 무작위로 아래로 내려가기도, 다시 위에 걸리기도 한다고. 유명인의 초상이었을 표지들에서 그 얼굴들은 전부 머리카락 콜라주로 가려져 누구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아래 가득 쌓인 잡지들의 표지는 전부 자연에 대한 사진이다. 화산 폭발과 쓰나미와 지구에 대한, 어쩌면 훨씬 더 중요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은 위에 걸린 유명인들에게 진득하게 머무른다. 




말했듯이 공간 구성의 전권은 마르지엘라에게 있었고, 전시장엔 여백이 많았다. 특히 블라인드를 써서 의도적으로 전시장 내부를 미로처럼 만들고, 하나의 작품을 볼 때 다른 작품이 같이 보이지 않도록 독립적인 공간처럼 구성했다. 너무 여러 자극에 한 번에 노출되어 인증샷을 팡팡 남기고 후루룩 넘어가는 식의 구성을 지양했던 모양. 


한 번에 한 가지에 집중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그 메시지에 대해 충분히 씹어 넘길 시간을 주는 것 같아 좋았다. 블라인드라는 사무적이고 일상적인 소재로 작품과 작품 사이에 극적인 연출을 더한 것 자체도 신선했지만 (Red nails라는 작품에선 작은 규모의 작품을 먼저 보여주고, 뒤의 블라인드를 열어 100배 확대된 동일한 작품을 보게끔 한다.)




머리카락을 소재로 삼은 작품이 유난히 많았는데, 마르지엘라의 아버지가 이발소를 하셨단다. 어린 시절에 받는 자극의 영향이 작가들의 세계에 그대로 반영되는 걸 볼 때마다 신기해. 늘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 수 있었고, 가발이 여러 개 진열된 이발소가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장소이기도 했다고. 


<바니타스>라는 작품은 작품명 그대로 네덜란드 정물화의 주제를 그대로 가져와 인생의 덧없음을 보여준다. 끝으로 갈수록 나이 들어가는 머리카락의 색채와 질감. 그러나 끝에 가깝다고 죽음에 가까운 것은 아니고, 가장 어린 사람의 앞에도 죽음은 갑자기 찾아올 수 있는 것이라서. 백금발이 아니라 흑발이었으면 노화가 더 잘 표현되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다시 보니 오히려 나잇대 간의 동질성이 강하게 느껴지는 게 의미를 더 깊게 주는 것 같기도 하고.


앞에서 얼굴을 머리카락으로 다 가려놓기도 했었지만, 인물들의 가마 그 자체를 그대로 드러내 작품으로 삼은 것도 있었다. 지문과 마찬가지로 가마 역시 사람마다 다 다른 고유성을 가져서, 사실 가마야말로 숨길 수 없는 나의 아이덴티티라고. 이것도 이발소에서 온 영향이려니.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가 생각났다. "가마가 말이죠,라고 무재 씨가 말했다. 전부 다르게 생겼대요. 언젠가 책에서 봤는데 사람마다 다르게 생겼대요."


친구들과 서로의 가마를 들여다봤다. 이것이 내 진심이야, 하면서 머리를 숙인 채 생일 축하와 감사를 전하고 낄낄대기도. 







사진을 찍기보다 가까이 서서 더 오래 보고 듣고 생각해 보고, 경험하려고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우게 되는 전시였다. 여기 남긴 사진은 지극히 일부라, 오히려 사진 없이도 훨씬 더 오래 남을 인상을 준 작품들도 많았고. 전시 마지막에 일견 기괴하게 느껴지는 영상도 여러 번 곱씹으며 돌려 보았다. 모든 질문에 답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어떤 것들은 그냥 질문으로 오래 담아두는 게 더 중요할 때도 있으니까. 


그럴 수 있었던 건 좋은 해설을 덧붙여주신 김찬용 도슨트 님 덕분이라 무한한 감사를. 그냥 봐서는 영 난해한 전시라 인터넷에 불만족스러운 후기가 많다며 안타까워하셨다. 같은 마음을 담아 굳이굳이 또 남겨보는 후기. 혼자 보면서 오래 생각하고 나름대로 질문을 찾아보는 것도 좋지만, 가능하면 도슨트 해설을 들으며 찬찬히 둘러보기를 추천한다. 밖에서 보이는 것보다 더 남는 게 많은, 좋은 전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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